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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눈으로 본, 아름다운 사람들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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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의 농군시인 박형진
'찰지고 맛있는 사람들 이야기'가 찾아간 첫번째 장소는 전북 부안군의 변산이다. 최근 격렬하게 쟁점화되고 있는 새만금 간척사업,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등의 문제로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고 있지만, 노을 지는 해안의 아름다운 풍광으로 우리에게 더욱 익숙한 그곳은 예부터 마을 뒤의 들판에선 농사를 짓고 앞바다에선 그물질을 하던 반농반어의 대표적인 고장이다. 그래서인지 뱃사람 특유의 두둑한 배짱과 오기, 그리고 성실함과 끈기라는 농사꾼의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는 변산의 사람들은 육수기에 제철 만난 고기떼처럼 싱싱하고 활기찬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만 나와 농사짓고 사는 동안 어느새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첫딸 푸짐이가 스무 살 처녀가 된 지금까지 한 번도 그곳을 떠나본 적 없는 박형진 시인은 변산의 터줏대감이자 변화의 풍진을 함께 겪어온 산 증인으로서 변산과 그곳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등단 초부터 가난한 농촌의 환경과 농부들의 삶을 살아 있는 토속적 시어로 표현하면서 자신만의 확고한 문학적 영역을 고수해온 박형진 시인은 자신부터가 천생 농사꾼으로 그의 시는 몸과 정신이 일치하는, 생활 자체가 곧 시로 흡수되는 보기 드문 합일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이번 산문집은 수식 없는 일상 언어로 절실한 삶의 이면을 날카롭게 후벼왔던 그 시들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해학과 골계미가 넘친다. 판소리 사설조의 서술, 갯사람들과 농사꾼들이 사용하는 원색적인 단어와 어투는 소위 먹물쟁이들의 문학판에서는 맛보기 힘든 새로운 문체적 경험이라 할 수 있겠다. 구수한 농사꾼의 입심으로 듣는 쫀득쫀득한 사람의 맛 모항에 가면 들머리에 막걸리집이 있다. 동네 밖으로 출타를 하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든 반드시 거치게 되는 막걸리집은 항시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소이다. 농촌에서 막걸리는 뱃심을 든든하게 해주고 목청을 훤히 뚫어주는 최고의 음료. 오면가면 들르는 막걸리집에서 사람들은 텁텁한 농주 한 사발에 꼬인 속내를 풀어버리고 알큰하게 취기가 오르면 속엣말을 하거나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술자리의 여흥을 돋우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 사는 이야기임에랴. 남자들이 안주 삼아 술자리에서 나누는 사람들 이야기 속에는 그러나 '징헌' 무언가가 흐른다. 이 산문집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그렇게 농촌의 사내들이 막걸리집에서 나눔직한 '징헌' 인생살이의 단면들이다. 배고픈 시절의 변산 사람들에겐 가혹한 운명도 많았다. 입성을 해결하려다 꽁댕잇배와 함께 바다에 삼켜지고, 애꿎은 태풍에 나락이 잠기면 술로 인생을 망치기가 허다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늘 매질을 당하고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지금의 관점으로 상상하면 그처럼 불우한 시절이 또 있을까 싶은데, 의외로 그들에게선 삶을 즐길 줄 아는 여유와 아량이 엿보인다. 시인이 그리워하는 것은 오히려 요즘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낙천성과 좀 모자란 듯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의 넉넉한 심성이다. 오빠가 죽었을 때도, 신랑이 죽었을 때도 미친년처럼 웃어젖히더니 비만 오면 무덤가에서 귀신처럼 울어대는 고막녀, 오징어처럼 질긴 사람이라고 오징개 양반, 남의 배 타주고 용을 받으면 술로 다 조져버리는 조지기, 외출할 때마다 새하얗게 화장을 해서 분칠네, 닭똥집 좋아하는 군수의 닭똥집을 혼자 먹어버려서 좌천당한 면장님, 소주 댓병 마셔서 치질 고름을 한 대접이나 쏟아낸 서금용, 술 마시고 조갈증으로 냉장고에서 물인 줄 알고 참기름 한 병을 비워내곤 설사병으로 보름간을 죽다 살아난 허석모, 오줌을 마셨다는 박공진, 중국집 짬뽕 곱빼기 세 그릇을 비워야 속이 차는 정달원……. 이렇듯 울퉁불퉁하고 우습고 촌스럽지만, 진한 국물 같은 속내를 담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작가는 일희일비하는 삶의 다양한 맛을 깊게 우려내고 있다. 사람과 자연이 하나 되는 마음가짐 2부에서는 정성과 철학이 깃들었던 예전의 농사와 먹거리 이야기를 통해 자연을 존중하며 알뜰하게 활용하던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쪄먹고, 밥으로도 먹고, 술로도 담가서 먹고, 엿으로도 고아서 쑥인절미를 찍어먹기도 했던 고구마, 찹쌀고추장보다 더 맛있는 보리고추장에 밥 비벼먹던 이야기, 간장이 우리 일상사에서 차지하는 주술적 의미, 하얀 창호문에 뿌리던 팥죽 벽사의 의미, 다듬잇돌 위에서 탈곡하고 밥해먹고 떡해먹고 빗자루 만들던 수수, 맷돌에 갈아 국수 뽑아 먹고 겨울에 지붕 이어놓던 호밀, 할머니 등긁개로 만들어 쓰던 옥수수 강치 등의 에피소드를 통해서는 가난하지만 살뜰하게 일구던 옛 농촌의 살림이며, 푸짐한 인정과 민속의 면면을 엿볼 수 있다. 변산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쇠락해가는 농촌문화에 대한 안타까움을 바탕으로 씌어진 이 산문집을 통해 박형진 시인이 제기하는 물음은 다음의 두 가지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사는 방법일까? 가난한 농사꾼의 시심으로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길어올리는 애절하고 익살스럽고 고소한 이야기들을 음미하노라면 그의 순박한 물음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