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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백남준
아내 구보타 시게코가 말하는 백남준과 함께한 삶, 사랑, 그리고 예술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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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top100 1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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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추천사
서문
프롤로그

chapter 1 달콤한 테러리스트
#1 이 남자를 꼭 잡고 말겠어
#2 질풍노도의 소녀시대
#3 전쟁과 파인애플
#4 음악 지망생에서 문화 테러리스트로
#5 비디오와 예술을 섞어라
#6 당신 작품 참 좋았어요

chapter 2 거침없이 플럭서스
#1 뉴욕에서의 재회
#2 우리들의 실험, 코뮌 라이프
#3 아방가르드 파트너, 백남준과 샬럿 무어맨
#4 〈버자이너 페인팅
#5 외설을 연주하는 음악가들
#6 잘못된 만남
#7 캘리포니아 드림은 없다
#8 소호 탄생의 비밀

chapter 3 뉴욕을 강타한 황색 재앙
#1 큐레이터 시게코의 헌신
#2 가난한 플럭서스 커플
#3 〈TV 부처〉의 탄생
#4 달빛은 높은 예술, 백남준은 낮은 예술
#5 나의 뒤샹을 질투한 남자
#6 한국 남자를 좋아하는 유전자
#7 슬픈 결혼식

chapter 4 세상이 기다리던 쇼를 하라
#1 소름 돋는 천재와 세 살배기 아이
#2 독일의 감격시대
#3 34년 만의 금의환향
#4 한국 무덤에 반하다
#5 지상 최대의 쇼를 하라, 〈굿모닝 미스터 오웰〉
#6 남준 안에 무당 있다
#7 타틀린을 위한 헌정, 〈다다익선〉

chapter 5 부처, 야곱의 사다리를 오르다
#1 초대받지 않은 손님, 뇌졸중
#2 섹슈얼 힐링
#3 나는 ‘욘사마’ 열풍 1호
#4 백악관 노출 사건의 진실
#5 거장, 야곱의 사다리를 오르다
#6 간호사 스티븐
#7 고향에 가고 싶다
#8 그가 떠나던 날
#9 내 마음 속 부처
#10 백남준의 귀환

에필로그
백남준 연보
구보타 시게코 연보

참고문헌
이미지 제공처

저자 소개 2

구보타 시게코

관심작가 알림신청
 

Seiko Kubota,くぼた しげこ,久保 田成子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도쿄교육대학 조소과를 졸업한 후 시나가와 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인 플럭서스에 합류한다. 1964년 당시 독일에서 활약해온 전위예술계의 총아 백남준의 공연을 보고 강렬한 충격을 받아 새로운 예술을 갈망하며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뉴욕에서 백남준과 운명처럼 재회한다. 이때부터 2006년 백남준이 타계할 때까지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는 예술가 커플로 40여 년을 함께한다. 다음 해 백남준을 기리는 ‘백남준과 함께한 나의 삶’ 전을 개최했으며, 2015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64년 초 도쿄 나이쿠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도쿄교육대학 조소과를 졸업한 후 시나가와 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인 플럭서스에 합류한다. 1964년 당시 독일에서 활약해온 전위예술계의 총아 백남준의 공연을 보고 강렬한 충격을 받아 새로운 예술을 갈망하며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뉴욕에서 백남준과 운명처럼 재회한다. 이때부터 2006년 백남준이 타계할 때까지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는 예술가 커플로 40여 년을 함께한다. 다음 해 백남준을 기리는 ‘백남준과 함께한 나의 삶’ 전을 개최했으며, 2015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64년 초 도쿄 나이쿠아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이후 뉴욕 르네 블록 갤러리, 현대미술관 MoMA, 휘트니미술관 등에서 ‘비디오 조각’ 개인전을 여는 등 뛰어난 현대미술가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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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남정호는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뒤 2020년부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언론 경력 33년째인 국제문제 전문기자다. 89년 입사 이후 사회부, 정치부 기자를 거쳐 뉴욕?런던?브뤼셀 특파원을 지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정경대(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고려대에서 유엔사령부에 관한 연구로 국제관계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광운대 겸임교수이며 유엔한국협회 산하 유엔글로벌연구센터장, 서울대 국제학연구소 자문위원, 아시아소사이어티 자문위원, 한러대화 사회언론분과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과거 외교
저자 남정호는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뒤 2020년부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언론 경력 33년째인 국제문제 전문기자다. 89년 입사 이후 사회부, 정치부 기자를 거쳐 뉴욕?런던?브뤼셀 특파원을 지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정경대(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고려대에서 유엔사령부에 관한 연구로 국제관계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광운대 겸임교수이며 유엔한국협회 산하 유엔글로벌연구센터장, 서울대 국제학연구소 자문위원, 아시아소사이어티 자문위원, 한러대화 사회언론분과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과거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및 자체평가위원, 관악언론인회 부회장으로도 일했다. 주요 저서로는 『반기문의 도전』(김영사, 2016), 『나는 일하는 사무총장입니다』(김영사,2014), 『나의 사랑 백남준』(아르테, 2016), 『백남준: 동서양을 호령한 예술의 칭기즈칸』(아르테, 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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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7월 16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376쪽 | 654g | 150*205*30mm
ISBN13
9788901109497

책 속으로

어느 신문에도 나의 전시에 대한 기사는 없었다. 그 흔한 평론 한 줄 나지 않았고 평론가들은 괴상한 전시회라고 사석에서 혹평을 늘어놓기만 했다.
버림받은 전시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내 전시회를 좋게 보아준 이가 있었다. 바로 남준이었다. 내가 없을 때 전시장에 다녀간 모양이었다. 그 사실도 몇 달이나 지나 쇼게츠 홀 공연 후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야 알았다. 그는 내 이름을 듣더니, 지난겨울 나이쿠아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한 그 구보타 시게코가 맞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 전시회를 보았다면서 “당신 작품이 아주 창의적이고 독특해서 좋았다”고 칭찬해주었다. 그러면서 “일본 여자들은 대개 아주 작고도 섬세한 작품을 하던데 당신 것은 독특하게도 스케일이 큰 대륙적인 작품이더라”고 했다. 그러고는 “당신은 일본 여자보다는 중국 여자 같은 면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며 웃었다. ---「당신 작품 참 좋았어요」 중에서

1965년 7월 4일 워싱턴 스퀘어파크 근처의 허름한 건물에서 열린 플럭서스 공연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공연장은 냉방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좁고 낡은 방이었다. 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 등장해, 사타구니에 붓을 꽂고 쭈그리고 앉아 흰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 물감은 핏빛처럼 붉은색을 썼다.
관객은 20여 명 남짓이었다. 나의 공연을 보고 관객들이 놀라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형편없어!”Terrible! “더러운 아이디어야!”Dirty Idea!
웬만큼 엽기적인 일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대담하고 열려 있는 플럭서스 동지들이었지만, 그들에게도 내 공연은 큰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관객들이 하나둘 공연장을 떠나버렸다. 결국 남은 건 플럭서스 공연을 총 기획했던 마키우나스와 나의 일본인 친구들, 그리고 자신이 기획한 퍼포먼스를 보러 온 남준 등 다섯 명 정도였다. 공연 후 추잡한 예술이라는 비판도 들끓었다. 그간 가깝게 지내온 오노 요코조차 “게이샤나 할 짓”이라며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봐도 관중 앞에서 어떻게 그런 공연을 했는지, 나 자신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사랑의 힘이었다고 믿고 싶다. --- 「버자이너 페인팅」 중에서

자신의 생일인 7월 20일, 남준은 도쿄를 떠나 뉴욕으로 되돌아왔다. 늘 빈손으로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남준이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여느 때와는 완전히 다른 특별한 게 있었다. 일본에서 1만 달러나 되는 돈을 가져왔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금이었다.
남준의 돈이었지만 워낙 궁핍한 형편이었기에 그가 이런 큰돈을 어떻게 쓸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궁금해하는 눈치를 보였지만, 남준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더니 며칠 후 집으로 돌아오는 남준의 손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물건이 들려 있었다.
불상이었다. 그것도 인자한 얼굴을 한 게 아닌, 사바세계의 고통으로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불상이었다. 맨해튼 시내 골동품 가게에서 샀다고 했다.
골동품 부처상을 구입한 후 2년이 흐른 1974년, 남준은 뉴욕 보니노 갤러리에서 네 번째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 남준의 네 번째 개인전이 열리는 날, 보니노 갤러리를 찾은 평론가와 언론, 관객들은 그의 작품 앞에 몰려들었다. 가부좌한 부처상 앞에 TV가 있고 TV 뒤에는 비디오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화면에 부처의 모습이 나오게 만든 〈TV 부처〉였다. 단순한 배치만으로 부처가 TV 화면에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깊은 상념에 빠진 듯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제껏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아니 아예 상상도 하지 못했던 독특하고도 복합적인 작품이었다. 평론가들은 동양의 선(禪)과 서양의 테크놀로지가 만난 기념비적인 비디오 아트의 탄생에 열광했다. 남준의 명성이 뉴욕 예술계의 지축을 흔들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TV 부처의 탄생」 중에서

그런데 이상했다. 아기가 생기지를 않았다. 내 몸에 이상이 있는 건가. 반년 이상 노력을 해도 소식이 없자 마음이 급해져 병원을 찾아갔다. 검사를 끝내니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자궁 안에 혹이 있다는 비보였다. 악성종양, 즉 암이었다. 아기는 고사하고 지금 당장 자궁 적출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 이대로 끝나는 건가. 내가 아기를 갖는 일은 이제 불가능하다는 소리구나. 눈물이 솟구쳐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 고민 끝에 일본의 어머니에게 사정을 알렸다. 치료비 액수를 듣더니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미국의 병원비는 왜 그렇게 비싸냐고 했다. 내가 돈이 없이 비싼 보험을 들어놓지 않아 커버가 안 돼서 그렇다고 했더니 “지금 당장 일본으로 와서 수술을 받는 게 낫겠다”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다른 방도가 없었다. 어머니 말대로 일본으로 돌아가 치료 받는 방법밖에는. 결국 이렇게 뉴욕을 떠나게 되는구나, 병들어 아픈 몸으로…….
내가 일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며 남준의 머릿속에는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을까. 결혼은 안 했지만 우리는 10여 년 동안 연인으로, 커플로 지내왔다. 어느 날, 눈물을 참으며 짐을 정리하는데 남준이 내 옆으로 슬며시 다가왔다. 그러더니 히죽 웃었다.
“시게코.”
“…… 왜요.”
“우리 결혼하자, 당장.”
“뭐라고요? 병들어 아파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데 결혼하자고요? 당신 미친 거 아니에요?”
“방송국에서 일할 때 들었던 블루크로스 보험이 아직 살아 있어. 나랑 결혼해서 와이프 자격으로 수술 받으면 보험으로 치료비를 댈 수 있어.”--- 「슬픈 결혼식」 중에서

그의 독서욕은 가히 광적이라고 할 만했다. 그는 어디를 가든 책을 놓지 않았다. 동양고전에서 시작, 전문적인 경제서적에 이르기까지 그는 읽고 또 읽었다. 독서를 너무나 좋아한 탓에 아예 백과사전을 옆에다 갖다놓고 읽었다. 특히 공자와 맹자를 가장 즐겨 읽었다. 너무나 책에 몰두한 나머지 유럽 등을 떠돌다 모처럼 나와 함께 집에 있을 때에도 책장을 넘기는 데 온통 시간을 써버렸다. 1982년 이래 남준의 작품을 쭉 거래해온 유태인 화상 칼 솔베이도 “나를 만나러 신시내티에 올 때도 짐이라곤 늘 낡은 옷가지에 두툼한 책 몇 권이 전부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 「소름 돋는 천재와 세 살배기 아기」 중에서

볼품이 있든 없든, 자신이 고안해낸 이 패션이 남준은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친구이자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에게 이 독특한 셔츠를 선사하기도 했다. 자기가 입고 다니던, 주머니 두 개 달린 예의 그 때가 묻은 와이셔츠를 말이다. 1992년 2월의 일이다. 그는 이 독특한 와이셔츠의 진가를 깨우쳐주기 위해 친절한 설명서까지 곁들였다.
“바쁜 와중에 소생과 시게코를 생각해줘 고맙소. 그 답례로 뭐가 좋을까 생각한 끝에 소생이 디자인한 유일한 셔츠를 보내오. 항공여행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것으로 기내에서 웃옷을 벗을 때도 여권이 절대 없어지지 않도록 커다란 주머니를 두 개 달았소. (……) 조금 더럽지만 지금은 빨아줄 시간이 없음.”--- 「소름 돋는 천재와 세 살배기 아기」 중에서

남준은 자신의 몸에 몽골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이를 자랑스러워했다. 1977년, 그는 어느 기고문에서 자신의 모험심과 극단적인, 다시 말해 아방가르드적인 요소를 사랑하는 성격이 몽골 유전자 때문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왜 내가 쇤베르크에 관심을 보였는지 생각해본다. 그가 가장 극단적인 아방가르드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다면 왜 그의 ‘극단성’에 관심을 보였을까? 나의 몽골 유전자 때문이다. 몽골…… 선사시대에 우랄 알타이 쪽의 사냥꾼들은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 한국, 네팔, 라플란드까지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독일의 감격시대」 중에서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해요?”
내가 물으면 그는 힘없이 답했다.
“세계의 부조리, 부조리에 대해 생각했어. 내가 왜 이리 쓰러져야 하지? 왜 나지? 세상은 참 불공평해…… 신도 불공평하고.”
한평생 예술을 위해 모든 걸 바쳐온 그였다. 시도 때도 없이 분출하는 창작에 대한 영감과 열정으로 늘 바쁜 그였다. 그래서 자식을 낳고 키울 시간도 없다고 했던 남자였다. 그런데 그만 뇌졸중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하고 싶은 일은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날개 꺾인 독수리, 사지를 잃은 맹수와 같았다. 자신에게 닥친 믿을 수 없는 불행에 남준은 놀라고, 슬퍼하고, 절망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뇌졸중」 중에서

“내가 아프니까 시게코가 바빠. 손이 천 개 달린 부처님처럼 바빠.”
정말 그랬다. 그래서 몸도 힘들었다. 당시 나의 건강 역시 그렇게 양호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은 행복했다. 비록 나이 들고 병들어 맞게 된 변화이긴 했지만, 그가 나를 이토록 절실히 원하는구나 하는 자각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뿌듯함을 가져다주었다. 피를 나눈 내 부모형제도 이렇게 나를 원한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마음을 적셨다.
마이애미에서 그림과 낙서와 일기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던 시절, 남준은 크레파스로 종이 위에 손이 여러 개 달린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시게코는 천수관음’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리고 내게 주는 글을 남겼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게코, 우리가 젊었을 때 당신은 내게 최고의 연인이었어. 이제 내가 늙으니 당신은 최고의 어머니, 그리고 부처가 되었어.” ---「나는 욘사마 열풍 1호」 중에서

그간 남준의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아, 이 사람이 이제는 신이 되려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전이라면 절대 만들지 않았을 작품을 그는 만들고 있었다. 특히 〈야곱의 사다리〉를 보면서는 몸이 오싹 떨려왔다. 칭기즈칸이나 알렉산드로스처럼 철저하게 지상의 영웅들에 몰두해 있던 그가 이제는 천국과 죽음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영적인 준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 사람은 야곱의 사다리를 타고 또 어디로 가려는가. 나 혼자 두고……. 무서웠다.

---「거장, 야곱의 사다리를 오르다」 중에서

출판사 리뷰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 사이의 서사(敍事)와 서정(抒情)이 베일을 벗다

백남준은 일본, 독일, 미국, 한국 등을 무대로 활동했던 세계적인 예술가였지만 이제껏 그에 관한 전기적 사실이 제대로 정리된 적이 없다. 이 책은 백남준과 거의 반평생을 보낸 아내의 회고를 통해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백남준의 행적과 흔적을 찾아 그의 삶을 재구성한다. 이를 통해 열여덟 나이에 고향을 떠나 세계를 떠돌며 유목민으로 살아온 백남준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가 되기까지 겪어야 했던 드라마보다 극적인 삶이 드러난다.

구보타 시게코는 백남준의 사적인 삶을 지켜본 아내이기도 하지만 플럭서스(Fluxus: ‘흐름’이라는 뜻으로 무정부주의, 허무주의 등을 신봉하는 다다이즘과 맥을 같이한다. 의외성을 기초로 한 반反자본주의적 성향의 예술적 행동주의) 운동에서부터 비디오 아트를 함께한 예술적 동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녀의 회고는 단순히 백남준의 삶을 재구성하는 데만 머무르지 않는다. 쇤베르크에 심취했던 전위음악가에서 플럭서스 행위예술가로, 그리고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을 개척하기까지 백남준의 예술세계는 몇 가지 중요한 변곡점들을 거친다. 파괴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백남준을 처음 대면한 구보타는 그 자신이 백남준으로부터 강한 예술적 충격과 전율을 느낀 바 있다. 또 비디오 아트에 본격적으로 몰입해 들어가는 백남준의 엄청난 집중력과 탁월한 상상력, 그리고 한계를 모르는 정신세계를 지켜본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는 그녀의 회고가 ‘추상’으로 머물던 백남준의 작품세계에 살을 붙이고 온기를 불어넣어 그의 예술에 더욱 풍성한 이야기를 제공할 것임을 시사한다. 여기에 그녀와 백남준이 1960년대 아방가르드 문화운동과 이후 비디오 아트의 최전선에서 벌였던 생생한 일화들이 덧붙여진다. 비평이 덧대어지기 전,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다. 독자들은 이를 통해 현대예술과 직접 접속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 밖에 이 책에는 1965년 전위예술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구보타 시게코의 퍼포먼스 〈버자이너 페인팅〉의 진짜 기획자, 10년간 연인으로 지내면서 결혼만은 한사코 거부했던 백남준의 돌연한 청혼과 결혼식 이야기, 〈TV 부처〉 〈TV 정원〉 〈야곱의 사다리〉 등 백남준을 현대미술의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들의 탄생 비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음악으로 달랬던 말년의 삶 등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90여 컷의 자료 사진과 함께 공개되어 있다. 본문에 수록된 이미지 가운데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백남준의 드로잉, 구보타 시게코의 작품사진, 초상 등이 상당수 많이 포함되어 있다.

현대예술의 거장이라는 명성 뒤에 가려진 백남준의 땀과 눈물을 되살리다

세계인이 사랑했지만 정작 인간 백남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몰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는 명성 뒤에 가려진 백남준의 가난, 외로움, 좌절의 장면까지 상세히 그린다. 이로써 그를 둘러싸고 있던 막연하고 난해한 이미지가 걷히고 그가 어떤 사연과 어떤 피를 가진 인간인지가 비로소 드러난다.

백남준은 한국 최초의 ‘재벌’로 불렸던 백낙승(白樂承)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국내에 딱 두 대밖에 없었다는 캐딜락 승용차 중 한 대가 백남준 집의 소유였을 정도지만 정작 그는 평생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과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했을 때까지는 집안의 경제적 원조가 있었다. 그러나 구보타가 그를 만났을 당시만 해도 형들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가산이 탕진된 상태였다. 비디오 아트는 많게는 수십, 수백 대의 TV 수상기가 필요한, 말하자면 돈이 많이 드는 예술 분야다. 백남준은 후원자를 찾기 힘들었던 무명 때는 물론이고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명성을 쌓은 날까지도 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구보타는 전한다. 1984년 뉴욕, 파리 등 세계 주요도시에서 동시에 생중계된 우주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진행하고 이때 진 빚으로 몇 년 간 죽을 고생을 했다는 후문도 있다. (※ p. 252)

예술을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좋을 만큼 그는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했다. 작품 창작과 관련해서는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가난하고 궁핍했던 1972년, 그는 일본에 있는 형들을 방문해 1만 달러의 유산을 받아 온 적이 있다. 그러나 돈이 생기자 막상 눈앞의 경제적 곤궁을 해결하기보다 맨해튼 시내 골동품 가게를 뒤져 불상 하나를 사왔다. “사바세계의 고통으로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불상”이었다. 이 불상은 2년 뒤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중 걸작으로 손꼽히는 〈TV 부처〉로 탄생된다. (※ pp. 161~162) 뇌졸중과 싸워가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운 구겐하임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꺾을 수 없는 창작의지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병마와 싸워가며 만들어낸 〈야곱의 사다리〉에는 예술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한 대가의 눈물겨운 투혼이 투사되어 있다. (※ pp. 306~320)

천진한 웃음으로 유쾌한 농담을 던지는 인간 백남준의 매력을 담다

지인들은 백남준을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에 유쾌하고 낙천적인 정서를 갖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가 예술적 “아버지”로 생각했던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도 만약 당장 죽는다면 가장 아쉬운 게 뭔가라는 질문에 “남준의 농담을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답했을 정도다.

백남준은 컴퓨터처럼 정확한 두뇌와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였지만 반면 지독한 건망증이 있었다. 물건을 노상 잃어버려서 아예 소지품을 넣고 다니는 커다란 주머니를 덧댄 셔츠를 입고 다녔고 그것을 친구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에게 선물하기까지 했다. 당뇨병 때문에 쉬이 피로를 느껴 아무 데서나 잠을 청했던 버릇이랄지, 한 끼 식사로 고기와 생선을 같이 먹거나 익지도 않은 베이컨을 집어 먹는 식습관 등 아내 구보타의 회고에는 허점마저도 매력적이었던 인간 백남준이 살아 있다.

백남준의 금전적 무절제에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궁핍함을 모르고 자란 배경이 있다. 하지만 이보다 무소유를 중요시하는 동양철학의 영향이 컸다. 굿판을 벌여 사람들을 소리치고 춤추게 만드는 무속은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만주벌판을 거침없이 달리던 기마민족의 유전자는 그에게 진취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을 주었다고 스스로 믿었다. 한국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에서 활약한 예술가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과 내면을 가장 잘 보존한 사람”(이어령)이었던 것이다.

1984년 34년 만에 고향을 찾은 백남준의 상기되고 들뜬 표정에서 드러나듯이, 고향은 그에게 언젠가 돌아갈 따듯한 어머니의 품과 같았다. 그 때문에 형들이 일본인으로 귀화를 할 때도 그는 한국 국적을 유지했다. 냉전시대에는 고국 땅을 밟는 데 방해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동구권의 초청에는 일체 응하지 않았다. 구겐하임 전시회를 끝내고 이후 병세가 급격하게 안 좋아진 후에는 〈울밑에서 선 봉선화야〉 〈아리랑〉 등을 연주하면서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그와 들숨과 날숨을 함께했던 배우자가 전하는 백남준 최후의 나날들에 대한 이야기는 때로 코끝을 아릿하게 만든다.

우연과 운명 사이를 가로지르며 40년간 이어졌던 인연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의 인연은 19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에서 플럭서스 행위예술가로 활약하던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컬러 TV와 로봇을 연구하기 위해 일본에 와 있었다. 1963년, 신문 기사를 통해 백남준을 알게 된 구보타는 “갸름한 얼굴에 우수에 젖은 듯 깊게 그늘진 눈매를 가진” 그에게 첫눈에 반한다. 대패로 피아노를 깎아내는가 하면 도끼로 피아노를 가차 없이 내리찍고, 먹물에 적신 머리를 붓 삼아 획을 긋고(〈머리를 위한 참선〉), 신고 있던 가죽구두를 벗어 물을 콸콸 따르고는 단숨에 마셔버리는(〈심플〉) 등 쇼게츠 홀 퍼포먼스(1964년)는 그의 데카당트한 문화 테러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당시 일본 내에서 플럭서스 운동에 관여하고 있던 구보타는 이를 계기로 도미(渡美)한다. 그리고 맨해튼의 플럭서스 본부에서 운명처럼 백남준과 재회한다.

플럭서스 동료로 시작된 이들의 인연은 1964년 9월 어느 날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한동안 일방적이었던 구보타의 연모와 그리움이 마침내 응답을 받은 것이다. 이날을 계기로 백남준과 구보타의 관계는 깊어지지만 한 여자의 품에 들어앉히기에 백남준은 너무나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백남준과의 퍼포먼스를 통해 ‘전위예술계의 잔 다르크’라는 별명을 얻은 아름다운 첼리스트 샬럿 무어맨(Charlotte Moorman, 1933~1991)이라는 존재도 거슬렸다. 남녀관계에서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시기와 질투가 없었을 리 없다. 그것이 오직 구보타의 몫이라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결국 백남준과의 관계를 포기한 그녀는 작곡가 데이비드 베어먼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들여 첫 번째 결혼을 한다. 그러나 유태인 시부모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이혼 등 결코 녹록지 않은 인생 경험을 하게 된다.

처음 본 순간부터 백남준의 연인이 되리라 다짐했다는 구보타가 한결같이 백남준을 향해 적극적인 구애를 펼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반면 무심해 보였던 백남준의 태도에 대해서는 궁금증이 일 수밖에 없었다. 연인관계가 깊어지던 즈음 그가 선물하곤 했다는 향수, 적지 않은 사연을 가지고 1977년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된 배경(※ pp. 187~194)을 엿보면, 연인이자 아내였던 구보타에 대해 그가 가졌던 섬세하고 따뜻한 마음이 읽힌다. 뇌졸중으로 투병 중일 때는 수많은 드로잉과 메모를 통해 아내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시게코, 우리가 젊었을 때 당신은 내게 최고의 연인이었어. 이제 내가 늙으니 당신은 최고의 어머니, 그리고 부처가 되었어.” (※p. 300)

비디오 아티스트 구보타 시게코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하다

예술가로서 구보타 시게코는 백남준의 그림자에 눌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불행한 비디오 작가라는 평을 받곤 했다. 국내에서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의 일본인 아내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도 많았다. 이 책은 한 남자에 대한 간단없는 사랑을 불태웠던 여자 구보타 시게코의 회고록일 뿐만 아니라 플럭서스 예술가이자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그녀를 재조명하는 책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일부 편견과 오해로 점철되었던 그에 대한 시선을 교정하게 될 것이다.

니가타의 강인한 자연 속에서 자라난 구보타 시게코는 어려서부터 예술적이고 자유분방한 환경에서 자라난다. 아버지의 관심과 배려 속에서 체계적으로 미술 교육을 받은 그녀는 열입곱 살에 중앙미술전에 나가 입상을 하는 등 천재 미술 소녀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후 조소과를 택해 대학에 입학하지만 미술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 특유의 보수적인 분위기에 그녀의 거침없는 성정이 억눌리고 부대끼었다. 이즈음 고루함과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의식에 숨 막혀 하던 그녀는 오노 요코(小野洋子) 등과 교류하던 현대무용가인 이모 구니 치야(邦千谷)를 통해 플럭서스 운동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1964년 초 일본에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설치작품 〈연애편지〉로 개인전을 갖고, 그해 뉴욕으로 떠나 플럭서스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플럭서스 아티스트에서 비디오 아티스트로 발돋움할 때는 “남편의 예술세계를 베껴먹는 얄팍한 날치기 작가로 매도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더더구나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는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야 살 수 있다는 걸” 의식했다. 전쟁에 비할 바 아니었다. 그 속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마르셀 뒤샹의 무덤〉 등 독창성과 심미성이 돋보이는 비디오 아트의 걸작이 탄생한다. 뉴욕의 3대 현대미술관인 현대미술관(MoMA), 구겐하임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가진 걸출한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점은 그녀가 더 이상 백남준의 그늘로 존재하지 않음을 방증한다.

남편은 아내에게 비디오 예술을, 아내는 남편에게 조형미술을 가르치다

예술가 커플로서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가 나눈 교감은 작게는 비디오를 나르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서로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주고받기까지 폭넓고 다양했다. 구보타 시게코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로 거듭나기까지 연인 백남준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컸음은 물론이다. 그녀가 쓴 비디오 기법 자체가 백남준에게서 전수받은 것이고 출세작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는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라는 신천지를 개척하지 않았더라면 탄생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구보타도 백남준의 조력자 역할에만 머물지 않았다. 쇤베르크에 심취했던 음악도로 예술을 접한 백남준은 미술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다. 실제로 그는 가깝게 지내던 한 일본인 교수에게 “나는 조형(造形)은 안 돼”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현재 비디오 조각은 백남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지만, 이는 조각가 출신인 구보타 시게코가 개척한 분야이기도 하다. 존 핸하트(John G. Hanhardt)를 백남준에게 소개한 것도 구보타였다. 핸하트는 비디오 아트라는 예술 장르를 현대미술의 꽃으로 피우는 데 큰 기여를 한 큐레이터다. 그밖에도 백남준이 ‘홀리 솔로몬 갤러리’의 전속작가로 발탁될 수 있도록 도운 점 등 구보타는 음으로 양으로 그의 예술활동을 도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일화

① 〈버자이너 페인팅〉의 진짜 기획자
1965년, 전위예술계를 발칵 뒤집은 사건이 일어났다. 퍼페추얼 플럭서스 페스티벌에서 구보타 시게코가 선보인 〈버자이너 페인팅〉 때문이다. 그녀는 사타구니 사이에 붓을 꽂고 커다란 흰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 물감은 핏빛처럼 붉은색이었다. 잭슨 폴록이 화실 바닥에 페인트를 뚝뚝 흘리던 제작 방식을 빗대는 동시에 그것을 뒤집어버린 이 액션페인팅에 대해, 당시 많은 남성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플럭서스 동료들까지도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오랫동안 구보타 시게코의 기획으로 알려져 있던 이 퍼포먼스의 진짜 기획자는 백남준이었다. 1965년 연인 관계를 맺고 있던 백남준이 퍼페추얼 페스티벌을 앞둔 어느 날 구보타 시게코에게 이 퍼포먼스를 제안하고 그녀는 수치심을 이겨내고 오로지 백남준에 대한 “사랑”으로 이 제안을 수락한다. 그리고 백남준은 이것을 비밀에 부쳐두기를 원했다. (※ pp. 98~105)

② 조지 마키우나스와 오늘날 소호의 탄생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였던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 1931~1978)는 1964년 〈오리기날레〉 공연 꺹제로 남준과 다른 동료들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자 한 톨의 미련 없이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깨끗이 손을 씻는다. 그는 즉각 플럭서스의 종말을 선언하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섰다. 예술가의 길에서 벗어난 마키우나스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삶을 시작한다. 부동산 개발이었다. 그는 버려진 공장지대였던 뉴욕 맨해튼 남부의 소호 지역 개발에 착수한다. 소호 일대 건물 27개를 사들여 리모델링한 뒤 아주 싼 값에 예술가들에게 팔아넘기는 방법이었다. 이 지역에 예술가들이 넘쳐나기 시작하자 아틀리에는 물론이고 이들의 구미에 맞는 싸면서도 제법 멋들어진 음식점, 옷가게, 술집 등이 하나둘 생겨났다. 이렇게 해서 40년이 흐른 지금 뉴욕, 아니 세계에서 가장 전위적이면서도 세련된 지역으로 꼽히는 소호가 탄생하게 된다. (※ pp. 134~141)

③ 10년간 결혼만은 한사코 거부하던 백남준이 돌연 구보타 시게코에게 청혼한 까닭
백남준은 “난 아이 가질 생각이 없어. 예술하고 작품 만드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라고. 그리고 나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골치만 아프지”라고 말하곤 했다. 젊어서 혹독하게 가난했을 때는 엄두를 못 냈지만,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자 구보타는 아기를 원하게 된다. 그러나 자궁암이었다. 아이는 둘째 치고 살기 위해 수술을 받아야 할 형편이었다. 당시 보험이 없던 구보타는 엄청난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일본으로 돌아가 병을 치료하려고 짐을 싼다. 그때 백남준이 청혼을 한다. 부부의 연을 맺으면 백남준이 든 보험 혜택을 구보타가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0년을 연인으로 지내면서도 결혼만은 한사코 거부하던 그 자유인이 구보타의 병 치료를 위해 결혼을 결심한 것이다. (※ pp. 187~194)

④ 1998년 백악관 만찬장에서 벌어진 일
클린턴의 섹스스캔들로 시끄럽던 1998년, 김대중 대통령 부부의 미국 방문을 맞이하여 백악관에서 만찬이 열린다. 이때 초대받는 백남준이 클린턴 대통령과 악수를 하기 위해 휠체어에서 일어나면서 바지가 벗겨지는 사고가 났다. 이를 두고 항간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의 부도덕한 행동을 비꼬는 행위예술이었다, 반신불수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환자의 단순한 실수였다, 장난기 많은 백남준이 근엄한 권력자들 앞에서 보여준 희대의 정치풍자였다” 등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백남준과 동행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정황을 보건대 구보타는 그것이 명백한 실수였다고 전한다. (※ pp. 301~305)

⑤ 간호사 스티븐과 도난당한 작품
1999년 백남준의 간병인으로 일을 하게 된 스티븐은 뇌졸중 치료에 큰 도움을 준 간호사였다. 왼쪽 신체가 마비된 백남준을 돌보는 것은 중노동에 비할 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불평 없이 백남준의 생활습관부터 재활운동까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챙겼고, 그 덕에 건강을 회복한 백남준은 구겐하임 회고전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다. 그러던 2001년 9월 11일, 쌍둥이 빌딩 테러가 일어난다. 참사 현장에서 백남준 부부의 아파트가 지척이었다. 스티븐을 뉴욕에 남겨둔 채 백남준의 건강을 위해 마이애미로 피신을 떠난 구보타는 이튿날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한다. 은행예금은 물론이고 현금과 수표, 신용카드 등 수십만 달러어치가 없어졌고, 머서 가 아파트 외에 다른 스튜디오에 있던 백남준의 작품 상당수가 도난당한 것이다. 그들이 아들처럼 사랑하고 신뢰했던 스티븐의 짓이었다. 이후 도난당한 작품이 소더비 등의 경매에 나오기도 했지만 스티븐은 끝내 찾지 못했다. 스티븐에 대한 사랑이 컸기에 이 일은 백남준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 pp. 320~330)

추천평

백남준은 언제나 자유롭고 거침없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을 잃지 않는 ‘영원한 젊은이’였다. 예술 역시 그에게는 심각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위한 즐거운 저항이요 도발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984년이다. 위성 TV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성공적인 발표 이후 모 방송국의 초청으로 34년 만에 고국을 찾은 그를 처음 만났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공연도 함께 기획하게 되었다.
한 살 차이인 우리는 금방 친해져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내가 문화부장관으로 있던 1990년 어느 날, 그가 나를 만나려고 문화부에 찾아왔다가 수위실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늘 즐겨 입던, 커다란 주머니를 덧댄 낡은 와이셔츠와 헐렁한 멜빵바지 차림으로 왔는데, 수위가 그만 이 유명한 예술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소동 끝에 장관실로 안내된 그에게 신분증이라도 보이지 그랬느냐고 묻자 그는 여권이며 돈 등 모든 소지품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몽땅 호주머니에 넣고 꿰맸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는 가끔 크리스털 구슬에 슥슥 그림을 그려 나에게 선물로 주곤 했는데, 문제는 수성펜으로 그려서 시간이 지나면 그림이 지워져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수성펜으로 그리면 그림이 사라지지 않느냐”고 하면 그는 “예술이란 원래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거”라고 웃으며 말했다.
백남준이 한국에서 예술을 했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 되었을까? 나는 가끔 주변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아마도 힘들었을 거라고. 아쉽게도 한국 사회는 귤을 맛있는 귤로 키우지 못하고 탱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일찍 한국을 떠난 덕분에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과 내면을 가장 잘 보존한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그가 만든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기억과 한국의 문화적 유전자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령(전 문화부 장관)
속 깊은 사이끼리만 소곤소곤 속삭이는 말에는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남들은 모르는 이야기를 나누고 남들은 모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상의 행복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백남준 선생을 전위적인 예술가로만 기억하지만 구보타 시게코 여사에게 백남준 선생은 달콤한 사랑의 상대이며 전복적인 예술반란의 동지이며 다감하게 일상을 속삭이는 반려자였습니다. 남정호 기자가 구보타 여사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준 덕분에 우리는 천의 얼굴을 가진 백남준의 모습을 더 또렷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현대 한국이 나은 세계적인 천재 예술가의 참모습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해야겠습니다. 하늘의 그도 그러라고 할 거 같습니다.
황병기(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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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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