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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독자에게
영국에는 셰익스피어, 조선에는 박지원 타고난 효자, 빛나는 앞날을 기대하다 청년 시절의 방황과 고민 박지원의 고뇌와 문학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다 벗들과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연암골로 들어가다 최고의 기행문 《열하일기》를 쓰다 열하에서의 뜨거운 만남 옥갑에서의 하룻밤 <옥갑야화> 양반의 허위의식을 풍자한 <허생전> 북경의 이모저모 <황도기략> 자애로운 아버지 박지원 뒤늦게 벼슬길에 나서다 고을을 달라지게 하다 정조 임금도 사랑한 박지원의 재능 백성을 감동시키는 벼슬아치 그리운 벗을 위하여 면천 군수 시절 박지원을 향한 시기와 모함 마지막 벼슬, 양양 부사 내 몸을 깨끗이 씻어 달라 박지원이 남긴 것 박지원의 발자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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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포기하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다
박지원은 1737년 한양 반송방 야동에서 아버지 박사유와 어머니 함평 이씨의 막내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할아버지는 경기도 관찰사, 병조 참판까지 지냈으나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 집안은 늘 가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열여섯 살에 이보천의 딸과 결혼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합니다. 장인과 처삼촌 이양천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그의 문학적 재능이 빛을 보게 됩니다. 스무 살부터 과거 시험을 준비하지만 당시 타락한 정치 사회와 관료들의 행태, 사대부들의 속물적 모습을 혐오하여 과거를 통한 출세와 입신양명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치중한 것이 이용후생의 실용적 학문과 창조적 글쓰기였습니다. “글 짓는 능력을 타고났지만, 까닭 없이 비방을 당할 것이다.” 박지원의 사주를 본 중국 점쟁이의 말처럼 박지원은 평생 남의 노여움을 사고 비방을 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말과 행동에 있어 엄정하고 원칙을 중시한 그의 태도가 때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박지원은 근거 없는 비난이나 오해에 마음 쓰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고 독서를 통해 사고의 폭을 넓혀 나가면서, 「마장전」, 「예덕선생전」, 「민옹전」, 「양반전」 같은 소설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 세상 사람들과 나누었습니다. 새로운 문체로 새로운 사상을 낳다 박지원은 연암골로 들어가기 전 십여 년간 백탑 주위에서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홍대용, 이서구 등의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활발하게 교유하면서 청나라의 앞선 문물(북학)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무렵 박지원은 ‘옛 것을 본받되 새롭게 창조하자.’라는 뜻의 ‘법고창신’이라는 독창적인 문학론을 펼칩니다. 중국의 고문을 그대로 모방하지 말고 그 정신은 본받되 새로운 문체(표현)로 현실을 참되고 참신하게 그려내는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박지원의 사상적 기반이라고도 할 수 있는 법고창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정신입니다. 시대를 넘어 영원한 고전 『열하일기』를 쓰다 2년여의 연암골 생활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온 박지원에게 인생 최대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는 진하별사로 선발된 팔촌형 박명원이 박지원에게 수행원으로서 동행할 것을 권한 것입니다. 부패한 정치 현실에 좌절하고 가난에 시달리던 박지원에게 연행은 돌파구이자 선진 문물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였습니다. 박지원은 연행을 통해 청나라의 발전된 모습과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계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당파와 개인의 영달에만 몰두해 있는 조선 지배층의 행태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의 변화와 선진 문물을 소개하기 위해 『열하일기』를 쓰게 됩니다. 청나라를 통해 세계정세의 흐름을 포착하려는 박지원의 열의가 가득 찬 『열하일기』는, 세상에 나오자 혁신적인 사상과 새로운 문체 때문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한편 양반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한 내용 때문에 큰 반감을 사게 됩니다. 이용후생으로 백성을 감동시키다 벼슬에 뜻이 없어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했지만, 극심한 가난과 주위의 강권으로 쉰 살에 선공감 감역이라는 말단 관리로 벼슬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벼슬살이를 시작한 지 반년이 못 돼 부인이 세상을 떠납니다. 박지원은 그 뒤에 재혼을 하지 않고 혼자 지낼 정도로 아내를 사랑했으며, 자식들에게는 일상의 사소한 것까지 챙기고 배려하는 자애로운 아버지였습니다. 이후 안의 현감, 면천 군수, 양양 부사를 거치면서 벼슬에 있을 때는 백성 위에 군림하는 수령이 아니라, 농사법과 농기구를 개량함으로써 백성들을 잘살게 하기 위해 노력하여 백성들을 감동시키는 목민관이었습니다. 사회의 통념에 안주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살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천주교 탄압도 심해지고 정국이 혼란에 빠집니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박지원은 마지막 벼슬인 양양 부사에서 물러나 계산초당에서 조용하게 지냅니다. 그즈음 오랫동안 앓아 온 울화병과 중풍으로 고생하다 증세가 악화되어 1805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자신을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을 남긴 채. 나라 안팎으로 변화를 모색하던 조선 후기, 세상의 변화에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맞서 치열하게 살다 간 박지원. 그는 남을 흉내 내지 않고 개성 있게 생각하고, 창의적인 글을 쓰고, 실천적으로 행동한 지식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