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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16세기 스페인 귀족이자 뱀파이어인 ‘이시드로’가 영국인 교수 ‘애셔’ 앞에 나타난다. 그는 동료를 살해한 범인을 잡아 달라고 부탁하는데, 사실은 수사를 맡지 않으면 교수의 사랑스런 아내 ‘리디아’를 죽이겠다는 협박이었다. 게다가 뱀파이어 법칙상, 사건이 해결되면 애tu는 살해당할 것이 분명했다!
흡혈귀 전설은 모든 문화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다. 브램 스토커는, 낮에는 관에서 자다가 밤에 인간의 피를 마시며 박쥐나 안개로 변신하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뱀파이어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이후 100년 동안 뱀파이어는 대중문화 속에 충실히 스며들었고 새로운 이미지를 다양하게 만들어 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로 유명한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는 비교적 전통적인 캐릭터였으며, 존재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색적이었다. 영화 “블레이드”에서 뱀파이어는 외계인 침략자 같은 악당으로 그려지지만 “언더월드”에서는 경쾌한 음악과 함께 경쾌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또한 저패니메이션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몰래 스며드는 사악한 존재로, 『뱀파이어헌터D』에서는 인간의 지배자로 등극하기도 한다. 요즘은 뱀파이어가 팝 아이콘의 하나로 자리 잡은 듯하다. 『밤을 사냥하는 자들』에 등장하는 뱀파이어는 일견 전통적인 이미지를 따르고 있다. 주인공 애셔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고전적인 뱀파이어의 규칙과 능력, 특성들이 소설적인 기교로 잘 포장되어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다. 빅토리아 여왕 치세를 막 벗어나 기존의 인습과 과학의 합리성이 공존하던 시대인 ‘1907년 런던’이라는 배경은 이런 특징에 힘을 더해 준다. 흐릿하고 자욱한 안개 속에 뒤덮인 런던에는 이성과 마성이 함께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 속에서 지식인인 애셔는 뱀파이어라는 ‘미신’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지만 결국 논리적인 방식으로 범인을 찾으려 하고, 의학을 공부하는 리디아는 과학 지식을 이용해서 단서를 조사한다. 이러한 설득력 있고, 현실적인 전개 과정이 판타지를 읽는 재미를 더해 주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에 나오는 뱀파이어들이 전통적인 이미지를 따르면서도 묘하게 색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깊이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인간일 때의 직업을 못 버리고 의료 활동을 하는 의학박사 뱀파이어, 신께 자비를 호소하는 수도사 뱀파이어, 뱀파이어가 된 것을 후회하는 어린(!) 뱀파이어, 무리 내의 알력 다툼으로 괴로워하는 다수의 뱀파이어들. 고정관념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는 이들은 이 책에 상당한 개성을 불어 넣는다. 무엇보다 독특한 것은 이시드로를 비롯한 나이 많은 뱀파이어들이 언뜻언뜻 내보이는 푸념이다. 이들은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고 자신과 아귀가 맞지 않게 변해 버린 세상에 짜증을 부린다. 시종일관 우아하게 행동하던 이시드로가 기름등잔을 입으로 불어 끄려다가 당황하는 장면에선 실소가 터져 나오지만 기존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은 왠지 애처롭다. 그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불사(不死)라는 힘의 무게와 자신의 세계가 사라져 버리는 것에 대한 슬픔, 그리고 이미 자신들이 사회의 흐름에 동참할 수 없는 죽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몸서리친다.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어쩔 줄 모르는 뱀파이어의 고뇌……. 그들에게 불사(不死)는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