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권
1부 어둠 속의 아이들 2부 재스민 향기 2권 3부 슬픔에 젖은 나방 4부 금지된 술의 첫 맛 5부 뱀의 심장 6부 거짓된 안식 7부 내가 사랑한 이들 감사의 글 옮긴이의 글 |
Rani Manicka
|
그 시절에는 귀신도 산 사람처럼 이승을 활보하고 다녔지. 휘황찬란한 전깃불과 왁자지껄한 문명에 화들짝 놀라 숲속 깊숙이 숨어들기 전이었어. 귀신들은 거대한 나무들 틈새, 서늘한 청록색 그림자로 가득한 곳에서 살았단다. 너도 햇빛이 너울거리는 고요하기 짝이 없는 숲속에 홀로 서 있노라면,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이 난 귀신들의 번쩍거리는 빛과 그들이 내는 소리 없는 소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을 게야. 그래서 이런 숲을 지나갈 때 떨리는 마음을 좀처럼 진정시키기 어려운 사람들은 귀신들의 땅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먼저 기도를 올려 그들의 허락을 구해야만 했단다. 그렇지 않으면 귀신들이 자기들의 구역에 제멋대로 들어온 사람 몸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의 두 발을 빌려 걸어 다녔거든. ---p.15
집 안은 서늘하고 어두웠어. 마치 깊이 잠들어 있는 것 같았지. 새근새근 조용히. 나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먼저 작은 거실에 난 창문들을 모조리 열었어. 신선한 공기와 함께 희미하게 기울고 있던 저녁 햇살이 작은 집 안으로 흘러 들어왔지. 그러자 갑자기 크고 멋진 집이 아니어도, 내가 부릴 하인이 없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야말로 도전해볼 만하고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고 느낀 거야. 어쨌든 이 나무집의 안주인은 바로 나였으니까. ---p.53 갈수록 많은 원숭이들이 물로 뛰어들어 강은 온통 회갈색 천지였어. 물속에서 원숭이들은 조용하고 재빨랐지. 돌연 수백 마리의 원숭이들이 한꺼번에 우리 쪽으로 헤엄치기 시작했어. 그러자 나는 천진한 그 털북숭이 동물들이 전염병처럼 느껴져 덜컥 겁이 났단다. 나는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있는 어미였어. 더구나 아이들은 누구 하나 제대로 수영할 줄 몰랐지. “그만 가요!” 나는 사공에게 소리쳤어. 사공은 전혀 두려울 게 없다는 듯 느릿느릿 엔진을 켜더구나.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리자 조타 장치에 올라타 있던 작은 생명체들이 동시에 다갈색의 물속으로 우아하게 뛰어들었지. 우리는 원숭이들이 뭍으로 헤엄쳐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봤어. 곧 원숭이들의 모습이 무성한 잎사귀들 뒤로 가려지는가 싶더니만 다시 거대한 나무의 길게 뻗은 가지마다 갈색 꽃처럼 빽빽이 붙어 있지 않겠니. 그때서야 나는 그들이 천진한 성격의 아름다운 원숭이이며, 세상에 다시없는 진귀한 구경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단다. ---p.148 중에서 |
|
열대의 초목이 무성한 스리랑카 실론 섬에서 태어난 락슈미는 엄마와 함께 보잘 것 없는 오두막에서 살아간다. 락슈미의 뽀얀 혈색에는 과거 부자로 살았던 그녀의 엄마와 한때 빅토리아 여왕에게 꽃다발을 선사했던 외할머니인 암스트롱 여사의 사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락슈미는 열네 살에 엄마와 중매쟁이의 권유로 자신보다 두 배나 나이 많은 말레이시아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그때부터 그녀의 인생에서 천둥벌거숭이처럼 맨발로 밀림을 헤집고 다니던 삶은 사라진다.
락슈미는 말레이시아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게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다. 남편은 야망이라고는 없는 일개 서기인 데다 부자이기는커녕 매달 월급날이면 집 앞으로 빚쟁이들이 찾아오는 가난뱅이였다. 그녀는 예상과 다른 현실에 좌절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최선을 다해 살아보리라고 다짐한다. 그 후 오 년 동안 락슈미는 쌍둥이인 락슘난과 모히니를 비롯해 여섯 명의 아이들을 차례로 낳아 기르면서 부지런히 일해 집안을 일으킨다. 락슈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침공하자 세 딸을 지하방에 숨겨 딸들을 지킨다. 그러나 점령기가 끝나갈 무렵 딸들 중 가장 아름다운 모히니가 일본 군에게 끌려갔다가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은 락슈미 가족 모두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가족들은 서로를 원망하며 각자의 삶에 드리워진 불행을 거둬내지 못하고 비극적인 삶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억울하게 죽은 아름다운 모히니를 쏙 빼닮은 락슘난의 딸인 딤플이 그동안 일어난 가족의 이야기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며 소중한 가족의 역사를 지키려고 하지만 딤플 또한 그녀의 앞에 놓인 불행을 보지 못하고 사고로 삶을 마감한다. 그러나 그녀의 딸이자 락슈미의 증손녀인 니샤에 의해 방대한 가족의 역사가 밝혀진다. 니샤는 가족구성원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과 가족들의 삶을 생생하게 풀어낸 이야기를 한데 모아 가족의 역사를 완성시키며, 마침내 쌀의 여신이 뿌린 유산이란 다름 아닌 '삶' 그 자체에 있음을 깨닫는다. |
|
남국의 태양 아래 펼쳐진 한 가족의 비극적 운명
그리고 ‘삶’이라는 하나의 희망 말레이시아 하면 동서양의 문화가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운 휴양지라는 평화로운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속사정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들 또한 지난 세기 동안 왕조의 몰락과 영국과 일본 등의 외세 강점기, 전쟁과 가난, 경제성장과 민족 갈등 등의 복잡한 역사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의 굴곡진 근현대사의 흐름과 겹쳐지면서 공통의 아픔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말레이시아의 근대사를 4대에 걸친 한 가족의 비극적인 가족사로 대담하게 풀어낸 장편소설 『쌀의 여신』이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영국과 말레이시아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작가 라니 마니카가 자신의 조상인 타밀족의 사연에서 영감을 얻어 쓴 작품이다.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신비로운 분위기와 현실감 넘치는 묘사가 조화롭게 표현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영연방 작가상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쌀의 여신』은 현재까지 영국을 비롯한 22개국에서 번역 출간되며 그동안 상대적으로 문학계의 주변에 머물러 있던 동남아시아의 문학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작가 또한 아룬다티 로이에 비견되는 또 한 명의 세계적인 작가의 탄생을 예고했다. 4대에 걸쳐 펼쳐진 사랑과 배신, 탐욕과 상실, 그리고 용서의 대서사시 열대의 초목이 무성한 스리랑카 실론 섬에서 태어난 락슈미는 엄마와 함께 보잘 것 없는 오두막에서 살아간다. 락슈미의 뽀얀 혈색에는 과거 부자로 살았던 그녀의 엄마와 한때 빅토리아 여왕에게 꽃다발을 선사했던 외할머니인 암스트롱 여사의 사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락슈미는 열네 살에 엄마와 중매쟁이의 권유로 자신보다 두 배나 나이 많은 말레이시아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그때부터 그녀의 인생에서 천둥벌거숭이처럼 맨발로 밀림을 헤집고 다니던 삶은 사라진다. 락슈미는 말레이시아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게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다. 남편은 야망이라고는 없는 일개 서기인 데다 부자이기는커녕 매달 월급날이면 집 앞으로 빚쟁이들이 찾아오는 가난한 남자였다. 그녀는 예상과 다른 현실에 좌절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최선을 다해 살아보리라고 다짐한다. 그 후 오 년 동안 락슈미는 쌍둥이인 락슘난과 모히니를 비롯해 여섯 명의 아이들을 차례로 낳아 기르면서, 쌀의 여신이 집안의 식량과 생명을 지켜주듯 가족 모두의 희망을 자신의 억센 손에 단단히 움켜쥐고 부지런히 집안을 일으킨다. 맹렬할 정도로 강한 모성애를 여인인 지닌 락슈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침공하자 세 딸을 지하방에 숨겨 딸들을 지킨다. 그러나 점령기가 끝나갈 무렵 딸들 중 가장 아름다운 모히니가 일본군에게 끌려갔다가 주검이 되어 돌아오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은 락슈미 가족 모두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가족들은 서로를 원망하며 각자의 삶에 드리워진 불행을 거둬내지 못하고 비극적인 삶을 이어간다. 3대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모히니를 쏙 빼닮은 락슘난의 딸 딤플의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펼쳐진다. 딤플은 자신의 빼어난 미모에 반한 중국인 사업가와 결혼하며 앞 세대의 가족들이 겪은 전쟁의 충격과 가난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의 배신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고, 딤플은 자신과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한 채 위태로운 생활을 지속한다. 그러던 중 외삼촌 세브니즈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부터 자신에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풀고, 그동안 일어난 가족의 이야기를 녹음하며 소중한 가족의 역사를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딤플은 갑작스런 사고로 삶을 마감하며 가족의 이야기는 조용히 묻히는 듯싶었지만, 딤플의 외동딸이자 락슈미의 증손녀인 니샤에 의해 가족들의 사연은 세상에 밝혀진다. 니샤는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과 가족들의 삶을 생생하게 풀어낸 이야기를 한데 모아 가족의 역사를 완성시키며, 마침내 쌀의 여신이 뿌린 유산이란 다름 아닌 ‘삶’ 그 자체에 있음을 깨닫는다. 현실과 환상을 아우르는 한 가족의 비극을 향한 거대한 이야기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쌀의 여신은 인도네시아의 신화에 등장하는 ‘곡물의 신’이자 ‘생명의 신’이다. 쌀의 여신은 각 가정의 곡물창고 안에 있는 나무 옥좌에 앉아 가족들이 생명을 이어갈 쌀을 지켜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소설의 중심인물이 여성이라는 점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쌀의 여신'이 상징하는 강인한 생명력은 소설을 관통하는 비극의 중심인 전쟁과 가난이란 상황에 대처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비참한 현실 앞에서 남성들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거나(남편), 도박이나 무속신앙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거나(큰아들, 작은아들), 비뚤어진 애정으로 상대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손녀사위) 반면 여인들은 현실에 몰입해서 억척스럽게 살아남는다. 그러나 전쟁의 기억을 지우고 가난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여인들 또한 배우자를 떠나거나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결국 자신들도 비극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한때는 향기로운 약초와 초록색 이끼, 그리고 잘 익어가는 과일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으로 풍성했던 꿈들이었는데, 이제는 죽은 호수의 밑바닥에 묻혀 숨도 쉬지 않는 창백하고 가련한 것들만 보여요.-딤플 이러한 가족의 비극은 말레이시아의 아름다운 풍경, 과거의 순수했던 시절과 대조를 이루며 더욱 강렬한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소설은 험난한 가족사의 시작점이 된 락슈미를 비롯한 열두 명의 화자가 구술 형태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데, 여러 명의 화자의 의견이 첨가되어 완성되는 형태인 구술을 통해 다각도에서 현실감 있는 모습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현실과 환상이 어우러진 부분에서는 천명관의 『고래』를, 개인적인 가족사를 현대사의 흐름과 연관시킨 부분에서는 장융의 『대륙의 딸』을 연상케 하며 거대한 이야기를 형성한다. 또한 다양한 등장인물들 각자의 불행한 사연은 각각 말레이시아의 역사적 아픔의 단면을 품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각각의 인물들을 한편으로는 단편적이고 전형적인 캐릭터로 만들거나 자칫 산만한 구성으로 보일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특유의 섬세한 묘사를 통해 신비롭고 입체감 있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렇듯 각자의 인물들이 현실감 있게 표현된 것은 아마 저자 또한 주인공인 락슈미와 같은 스리랑카 타밀족의 후손이라는 점과 스리랑카 난민문제 등 타밀족의 비극이 현재까지도 동남아시아의 민족 문제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픔을 딛고 살아낸 사람들이 그려낸 ‘삶’이라는 단 하나의 희망 락슈미 가족의 대를 이은 불행은 4대째 인물인 니샤가 가족의 이야기를 한데 모으면서 비로소 마무리된다. 가족들은 혼란한 시절 각자의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서로를 원망하고 상처 입히며 지내왔지만, 그 내면에는 가족의 희망을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던 중심인물 락슈미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은 때론 오해와 배신, 탐욕과 상실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 그들의 삶을 불행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결국 비극적인 현실에도 무너지지 않고 삶을 이어감으로써 쌀의 여신이 그들에게 선사해준 단 하나의 선물인 ‘생명의 힘’을 보여주며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쌀의 여신』은 말레이시아라는 이국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한 개인적인 가족사의 형태를 띠고 있는 소설이지만 배경과 시대를 넘어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한 인간의 보편적인 순리를 보여줌과 동시에 등장인물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과 세상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각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