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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
페미니즘이 이자혜 사건에서 말한 것과 말하지 못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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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질문

책소개

목차

편집자 노트 … 9
서문 | 고통을 대면하는 우리, 불가능한 코뮌 … 17

이진실 | 페미니즘이 해시태그를 만났을 때 … 31
담론의 귀환인가, 실재의 귀환인가 … 33
‘가해자’라는 이름의 방역선 … 38
피해자-우리 vs. 가해자-괴물 … 45
이자혜라는 극단 … 48
해시태그에 담긴 욕망들 … 54
꿰기의 작동방식을 넘어 … 60

양효실 | 이 여자들을 보라
: 애드리언 리치의 「강간」과 비르지니 데팡트의 강간 이론 … 65
여성의 경험만으로 충분한가 … 67
성폭력의 바깥은 없다: 애드리언 리치의 시 「강간」 … 71
“강간 따위는 아무것도 아냐!”: 비르지니 데팡트의 강간 이론 … 85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 96

이연숙 | 아직 제목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 101
생존과 인정 사이에서 … 103
범죄 행위로서의 [미지의 세계] … 108
[미지의 세계] 폐기 후 고려되지 않은 것들 … 114
불가능한 양자택일 … 121

박연아 | 너는 누구의 편이냐고 물으신다면 … 127
욕하고 편들기 그리고 다시, 편들고 욕하기 … 129
제대로 된 공감은 가능할까 … 132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는 말’을 찾아서 … 136
잃어버린 명예는 되찾을 수 있을까 … 140



박수연 | 나는 날선 꿈들을 팔아 불감을 마련했었다 … 143
어떤 생태보고서 … 145
글로리아 … 146
구름일대기 … 149
나는 날선 꿈들을 팔아 불감을 마련했었다 … 152
너희, 왼쪽 뺨 … 154
채분 … 155
대면, 사건, 교착 … 157

이나라 | 오해의 세계 … 163
추방당한 작가 … 165
[미지의 세계]는 왜 정치적인 예술인가 … 171
미지의 소란, 의미의 해방 … 179
작가는 ‘건강한 분열증’을 앓는다 … 18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주하는 오해의 세계 … 193

허성원 | 도덕적 폭력, 그 상큼한 쾌락의 원천 … 197
사건의 개요 … 199
이자혜라는 상징물, 구덩이로 굴러 떨어지다 … 200
쾌락의 주춧돌 쌓기 … 203
윤리적 폭력의 동기, 쾌락 … 208
페미니즘의 유산: 피해와 고통에 자기 자신을 넘기지 않기 … 215

이춘식 | 우리들의 일그러진 여왕 … 223
2016년 10월 19일 이후 … 225
부서진 구버들의 세계 … 229
메타는 없다 … 234
새로운 토템은 그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 243

이미래 | 얼굴들 … 249

부록 |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사건일지 … 275

저자 소개

저 자 소 개
양효실
미학자, 비평가. 『불구의 삶, 사랑의 말』과 『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를 썼다. 이자혜는 일반적으로 가해자 남성과 피해자 여성으로 이분화되는 성폭력 문제에서 기이하게도 제3항third term이다. 여성 부역자 혹은 여성 가해자라는 기이한 자리는 성폭력 문제를 사유하는 데 복잡하고 모호하고 그렇기에 생생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녀가 처한 상황이,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가 이 책의 출발점이고 이 책이 떠돌 장소이다.

박수연
시도 때도 없이 “그럼 그 일들도 말해야 할까?”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는 불현듯, 그것이 불쾌할 정도로 전형적인 거리낌이라고 생각한다. 입을 다물고 있기에는 그러라고 했던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것 같아서 진절머리가 난다. 말한다 치자. 그럼 나를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나는 이런 고민을 하는 여러 사람 중 하나이고 시시하게 살고 있으며 내일도 다행히 시시하게 살 것이다.

박연아
자는 시간을 빼면 늘 SNS에 접속해 있다. 인터넷 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이야기는 하지 않는지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늘 한 문단 이상 생각을 진행시킬 수가 없다. SNS 시대에 어울리는 미덕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이나라
이미지 문화 연구자. 영화와 미학에 대한 글을 쓰고, 책을 옮기며, 여러 대학에서 강의한다. 모든 작품은 우리를 가상(또는 환상)의 세계 안으로 이끌며 우리에게 윤리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나는 [미지의 세계]를 폐기하는 일이 사태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우리의 윤리적 비겁과 지적 나태함을 시인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이미래
미술대학에서 조각과 미디어를 전공하고 입체 매체 위주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4년 개인전 ‘낭만쟁취’(인사미술공간, 서울)에서 이자혜 작가와 협업, 만화책 『금덤판』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이자혜 작가를 알게 된 시점부터 2년간의 시간을 일기 형식의 글로 담았다.

이연숙
리타. 팟캐스트 [퀴어방송] 진행자. 페미니즘/퀴어/시각문화 관련 글을 쓴다. 나는 아직도 누군가가 이 글을 읽는다는 것이 두렵다. 아마도 A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다. 이자혜도 좀 걱정된다.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내 인생도 걱정된다.

이진실
서울대 미학과에서 독일현대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보편이라고 생각한 삶의 모습들이 이데올로기적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이를 먹어 가며 배웠다. 이에 비껴 서는 친구들의 삶이 뒤늦게 페미니즘에 눈뜨게 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과 책으로 배우는 이론의 간극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며, 거듭 썼다 지우는 소심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이춘식
도로. 사건 이전까지는 ‘페미’였던 것 같다. 이후에는 모르겠다.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믿음에 반대합니다. 착한 사람이 되려다 보니 나쁜 말만 하게 되었다.

허성원
퀴어이론에 관심을 두고 한국 성소수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역동을 공부하고 있다. 말과 글을 믿지 못하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절박하게 써내고 말할 것이 있다고 믿는다. 이 글이 떨쳐 내지 못한 미숙함도 누군가에게는 소용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이 글을 마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나의 미숙함을 일깨워 주었던 우정 어린 얼굴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7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438g | 130*205*20mm
ISBN13
9788965641988

책 속으로

트위터상에서 벌어진 이자혜에 대한 비난이 언론보도까지 가세해 증폭된 것은 그동안 그들이 그렸던 범죄자의 이미지와 메갈리아를 옹호하고 트위터에서 패드립을 치는 작가가 그로테스크하게 들어맞았던 탓이다. 내가 보기에 이 신속한 여론 재판을 이끈 가장 주된 동력은 이자혜라는 ‘되바라진’ 작가와 미지라는 비윤리적 화신의 동일시였다. 만화 속 허구의 캐릭터를 단번에 작가의 민낯으로 단정지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분명 범주의 오류지만, 그녀를 범죄자 취급하기 이전에 따져 보아야 할 범주 따위는 쓰나미 같은 격류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 p.52~53

우리는 법도 폭력이라는 깨달음 뒤에, 재현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역사적 외상을 겪은 이들이 재현을 시도할 때마다 겪는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 읽고 배워야 한다. 또한 여성의 말하기가 거짓말이나 미친 말임을, 법이 요구하는 진실에 영원히 도착할 수 없는 말임을 폭로하는 사법적 정의나 진실의 폭력성을 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의 말하기가 갖는 힘, ‘가치’를 보존할 다른 장소를 발굴해야 한다. 물론 그곳은 대체로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자리는 늘 있어 왔다. 거짓말하는 여자, 믿을 수 없는 여자들을 위반적인 여성으로 재배치하는 실천은 남성지배의 문화 아래에서 암류로 계속 흘러 왔고 지금도 흐르고 있다.
--- p.84~85

나의 전제는 창작자가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도덕적으로 고결하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다소 위험하게 들릴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내가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창작자가 이런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창작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그러한 인간에게서 창작된 작품 자체가 어떤 이유로도 폐기되지 않을 권리다. 아마도 이자혜는 타인의 고통을 착취했고, 그런 방식으로 작품을 창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지의 세계?가 범죄 사실의 기록이나 범죄 행위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 p.113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는 말이 어떻게 있을 수 있지? 그런 말이 있다면 정치적으로 올바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걸 이상하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는 말이야말로 빨리 불편한 점을 발견해야 할 말이지 않을까?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을 할 작정이라면 확실하게 말하면 안 된다. 언제든 수정할 수 있을 만한 여지를 두어야 한다. 나는 트위터에서 쏟아지는 이야기를 보며 내 안에서 쉽게 미지를 버렸다. 사람들이 “이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습니다!”라고 외칠 때를 대비해 남겨 둔 공간을 이용해서 미지를 내 안에서 쉽게 버렸다.
--- p.137쪽, 너는 누구의 편이냐고 물으신다면

?미지의 세계?는 가장 능동적인 ‘작화作話’의 방식으로 삶과 예술 사이의 거리를 폐기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삶과 예술 사이의 거리가 폐기되고 있음을 인지하게 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삶과 예술 사이의 거리를 소거하는 ?미지의 세계?는 가장 동시대적인 예술적 실천이고 동시에 가장 정치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미지의 세계?는 무엇보다 뛰어난 방식으로 ‘말과 침묵의 정돈된 분할’을 문제 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화 자체가 이자혜가 살고 있는 세계에 분란과 불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미지는 이자혜를 훼손함으로써 모방한다. 혹은 이자혜는 자신을 훼손함으로써 미지를 구성한다.
--- p.170

이자혜의 빠른 퇴출은 그녀가 별 권력 없는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만큼이나 그녀를 소비해 온 이들이 윤리적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내러티브라는 도구를 다시 불러오자면 이런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이자혜와 B에게 고통을 가하는 이들에게 “당신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자. 대답은 이럴 것이다. “저희는 지금 윤리를 실천하고 있어요.” 그들은 윤리적 행위라는 내러티브 속에서 행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진술 역시 그들에게 있어서는 ‘진실’이다. 그러나 내러티브의 주요 구성 요건인 사실 인식과 해결책이 정작 윤리와 크게 맞닿아 있지 않다는 ‘또 다른 진실’은 외면한다. 그리고 그들은 윤리적 실천이라는 내러티브, 그 달콤한 진실 속에서 일방적으로 타인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쾌감을 얻는다.
--- p.214~215

왜 사람들은 이자혜를 페미니즘의 이름 아래에서만 소비했는가? 어떻게 그들은 그녀의 모든 것을 페미니즘적이라고 부르며 소비하다가, 사실은 페미니즘이 아니라며 배신감을 느끼고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했는가? 그것은 그들이 오로지 이자혜라는 ‘굿즈’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미지의 세계?는 페미니스트 이자혜의 굿즈로 소비되었으며, 그녀의 트윗들과 같은 등급으로 소비되었다. 둘의 차이는 없었다. 그들은 ‘페미니스트’ 이자혜가 만든 것들에서는 페미니즘을 보았다. 그녀의 신분이 바뀌자, ‘가해자’ 이자혜가 만든 것들에서는 가해를 찾았을 뿐이다.

--- p.243

출판사 리뷰


너무나 빨리 폭발하고 잊힌
이자혜라는 사건

2016년 10월 18일 웹툰 작가 이자혜가 10대 여성에 대한 성폭행을 사주하고 방조했다는 주장이 SNS를 통해 제기되었다. #OO_내_성폭력 해시태그가 폭발적으로 퍼져 나갈 때다. 이자혜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한때 ‘어둠의 이자혜’라 불렸던 웹툰 작가는 ‘성폭행 가해자’로 확정되었다. 그녀의 작품을 연재하던 웹툰 플랫폼과 출판사는 각각 연재 중단과 절판으로 대응했다. 이자혜는 입장 표명과 사과를 거듭하다 다시 새로운 입장을 발표했지만, 싸늘해진 여론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이자혜 작가의 웹툰 ?미지의 세계?를 보는 것만으로도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된다는 주장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 모든 일이 트위터상에 공론화된 지 며칠 만에 벌어졌다. 그리고 이자혜는 가해자가 된 채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배제와 처벌이 너무나 신속하게 이뤄진 나머지, “이자혜의 웹툰이 실제 사실을 그대로 보여 준다”거나 “그러니 웹툰을 보는 것만으로도 2차 가해다”와 같은 논쟁적인 주장들 역시 너무나 쉽게 공인되었다. 정치적 올바름과 도덕적 보수주의를 둘러싼 오랜 논란도 이런 주장들 앞에서는 고개를 내밀지 못한 채 결론만이 부각되었다. 이런 식으로 ‘정답’을 도출하고 그에 따르는 것으로 충분한가. 혹시 우리가 그 과정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가. 페미니즘이 늘 고민과 성찰을, 불화와 긴장을 끌어안는 사유라고 할 때 과연 이와 같은 ‘속도의 페미니즘(김주희, 「속도의 페미니즘과 관성의 정치」, 《문학과 사회 하이픈》 2016년 겨울호)’을 승인하는 것으로 충분한 걸까.
미학자이자 비평가인 양효실, 미디어 문화 연구자 이나라, 퀴어/시각문화 칼럼니스트 이연숙 등 아홉 필자들은 ‘이자혜라는 사건’을 두고 저마다 이야기를 풀었다. 여기서 해시태그 운동의 한가운데 있던 이자혜를 다시금 언급하려는 것은 그녀를 일방적으로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 사건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우리 눈앞을 스쳐 갔기에 이제는 다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 채 그저 잊혔을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필자들은 이 책을 통해 이자혜를 가해자라고 호명하고 그녀의 작품을 가해자의 폭력 재현으로 단정 지었을 때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성찰하려 한다.


피해자 대 가해자라는
‘정답’을 다시 생각하는 질문들

우선 연구자 이진실은 「페미니즘이 해시태그를 만났을 때」에서 해시태그를 타고 봇물 터지듯 쏟아진 폭로가 2차 피해로부터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했는지를 되묻는다. “성적자기결정권이 작동하지 못한 폭력사태에서 이 자기결정에 대한 무수한 스펙트럼을 괄호 치는 단순화된 프레임은 다시 피해자의 자학(58~59쪽)”을 낳기 때문이다. 특히 해시태그 운동이 생물학적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에 매몰된 채 저항의 사유인 페미니즘을 또 다른 억압의 정치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던진다. 필자는 문화계 곳곳에서 여성들이 스스로 연대하기 시작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피해자-우리 대 가해자-괴물이라는 적대의 선이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미학자 양효실은 「이 여자들을 보라: 애드리언 리치의 「강간」과 비르지니 데팡트의 강간 이론」을 통해 아무리 성폭력을 고발하려 해도 그런 고발이 도리어 가부장제를 보충하고 강화한다고 지적한다. “여성의 몸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도, 여성의 몸에 각인된 경험이 전제하는 죄의식이나 수치심도 모두 가부장제의 권력을 방증하는 남성적 시선에 근거한다(70쪽).” 이를 넘어서는 힘은 강간 그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하는 주체의 결단에 있다. 이때 비르지니 데팡트의 강간 이론은 “강간을 지금과 같은 조건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재해로 간주하라고 설득(90쪽)”하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강간 경험과 피해자 서사에 함몰되지 말고 이에 쾌락주의적 가벼움으로 맞서라는 도발적인 주장에 놀랄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미디어 문화 연구자 이나라는 「오해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또 다른 독해를 시도한다. ?미지의 세계?는 기존에 드러나지 못했던 비루한 존재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 만화는 “작가가 정치적 매니페스토, 특히 페미니스트적 매니페스토를 적어 올렸거나, 페미니즘의 대의를 위해 투쟁에 동참했기 때문에 정치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여러 시간과 공간의 경험을 재편하고 쓰기(그리기)의 방식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 들리지 않았던 것을 보이도록 하고 들리도록 하였기 때문에(173~174쪽)” 정치적이다. [미지의 세계]는 쉽게 해석할 수 없기에 늘 ‘오해의 세계’에 놓여 있다. 필자는 그런 오해를 피해나 가해와 같이 손쉬운 정답으로 대체하려 할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한편 퀴어 연구자 허성원은 「도덕적 폭력, 그 상큼한 쾌락의 원천」에서 대중이 이자혜를 지지했던 것과 비판했던 것 모두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음을 지적한다. 즉 여성학자 김주희가 지적했듯이 “페미니즘적으로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208쪽)”에 사람들은 신속하게 이자혜를 지지했다가 지지를 철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윤리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이 깔려 있으며,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필자는 이 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주의가 모든 것을 피해의 문제로 돌리기 위해 동원된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이어서 이춘식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여왕」을 통해 대중이 페미니스트 이자혜를 일종의 굿즈로 소비했다고 비판한다. 특히 이자혜의 자리에 피해자를 채워 넣은 것은 그들을 자신들이 의지할 수 있는 일종의 토템으로 만드는 게 아니었는지 되묻는다. 필자는 “결국 피해자들은 우리의 고정된 어휘가 되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피해자에 맞추어 자신을 채우고 자르게 된 것(246쪽)”이라고 지적하면서, 피해자의 자리에 머무는 것만이 연대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욕하고 편들거나 편들고 욕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 윤리를 찾아서

이렇게 분석적인 글과 함께, 사태 앞에서 망설이고 고민하며 쓰인 글들도 있다. 퀴어/시각문화 칼럼니스트 이연숙은 「아직 제목을 정하지 못했습니다」에서 설령 이자혜 작가가 정말로 ‘가해자’라 하더라도 ?미지의 세계?를 범죄 사실의 기록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창작자가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도덕적으로 고결하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아닐 수 있다(113쪽)”고 해도, “뭔가를 창작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그러한 인간에게서 창작된 작품 자체가 어떤 이유로도 폐기되지 않을 권리(113쪽)”는 보장되어야 한다. 피해자의 발언이 사실임을 강조하면서 ‘범죄 사실의 기록’이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더욱더 문제다. 그럼으로써 피해자의 말이 사실이어야 함을 강조하게 되고, 혹시나 피해자의 위치를 법적으로 증명하지 못할 때에는 당사자의 삶 전체가 의심받고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피해자를 위한 연대라는 이름으로 여자-가해자를 재빨리 삭제하는 것이 자신이 도덕적인 소비자라는 위안에 그친다는 데 있다. 이때 필자는 사건을 둘러싼 도덕적 강박을 비판하고 작품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도, 이자혜의 대척점에 서 있는 ‘피해자’를 향한 연민을 거두지 못한다.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선택하지 못하는 괴로움은 박연아의 「너는 누구의 편이냐고 물으신다면」에서도 나타난다. “‘가해자’를 알아버려서는 객관적일 수 없다고 생각(132쪽)”했던 필자는 피해자의 말과 가해자의 말 사이에서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는 말’을 찾아본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는 말’이야말로 빨리 불편한 점을 발견해 내야 한다는 것을 간파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과연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제대로 된 공감이 가능한 것인지 끊임없이 회의한다.
여기에 이자혜 사건을 자신만의 문법을 통해 대면한 글들도 함께 실었다. 박수연은 「나는 날선 꿈들을 팔아 불감을 마련했었다」를 비롯한 여섯 편의 시를 통해 피해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한다. 그럼으로써 필자는 이자혜 사건과 마주해 보려고 시도한다. 이때 그녀가 대면하는 것은 다시금 자신의 기억이며 재현할 수 없는 고통이다. 마지막으로 미술가 이미래는 「얼굴들」에서 이자혜를 안 뒤 2년 동안 있었던 일을 일기 형식으로 풀었다. 그녀의 이야기 안에서 이자혜를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고민과 고통을 얼굴에 드러낸다. 이 얼굴들을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분법적 구도 안으로 밀어 넣는 순간, 그 얼굴들이 드러내는 정동은 밋밋해지고 흐려질 것이다.


분쟁과 이견의 장소인
페미니즘을 다시 사유하기 위하여

이 책은 2016년 10월부터 2017년 5월까지 십여 회가 훨씬 넘게 진행되었던 한 모임에서 비롯되었다. 이야기를 풀어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의 자리가 피해자의 곁이라고 하면서 불참한 사람도, 글을 쓰기로 한 뒤에도 고민을 거듭하다 끝내 쓰기를 포기한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조심스러웠고 고민이 많았다. 혹시라도 피해자에게 고통을 덧붙이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논의들에 감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모임에 함께했던 사람들은 편을 가르는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자신들 또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여느 사람들과 동일한 압박을 받고 있음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야기를 쓰고 이를 묶은 것은, 지금 여기의 가장 첨예한 주제인 페미니즘을 다시 한번 논의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필자들의 절실함 때문이다. 피해자냐 가해자냐 하는 물음, 너는 누구의 편이냐는 물음이 감추고 잊히게 만든 질문들이 너무나 많다. 무엇이 페미니즘적인 실천인지, 누군가 피해 경험을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토론할 새도 없이 ‘속도의 페미니즘’ 속에서 정답만이 강요되고 있다. 페미니즘이 다양하고 풍부한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며 분쟁과 이견의 장소라고 했을 때, 우리에게는 더욱 활발한 토론과 논쟁이 필요하다.
물론 피해자와 가해자는 엄연히 존재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직면하는 것이 힘겨울 뿐만 아니라, 가해자들의 보복과 2차 피해가 빈번하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명확한 선을 그은 뒤, 그 선에 맞지 않는 것들은 잘라 내고 부합하는 것들은 붙여 넣고 있는 데 머물러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페미니즘을 다시 사유하고 활발한 토론이 펼쳐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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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파렴치한 2차 가해자의 구차한 변명
    어느 파렴치한 2차 가해자의 구차한 변명
    2017.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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