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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제1장 근초고왕의 시대 1. 근초고왕 이전의 한반도 남부 상황 근초고왕이 활약했던 격변의 4세기 그리고 기록의 혼란 / 분쟁의 핵, 신라와 왜(倭) / 왜가 어떻게 신라의 도성을 위협했을까? / 왜에 대한 신라의 입장 / 왜를 괄시했던 신라 2. 근초고왕의 업적 드라마가 왜곡한 근초고왕의 캐릭터 / 근초고왕 때의 국제관계 / 근초고왕이 직면했던 과제 / 주인공이 누구인가? / 사려 깊은 전략, 신중한 실행 / 4세기 중반 한반도 남부 정세와 구저의 임무 / 정복을 평화적으로 / 힘보다 이권조정을 통하여 / 전쟁을 막기 위한 무력시위 / 고구려의 견제 / 허당 고구려? / 남방 정복 사업의 마무리 / 임나는 백제가 관리했다 / 임나와 목씨(木氏) 가문 / 왜에 대한 배려의 산물, 일본부 3. 근초고왕 이후의 국제정세 지각변동의 도화선, 신라 / 동맹체제의 충돌 / 말려든 임나가라 / 고구려의 개입 그리고 임나가라 정벌 제2장 성왕의 시대 1. 성왕 이전의 국제관계 고구려·신라 동맹의 균열 / 또 다른 축의 변화, 신라와 왜 / 백제의 개입과 파란 / 나제동맹(羅濟同盟) 그리고 국제관계의 반전 / 왜의 배신감 / 힘 없는 자의 반항 / 각자 이익을 찾아 이합집산 / 왜(倭), 제 갈 길을 찾아 / 의미 없는 칭호, 실익 없는 외교 / 가야의 재기 / 가야의 좌절 / 가야의 대안은 신라 2. 성왕 등장 이후의 국제관계 아라가야의 저항 시도 / 반백제 외교전선의 강화와 좌절 / 가야세력의 이탈 / 금관가야의 신라 투항과 반작용 / 3. 맹주의 지위를 되찾기 위한 ‘임나재건’ ‘임나재건’의 속뜻 / 백제에 대한 저항의 강화 / 임나재건을 사이에 둔 줄다리기 / 성왕의 뚝심과 한계 / 최후의 저항 4. 성왕의 죽음, 기세 꺾인 백제 파란의 도화선 한강 / 신라의 배신 / 고구려가 먼저다 / 관산성 전투의 개시 / 성왕의 전사과정에 대한 의문 / 관산성 함락과 전황 / 신라군 부대의 매복 / 리더의 빈자리 / 타격은 크지 않았다 / 관산성 전투의 후유증 맺으면서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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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은 바로 이러한 정세 속에서 등장했다. 이 상황에서 근초고왕이 해내야 할 첫 번째 과업은 일단 고구려의 위협을 막으며 백제의 기반을 다져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위협을 극복해야 한다는 과업은 외부요인 덕분에 일단 쉽게 해결되었다.
근초고왕의 재위기간에 즈음하여, 고구려는 연나라 모용씨와의 분쟁에 시달려야 했다. 수도까지 함락 당하는 등 수세에 몰리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별로 없었다. 백제는 이 덕분에 상당 기간 고구려의 예봉(銳鋒)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근초고왕은 이런 상황 속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당장 상황이 좋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속에 편안하게 안주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국가를 경영하는 지도자까지 이런 경향이 휩쓸리면 뒤끝이 좋지 않다.---p.41 백제가 근초고왕 때에 남쪽으로 눈을 돌린 이유는 고구려가 연에 타격을 받은 사이 한반도 남부의 정세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짜놓으려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임나를 만들어야 했던 필요성도 결국 이 연장선상에서 나오게 된다. 즉 근초고왕 때 백제가 남쪽에 눈길을 돌린 근본적인 이유는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 열도에 걸쳐 있던 나라들을 백제의 정책에 협조하도록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들을 하나의 조직에 묶어놓아야 할 필요가 생겼고, 그 필요에 따라 10여 개 국으로 갈라진 가야의 소국을 묶는 조직이 임나였다.---p.85 성왕이 등장하기 이전 국제관계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일시적으로 고구려-신라와 백제-가야-왜를 잇는 두 동맹이 형성되어 충돌한 이후, 점차 신라와 가야까지 고구려에 대항하는 방향으로 뭉쳐 나아갔다. 그러다가 5세기 후반부터 백제가 그동안 우호적으로 지내던 가야와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백제의 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개로왕 때 고구려에 타격을 받았던 백제는 일단 그 타격을 수습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그 때문에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하여 다른 세력들과 협력 관계를 만들어 나아가는 것이 국가정책의 기본 구도라고 할 수 있었다.---p.156 성왕은 광개토왕의 임나가라 정벌 때 받은 타격 때문에 이런 체제를 가질 수 없었다. 백제 요원이 현지에서 임나의 요인들을 통제·감독할 수단이 없어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임나의 대표자들을 백제의 수도 사비로 소집하여 성왕이 이들을 상대로 직접 현안을 논의하는 형태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근초고왕 때와는 달리, 자발적으로 협조해주지도 않는 임나의 대표자들을 자기나라 근처도 아닌 사비까지 소집하는 데에는 당연히 무리가 따른다. ‘임나재건’을 위해 임나한기들을 소집하는 과정에서 자국의 사소한 사정을 내세워 소집에 응하지 않는 수법도 임나 측이 이런 점을 이용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p.182 관산성 지역에 도착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밤중에 지나가던 성왕을 급습·생포해버린 부대가 바로 이 고간도도의 부대였다. 이 공로를 김무력도 같이 누렸던 걸로 보아 고간도도의 부대가 김무력 부대의 일부였던 건 분명하다. 어쨌든 막강한 백제군이 혁혁한 전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성왕은 어이없게도 신라군의 소규모 부대에 생포되어버린 것이다. 국가의 운명을 달리한 전쟁에서 이토록 허무한 역전극이 연출된 원인은 성왕이 갑작스럽게 관산성 지역으로 왔기 때문이다. ---p.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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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인 백제사 연구의 흐름 속에서 온전히 접할 수 없었던 근초고왕 그리고 성왕의 진실을 살피다
백제의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구체적인 업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백제의 대표적인 왕인 13대 근초고왕과 26대 성왕. 백제 중흥기를 이끌어갔던 지도자들이었지만 그 진면목은 알 수 없어 궁금증만 자아냈던 왕들이다. 이런 궁금증 속에 드라마 ‘근초고왕’이 방영되자 많은 사람들이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많은 사극이 방영되었지만 백제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은 많지 않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서동’ 같은 전설 속 인물에 가까운 이야기였을 뿐 실제 백제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왕의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런 기대에 반해 드라마에 등장한 ‘근초고왕’은 실제 역사와는 많이 달랐고, 이에 백제 역사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실제 근초고왕은 백제 전성기에서 어떤 역할을 했으며, 후대에까지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더불어 백제 중흥기의 중심에 있었다는 성왕 역시 실제 업적은 어떠했을까? 이 책에서는 여태껏 이름은 흔히 알려져 있지만 실제 어떤 업적을 남긴 왕인지 알 수 없었던 백제의 근초고왕, 성왕의 역사를 자세히 풀어냈다. 패자의 나라이자 역사인 백제 그리고 백제의 왕들 그 이야기를 이제는 온전히 들어볼 때다 우선 근초고왕이 전성기를 구가했던 왕으로 평가받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그가 활약했던 4세기경 국제관계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근초고왕이 활약했던 4세기는 한국이나 일본 양국의 고대사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한국고대사에 있어서 3세기 이전은 고구려·백제·신라 같은 나라들이 내적인 기반을 다져 나아가는 시기였다. 따라서 각 나라마다 자체 세력권의 정비가 우선이었고, 다른 세력과의 관계도 크게 복잡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4세기 이후가 되면 주변의 국제관계가 복잡해진다. 사료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 주변 국가들과의 정황들을 따라가보면 근초고왕의 역할과 그 업적을 알 수 있다. 4세기 동아시아에서 고구려는 북방의 강자로 성장했다. 한반도 남부에서는 백제가 고구려에 버금가는 강자로서의 위치를 확보해 나아가고 있었다. 한편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서는 가야를 억누르며 신라가 성장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바다 건너에는 신라와 분쟁을 벌이며 고대국가체제를 갖추려 안간힘을 쓰던 왜가 있었다. 이들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나라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국가체제를 갖추는 과정에서 주변의 군소국가들을 마구 정복해 나아갔다. 근초고왕은 바로 이러한 정세 속에서 등장했다. 이 상황에서 근초고왕이 해내야 할 첫 번째 과업은 우선 고구려의 위협을 막으며 백제의 기반을 다져 나아가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근초고왕이 주목한 곳은 남방이었다. 남쪽의 신라, 가야, 만한 등의 세력을 정리하는 것.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이들을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두는 것이 근초고왕 전략의 핵심이었다. 이를 위해 근초고왕은 백제 요원들을 파견해 사전 조사를 하고, 가야를 장악하기 위해 ‘임나’라는 연맹체를 만들어 관리하는 등 치밀한 전략을 펼쳤다. 그 과정 중에 일본부를 임나에 포함시키면서 신라와는 동맹관계를 맺는 등 일본과 신라와의 관계에서도 복잡한 정세를 잘 이용해 백제의 위치를 견고하게 만드는 토대를 마련했다. 근초고왕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면 백제와 고구려가 양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국제 정세에서 백제를 한 축의 중심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렇지만 후에 백제는 광개토왕의 임나가라 정벌로 고구려-백제 세력의 충돌에 신라, 가야, 왜 등 주변세력들 전부를 말려들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백제-가야-왜의 동맹체제가 붕괴되는 분기점이 되었다. 지도자다운 전략가의 면모를 보인 근초고왕 동아시아 남부의 맹주 자리를 원했던 성왕의 살아있는 역사 속으로! 성왕이 등장하던 시기는 당시 백제가 잃어버린 국제사회의 맹주자리를 다시 찾으려 한 시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첫 번째 목표가 이전에 백제의 세력권 아래에 있었던 가야였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가야를 다시 세력권 안으로 흡수하려는 백제와 이에 저항하는 가야 사이에서 분쟁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가야와 왜, 신라 사이에서 복잡한 이해관계의 분쟁도 일어났으며, 금관가야, 탁기탄, 탁순 등의 나라들이 신라에 투항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갔다. 이에 백제는 일단 임나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지만 극단적인 반발이 나올 수 있었고, 임나와의 관계가 계속 이런 식으로 지속된다면 백제에게 유리할 것이 없었다. 이때 성왕이 내놓은 수습책이 바로 ‘임나재건’책이다. 임나를 강력하게 재편하자는 것이었지만 그 속내는 백제가 남부의 맹주 자리를 되찾기 위한 방편의 일환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임나재건을 위한 회유가 통하지 않자 압력을 강화시킬 수밖에 없었고, 결국 임나는 주변국가들과의 복잡한 정세 속에서 백제의 부용세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후 성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어이없게도 신라의 고간도도의 부대에 생포되어 죽음을 당한다. 관산성 전투의 패전 이후, 백제는 여러 후유증을 앓으며 왕권이 약화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