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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쳐간 순간이 역사가 되고
서른, 세상을 뒤집다 서른에 꿈꾸었던 나라 태평의 잠을 깨운 구로후네(黑船) 우라가(浦賀)와 강화도 사무라이와 선비의 전쟁관 고개는 숙여도 기싸움은 밀리지 않아 ‘무뎃포(無鐵砲)’의 무모함을 자각하다 페리가 일본으로 먼저 간 까닭은 미국을 먼저 만난 행운 외국선을 쫓으면서도 내공을 축적하다 『해국도지海國圖志』가 일으킨 파장 사무라이와 선비, 세상을 보는 다른 눈 데지마, 해외로 열린 일본의 창 효용가치가 떨어진 조선통신사 페리 내항의 정보도 미리 입수 까맣게 모르고 있다 당한 조선 2. 천황을 부활시킨 요시다 쇼인 다이로 아베 마사히로의 결단 요시다 쇼인, 구로후네 현장에 서다 천하의 스승, 사쿠마 쇼잔을 만나다 주유천하 끝에 만난 구로후네 생각보다 일찍 온 페리의 재 내항 개항시기만큼 벌어진 한일 근대화의 격차 요시다 쇼인, 마침내 밀항 기도 군국주의 맹아萌芽를 키운 운명의 회항回航 쇼인 사상의 중독성 무덤에서 불러낸 구스노키 마사시게 맹자에 빠지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몰려든 제자들 천출에서 총리로 비상한 두 사나이 멀리 듣고 높이 보라 요시다 쇼인, 반역을 모의하다 무사시의 들판에 뿌려진 원념怨念 3. 회천回天의 기수, 다카스키 신사쿠 뜻을 세우면 목숨을 걸라 전통 무사의 혈통을 잇다 검호劍豪 가쓰라 고고로 쇼카손주쿠 입문과 에도 유학 이이 나오스케 암살과 정국의 반전 가쓰 가이슈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등장 상하이 견학과 근대화의 자각 사쓰마번의 웅기 내부의 적을 더 두려워했던 막부 위기를 절호의 기회로 죠슈의 어순조御楯組와 사쓰마의 정충조精忠組 10년 은거에 들어가다 화살 세 개의 교훈 마침내 시작된 양이전쟁 초망굴기草莽?起 두 천민 재상이 꽃피운 쇼인의 유훈 4. 막부를 치다 죠슈 파이브, 영국으로 가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의 각별한 인연 8·18 정변과 죠슈의 몰락 변란은 끝이 없고 사이고 다카모리의 등장 시모노세키전쟁과 신사쿠의 활약 죠슈의 항복과 기병대 해산 위기 대세를 역류할 것인가, 순응할 것인가 이토 히로부미의 결단 잇쇼켄메이一所懸命 뒤늦게 합류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고고로의 귀환 국민개병제의 도입 도사土佐의 두 낭인, 료마와 신타로 사이고 다카모리, 죠슈를 품다 사카모토 료마의 기발한 제안 삿쵸동맹의 결성 전투는 사람이 하는 것 1천 결사대에 무너진 막부의 2만 대군 꽃잎 아래 봄에 지다 5. 요시다 쇼인의 긴 그림자 개항기 일본에 주어진 행운 고종과 메이지의 엇갈린 운명 상투와 ‘?마게’ 스스로 물러난 쇼군 막부군의 마지막 저항 정한론을 뒤엎은 이토 히로부미 유신의 주역들은 가고 조선 병탄에 나선 죠슈 파벌 시골 사무라이에 당한 조선 죠슈군벌이 주도한 한일강제합병 유태계 자본이 도와준 러일전쟁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합병에 대한 생각 서른 한 살, 안중근의 절묘한 선택 6. 오늘도 소나무는 자란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일본이라는 나라 조선을 삼켰으나 소화하지 못한 일본 ‘바카야로(ばかやろ)’에 숨겨진 이면 초혼사와 야스쿠니신사 가이텐의 종말 한국, 갸쿠텐의 시작 조선 민중의 좌절과 극복 의도적인 망각 뒤에 가려진 역사의 진실 사야가와 김환의 경우 채향정에 서린 제국의 잔영 소나무는 다시 자란다 ※ 주요 등장인물 약전 ※ 참고문헌 ※ 고종과 메이지시대 연표 |
李鑛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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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 책의 저자입니다.
2011-04-27
한,중,일 3개국 중에서 나라가 망해 식민지로 전락했던 경우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5천년 역사상 처음 겪은 치욕이었던 경술국치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는 조선이 왜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일본은 그 300년전만 하더라도 조선통신사를 초청하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해야 했을 정도로 문화적 후진국이었습니다. 그러나 1811년 마지막으로 받아들였던 조선통신사는 본토에 초청하지도 않고 대마도에서 돌려보냈고, 그로부터 99년만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그 99년 동안에 일본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조선 내부의 모순이 망국의 단초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하지는 않습니다. 내부적인 갈등과 혼란의 과정을 거쳐 스스로 모순을 극복하고 독립을 유지한 경우도 많습니다. 조선이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한 것은 일본이라는 나쁜 이웃을 두었기 때문이지만, 일본의 그런 속성은 왜구가 출몰하기 시작했던 삼국시대부터 익히 알던 것입니다. 경술국치 400여년 전에는 일본에 전 국토가 유린되는 대전란(임진왜란)까지 겪었습니다. 조선은 일본의 동향을 한시도 놓치지 않고 살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 망국의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뒤늦은 자각이지만, 그 시대로 돌아가 그때 일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메이지유신 주역들의 발자취를 추적하여 큐슈, 야마구치 일대 3천리 길을 두 번 돌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역사책에서 배우지 못했던 충격적인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한일합병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야마구치현 하기시의 시골 학숙에서 동문수학한 문도들이었고, 그들을 그렇게 키운 이데올로그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받은 충격은 아직도 가슴이 떨리게 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교훈을 망각했던 결과로 당했던 경술국치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라도 여러 독자들과 그 체험을 공유하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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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일본이 개국 과정에서 보여준 극명하게 대조적인 대응 방식의 이면에는 지정학적 요인 외에도 선비와 사무라이라는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지배층의 구성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새로운 문명의 내습에 직면하여 개국을 전투적 관점에서 보느냐, 명분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대응 방식도 극과 극으로 갈렸던 것이다. 무력으로 개국을 거부할 수 없다면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 후일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 일본이었고, 금수문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전투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문을 닫아걸었던 것이 조선이었다.--- p. 37
하멜이 조선에 표류해온 시기는 네덜란드가 데지마상관을 통해 일본과 독점무역을 개시한지 불과 12년 뒤의 일이었다. 만약 이때 조선 조정이 하멜 일행의 가치를 깨닫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대외무역에 나섰더라면, 조선의 근대사는 획기적으로 달라졌을 것이나 조선은 이 굴러온 복덩어리를 걷어차 버렸다. 당시는 효종의 북벌정책이 추진되던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중요한 신 군사기술의 습득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하멜표류기가 계기가 되어 조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네덜란드는 조선과의 교역을 추진하기 위한 1 천 톤급의 무역선 ‘코레아호’를 건조하기까지 했지만, 서구와의 대외무역을 독점하려는 일본 막부의 방해로 ‘코레아호’는 결국 조선으로 항해하지 못했다. 조선 조정은 이 같은 움직임조차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데지마에 복원돼 있는 당시 데지마의 무역선과 하멜상선의 모양은 복사판처럼 똑같다. 똑같이 주어진 상황에서 조선이 얼마나 귀중한 기회를 날려 버렸는지 이 상선의 모형이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다.--- p. 65 주목할 점은 일본이 수교를 위한 화친조약을 선행하고 3∼4년의 시간이 흐른 뒤 통상(무역)조약을 체결한데 비해, 조선은 수교와 통상조약을 동시에 체결했다는 사실이다. 일찍 문을 연 일본은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단계적으로 시장을 열면서 시행착오를 교정해 나갔지만, 출발이 늦었던 조선은 그와 같은 시행착오를 교정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조선과 일본의 개국(수교)시점 자체도 22년의 격차가 있지만, 서구열강을 대상으로 한 실질적인 개항(통상)을 따지면 그 격차는 24년으로 벌어진다. 이 기간에 일본은 근대화를 위한 국체변경(왕정복고)과 국가제도의 개혁(내각제 도입 및 헌법 제정)을 거의 마무리했고, 조선은 이 24년간의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본에 합병됐다.--- p. 91 훗날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들이밀었던 조선 병탄의 주역 이토 히로부미가, 그 30여 년 전에는 정한론을 무산시킨 막후 주역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 30년의 기간에 정한론의 시나리오는 숙성과 발효를 거듭하여 마침내 ‘합병’이라는 최악의 드라마로 조선을 덮쳤다. 정한론이 무산된 바로 그 다음 달 1873년 11월,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를 빌미로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친정을 선포했다. 조선이 일본의 동향과 의도를 제대로 파악만 하고 있었다면, 고종의 친정 선포 시점은 더없이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현해탄을 역류해 오는 거센 조류를 읽지 못했다. 일본의 조야에 정한론이 비등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정한론의 무산 과정에서 일어난 일본 내부 권력지도의 대변혁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 p. 2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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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수 한국인들에게 신화처럼 남아있는 명치유신의 환상에서 깨어나게 하는 신선한 역작이다. 특히 중국의 그림자가 한반도에 드리우기 시작하는 이 시점에, 근대화에 실패하여 국권을 빼앗긴 지난 역사를 깊이 성찰하게 하는 사회사로서, 본서는 모두가 읽어야 할 사료 이상의 지식이다.
윤동한 (한국콜마주식회사 대표이사·서울대 AFP과정 총동창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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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를 향한 조선과 일본의 대응자세를 비교한 역작
시골 사무라이에 당한 조선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았던 역사에 대한 가정은 역사의 진보를 위한 교훈을 이끌어내는 데 유용할 수도 있다. 미국의 진보적인 사회 , 역사학자 베링턴 무어도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설명은 왜 다른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았는가에 대한 설명을 전제한다’고 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시작된 탐구적 역사여행의 결과물이다. 화두는 ‘조선은 왜 망했는가’ 였으나, 그 답은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서 찾고자 했다. 그때 일본에서 일어난 일이 조선에서도 가능했다면, 그래도 조선은 망했을까. 이 물음이 긴 여정의 단초였다. 저자와 史行에 동행한 이들은 전직 관료와 CEO 약 20명이었다. 근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노학자(이태진 서울대명예교수)가 이들의 행로를 끌었다. 이들은 먼저 여덟 분의 근대사 전공 교수를 초빙하여 3개월간 한ㆍ중ㆍ일 근대사 비교강좌를 집중 학습했다. 그와 같은 철저한 준비과정을 거쳐 메이지유신 주역들의 발자취를 따라 일본 야마구치현 일대 현지답사를 다녀왔다. 조선의 개항 유적지인 강화도 답사도 빼놓지 않았다. 이와는 별도로 저자는 큐슈(가고시마, 구마모토, 나가사키) 일대 메이지유신 사적지를 혼자 정밀답사하고, 야마구치현 재답사까지 하고 왔다. 그렇게 철저한 현장 확인과 고증을 거쳐 조선과 일본의 상반된 근대사를 복원했다. 근대화의 쓰나미에 거의 동시에 맞닥뜨렸으나 그 대응방식에서 뚜렷하게 달랐던 조선과 일본이 어떻게 무너지고 일어섰는지, 역사적 사실의 대비를 통해 보여주는 실상은 지금까지 어떤 역사서도 전해주지 못했던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 출발점으로 찾아간 곳은 야마구치현 하기(萩)시의 조그만 시골 학숙(쇼카손주쿠. 松下村塾)이었다. 한일합병 주역들의 면면을 조사하다가 당시 조선 공사(이노우에 가오루, 미우라 고로), 통감(이토 히로부미, 소네 아라스케), 주차군사령관(야마가타 아리토모,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테라우치 마사다케)은 물론, 내각총리(가쓰라 다로) 등 핵심 인물들이 모두 죠슈번(야마구치현)의 도읍지인 이곳에서 동문수학한 문도들이었고, 그들을 키운 이데올로그는 불과 서른에 생을 마감한 백면서생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일본이라는 국가 전체가 아니라, 당시 일본 인구의 60분의 1에 불과한 시골 외방 사무라이들과의 투쟁에서 졌다는 사실을 그들의 성장과정과 입신출세, 조선병탄 과정에서의 역할을 추적하여 기록했다. 특히 그들 죠슈인맥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 다카스키 신사쿠라는 우리에게 아주 생소한 인물이고, 그가 바로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야스쿠니의 망령을 창조한 군국주의의 원령이라는 사실을 생생한 현장 사진과 함께 보여준다. 왜 죠슈 사무라이들은 그렇게 조선 병탄에 집착했을까? 그들을 그렇게 키운 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시다 쇼인이라는 지사가 양성한 죠슈번 사무라이들은 260년 막부체제를 끝장내고, 메이지유신을 일으켜 일본을 천황제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킨 후 조선을 집어 삼켰다. 그 과정에서 당시 조선과 일본이 보여준 지극히 상반된 대응전략과 모습도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그 주역인 고종과 메이지가 동갑내기였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밝혀냈다. 일본의 47개 都·道·府·縣 중 20개 현이 아직까지 단 한 명의 총리도 배출하지 못한 가운데 야마구치현에서 만 무려 9명의 총리가 배출되었는데, 그 중 4명은 한일합병의 주역이었고 1명은 한일협정(1965년)의 주역이었으며, 마지막 1명은 현직 총리로 재임 중이다. 조선통신사의 상륙거점으로 조선과 접촉 빈도가 가장 많았던 이곳에서 총리가 나올 때마다 현해탄은 격랑이 몰아쳤고 100년 전 조선은 그 파고에 침몰됐다. 그 역사의 매듭을 풀고 다시 국교를 재개한 것도 이곳 출신인 사토 수상이었다. 현재 간 나오토 수상도 이곳 출신이고, 한일 외교의 사령탑인 마쓰모토 다케아키 외상은 이토 히로부미의 외고손자다. 이같은 사실의 확인을 통해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소름끼치도록 실감나게 기록한 저자는 그 교훈을 아놀드 토인비의 말로 매듭지었다.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똑 같은 역사의 반복을 경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