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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E BIEN U,裵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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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담는 나의 풍경들은 사람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이다." - 배병우
Drawn by Bae Bien-U, we follow the 'wind' and 'light' in nature. Calm your mind - the distant yet close motherland is certainly calling us. - Chiba Shigeo 배병우ㆍ신체라고 하는 자연 치바 시게오 千葉成夫 만일 똑같은 자연 풍경 앞에서, 똑같은 장소에 삼각대를 세우고 똑같은 카메라를 사용해서 열 명이 셔터를 누른다면 과연 그 사진은 똑같은 ‘사진’이 될까? 그렇게 해서 완성된 사진의 ‘이미지’만을 본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진은 현실세계를 찍어낸 것이니, 똑같은 풍경은 일단 똑같은 풍경이다. 만일 셔터 누르는 것을 전부 자동으로 설정한다면 완전히 똑같은 사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열 명이 따로따로 파인더를 들여다보면서 셔터를 누를 때 결과는 달라진다. 열 명 각자의 신체, 손이나 손가락의 움직임, 감각, 숨결, 사상, 재능 따위가 그 ‘이미지’ 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기계가 자동으로 촬영한 이미지를 제외하고는 ‘순수한’ 이미지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바꿔 말하면, 우리들이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은 사진작품에 있어서조차 실은 ‘이미지+알파’, 그러니까 ‘이미지’에 뭔가가 덧붙여진 것이나 다름없다. 사진작품을 ‘사진’과 ‘작품’으로 나누어 본다면, ‘작품’을 이루는 것은 그 ‘플러스 알파’ 쪽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또 다른 한 가지를 언급하고 싶다. 이 ‘플러스 알파’가 사진의 범위에 머물러 있는 경우와 그 범위를 넘어서버린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전자는 ‘사진으로서의 사진’이며, 후자는 일단 ‘미술로서의 사진’이라 불러두자. 간단히 말하면, 전자의 ‘플러스 알파’는 피사체로부터 떨어지는 일 없이 어디까지나 피사체를 향해 간다. ‘플러스 알파’가 이미지에 밀착하고 ‘이미지’성을 강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에 반해 후자에서 ‘플러스 알파’는 이미지에서 떨어져나간다. 피사체에 매여 있으면서도 피사체 자체가 아닌 그 주변을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 ‘이미지가 아닌 것’이 생겨나게 한다. 일반론처럼 쓰기 시작했지만,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배병우의 사진작품이다. 그에게는 ‘사진으로서의 사진’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사진은 뭐라 부르면 좋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