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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옮긴이의 말 다시 쓴 실록 삼정승의 만남 별난 친구들 귀신 동네 복사꽃 피는 집 포정의 침 사라진 병부일지 내시촌 정씨 왕조 불행의 씨앗 부적의 고백 번민의 세자 홍매 활짝 피면 새 하늘을 여는 사내 간악한 손길 만인혈석 꿈꾸는 여인 불구대천 보이지 않는 그림자 두 발 달린 돈 말 없는 증인 사슴 꼬리를 잡은 남자 궁중의 은밀한 만남 홍매 피다 벙어리 광대 담배 파는 노인 하늘이 뚫린 날 매우梅雨 비밀의 기록 충신이 이끈 임금 비상을 꿈꾸다 |
Marc Hamps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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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백상은 예전의 세자가 그리운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무릇 목민관이라면 흉년에는 당연히 관의 연회부터 작파해야 한다. 극도로 내핍하며 예산을 아껴 백성을 구휼해야 마땅하건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렇게 고지식하게 굴다간 영전榮轉은 꿈도 꿀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른걸레 짜내듯 조세를 뜯어 때때로 촌지라도 상납해야 자리보존이나마 할 수 있다. 그나마 일기가 골라 소출이 좋으면 무난하게 넘어갔다. 허나 나락이 가뭄에 타거나 태풍에 자빠지기라도 하는 날엔 가마솥 눌은 밥 긁듯이 박박 긁어갔다. 흉년이 들면 민심도 덩달아 흉흉해졌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탐관오리들이 그렇게 긁어다 바친 뇌물은 도성 세도가들의 마음을 열고 입은 닫게 만들었다. 세자는 돈으로 사람을 구워삶는 세태를 역이용했다.
“조세를 내고 남는 알곡은 무조건 현지 감영에서만 거래하라!” 세자는 참신한 방법으로 세도가의 돈줄을 말려버렸다. 성군의 자질을 타고나신 분은 떡잎부터 달랐다. 지방관들도 구태의연한 관례에서 탈피해 제정신을 차린 듯싶었다. 이렇듯 백성을 향한 자비심, 관리들의 마음속까지 훑어내는 통찰력까지 갖춘 분이 돌변했다. 겉은 멀쩡한데도 속은 날이 다르게 무너져갔다. 명민하던 세자를 생각하면 미련이 남았다. --- p.29~30 “빌어먹을 주정뱅이가 막판에 일을 그르치다니…….” 죽은 장의삼만 떠올리면 절로 이가 갈렸다. 나경언은 서소문 상갓집에 문상까지 갔다. 과수댁을 슬슬 을러서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형판대감 전갈도 전하고, 살 길 마련도 해줄 겸 어음도 한 장 던져줬다. 영중추부사 아들놈이 시신만 건사하지 않았어도 그깟 주정뱅이 처자식이야 죽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헌데, 그 문원이란 놈 일당이 다시 서소문에 나타났다는 소식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놈들이 어디까지 캐낸 걸까. 빈소에는 시선을 사로잡던 물건이 있었다. 벽장, 시렁, 천장에 빼곡히 붙어 있던 부적이었다. 살아생전 놈이 그렸다던 요상한 그림이 특히 마음에 걸렸다. 부적을 떼어왔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세자의 병세에 대한 털끝만한 단서도 찾지 못했다. 옹주가 치료랍시고 권했다는 게 무척이나 황당했다. 그림에는 이상한 합환 자세, 남녀의 음탕한 모습만 어지럽게 널려 있다. 남녀 간의 기를 주고받으면 못 고칠 게 없다는 말 자체가 새빨간 거짓이었다. 대관절 만인혈석萬人血石이란 게 효험이 있긴 한 걸까. 나경언이 생각기에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처방이었다. 옹주가 살갑게 굴어 사면초가의 오라비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동생의 말도 한 치 의심 없이 믿고 따랐을 터였다. 가선이란 비구니가 일을 꾸미고 성사시키는 데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동궁은 이제 제 정신이 아니다. 비구니가 시키는 대로 밤의 향연만 즐긴다니. ‘그래, 이제 곧 때가 무르익겠지. 세자는 저리 방탕하게 지내다 화초처럼 말라 죽겠군.’ 좀 전의 불안감은 말끔히 사라졌다. 나경언의 입가에서 조금씩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 p.138~139 “내막을 아는 자는 모두 죽고 나만 홀로 남았구나.” 늙은 내관은 너무 오래 살았다며 장탄식을 터뜨렸다. 오늘따라 박필수의 굽은 허리가 한층 처량해 보였다. 왕실 내부의 암투, 신하들의 권력다툼, 유생들이 올리는 상소문, 하다못해 삶에 지친 백성들이 토해내는 한숨소리까지 듣는 게 내시의 귀다. 그러면서 임금이나 고관들에게는 제대로 된 고변 한번 올리지 못했다. 남들이 떠들 때 내시들은 들어야 하기에 인생의 경륜이 쌓여만 갔다. 박필수는 경륜의 무게에 눌려 자세가 더욱 낮아졌다. 이럴 때 이천보, 이후, 민백상과 손잡게 됐다. 종묘사직을 구하기 위해 이들과 한 배에 몸을 실은 것이다. 옛 일을 회상하며 이런 시름, 저런 고민으로 한식경이나 보냈을까. 멀찍이 떨어진 궁궐 문 쪽에서 불빛이 어른거렸다. 박필수는 옹주의 행차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길잡이가 영빈마마가 납셨으니 고하라는 것이다. 박필수는 잠시 딴 데 정신이 팔렸다. 야심한 시각에 영빈까지 납시자 참 별일이라고만 여기다 제때 받아 고하지 못했다. 영빈이 바로 코앞까지 걸어왔다. 박필수가 부랴부랴 촛불이 흐릿하게 흔들리는 방에 대고 아뢰었다. “저하! 영빈마마께서 납셨사옵니다.” 어머니가 왔다는 말에 반가움이 앞섰을까. 아니면 여인들의 낭송소리를 듣다 곯아떨어졌던 걸까. 방 안에서 우당탕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시종 내시들이 세자께 변고라도 벌어진 줄 알고 앞 다퉈 튀어나갔다. 문을 박차고 들어간 순간 목불인견, 지옥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박필수는 계단에서 엉겁결에 뒷걸음질을 치다 낙상할 뻔했다. 소경마냥 앞이 보이지 않고 피가 얼굴로 몰려 가슴이 마구 고동쳤다. 잠시 뒤 영빈이 바람에 펄럭이는 가을들판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 “어서 영빈마마를 모시거라!” 상궁이 영빈을 부축하며 주변을 다그쳤다. 나인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르르 덤벼드는 사이, 박필수가 방문에 발을 쳤다. 세자가 옷을 벗고 희끄무레한 나체를 드러냈다. 여인들 벗은 몸이 세자와 뒤엉켜 붙었다. 남녀의 몸이 담쟁이넝쿨처럼 서로를 밀착한 채 뒹굴었다. 의관을 갖추고 있는 건 유난히 얼굴이 흰 그 여인뿐이었다. 향을 피운 채 뭔가 입안에서 웅얼대며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여인은 얇은 막이라도 씌운 듯 무심한 눈빛으로 우두커니 쳐다볼 뿐이었다. --- p.213~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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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인터뷰
1. 까마득한 옛 기억이겠지만 조국에 대해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생후 4개월 만에 벨기에로 갔다고 하니, 당연히 조국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유럽에서 마주친 한국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것이 전부다. 처음 투자은행에서 근무할 당시 한국지사에 파견되어 2년간 일한 적이 있다. 당시 한국은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난리였다. IMF의 요구에 따라 행해진 한국 경제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종금사 및 은행의 인수합병 작업에 참여한 것이 전부다. 한국은 내게는 살아있는 기억이 아니라 장부상 남아 있는 숫자에 불과하다. 2. 소설 충신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유럽에서 하는 일에는 담보물을 검사하는 작업이 포함되어 있다. 문화재 등 동산의 진품 여부, 또 그것의 소장이 적법한 절차를 거쳤는지 하는 것 등이다. 진암집은 파리의 고서적상에서 본 한국 문집이었다. 진암집의 저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왕조실록의 미심쩍은 대목을 발견했다. 3. 어떤 점이 미심쩍다는 것인가? 첫째, 저자 이천보의 죽음이다.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의 사인(死因)을 두고 영조실록은 병사로, 훗날의 고종실록은 자결로, 각기 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미심쩍다. 둘째, 영상(이천보)에 이어 좌상(이후), 우상(민백상)이 잇달아 사망했는데 모두 병사로 처리됐다. 삼정승이 연달아 자결한 데는 그에 합당한 까닭이 있어야 한다. 4. 세자의 병증에 대한 소견은 무엇인가? 조선시대 사람의 유전자 정보를 구할 수는 없으니, 한의학에 의거해 세자의 병증을 분석했다. 그 것을 정신병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정신병의 전형적인 증상은 지적장애로 학습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어렵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등 정신병자의 행동과는 현저히 거리가 있었다. 총명하고 성실한 사람이 딴판으로 변해 살인극을 벌인다면…… 나는 그런 증을 정신질환이 아닌 신경질환으로 진단하고 싶다. 5. 신경질환이라면 중추신경계의 문제라는 얘긴가? 결핵이나 매독 균이 신경계를 침범할 경우에는 증상이 상시가 아니라 간헐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세자가 불시에 환청에 시달리거나 헛것을 보고 내관을 살해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동양 전통에서는 무당이 접신할 때 보이는 현상과 유사하다. 결핵이라면 잦은 각혈이나 급격한 체중 감소가 따라야 하는데, 그런 증상이 빠져 있으니 결핵으로 보기는 어렵다. 세자에 대한 기록 중 한결같은 것은 석대하다(키가 크고 뚱뚱하다)라는 것이다. 또한 세자의 죄목 중 하나가 기녀, 여승 등과의 간통이었다. 여염의 난잡한 여성들과 어울렸다면 성병 감염을 무시할 수 없다. 6. 삼정승의 자살과 사도세자 사건의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정조 6년(1792) 문신 박하원이 왕명에 따라 작성한 대천록(待闡錄)에는 효종이 삼정승을 기려 소나무 세 그루를 심었는데 세자가 광증이 도져 도끼질을 한 뒤 이천보, 이후, 민백상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천록은 정사는 아니고 세자를 둘러싼 민간의 소문을 엮은 책이다. 그 구절을 실마리로 취재를 시작했고, 결국 고종 36년(1899) 장헌세자 복권을 두고 벌인 어전회의에서 세자의 안위를 위해 자결한 것으로 확정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비슷한 기록은 많은데, 영의정이던 흥원군 이최응(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친형)이 삼정승이 세자의 안위를 위해 자결한 내막을 밝히기도 했다. 7. 영조실록이 조작됐다는 얘긴가? 그렇다. 조선 초기에는 사초나 승정원일기를 왕이 열람할 수 없었지만 임진?병자의 난을 거치면서 이런 불문율도 허물어졌다. 실제로 영조도 세자의 평양 원유에 대한 상소문을 보지 못하다가 승정원일기를 열고 보고되지 않은 사안을 파악했다. 왕조국가인 조선에서 기록은 왕명으로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8. 조사의 실마리가 된 진암집이 만약 진본이라면 그 가치는 얼마쯤 된다고 보는가? 내가 본 진암집은 아쉽게도 향교의 유생들이 과거시험에 대비해 베껴 쓴 영인본으로 추정된다(진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 중인 것으로 안다). 만일 진본이라면? 모호한 질문이다. 임자만 잘 만나면 수천만, 아니 억대도 가겠지만 유물은 그 가치를 금전만으로 특정할 수 없지 않은가. 아마도 소수의 연구자들만이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알 것 같다. 9. 벨기에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여겨본 적은 없는가? 나의 어린 시절을 표현하라면 ‘행복’ 두 글자만으로 충분하다. 아버지는 경찰관, 어머니는 도서관 사서였다. 친자를 갖지 못한 분들이라서 그분들은 나를 친자식 이상으로 여겼다. 벨기에는 작은 나라지만 유럽의 정중앙이다. 따라서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 것이 이웃 나들이나 다름없다. 또 아버지는 네덜란드어가, 어머니는 프랑스어가 모국어인 데다가 아버지가 직업상 독일어권에서 생활하신 덕분에 3개 국어를 자연스럽게 배웠다. 벨기에는 나의 모국 이상의 의미를 가진,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준 나라다. 한순간도 나 자신을 한국인으로 여긴 적은 없다. 따라서 친부모를 찾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나를 길러준 부모만으로도 충분하다. 10. 2009년 발간한 충신을 이번에 신작 배교와 더불어 개정 발간했다. 소재로 한국사를 다룬 연작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우연의 일치다. 무엇보다 책 발간은 번역자가 종용한 면도 있다. 전문작가 수업을 받지도 않았고 글쓰기가 아직 일천하다.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데 마침 친구이자 번역가를 잘 만났다. 타이밍이 좋았다고 할까. 소설의 소재는 한국사지만 글의 구성은 다분히 서구적이다. 단서를 찾아 추적하는, 마치 도서관에서 도서목록을 살피는 식의 추리 방식은 유럽의 추리작가들이 추구하는 글쓰기 전형이다. 내게는 어린 시절 어머니 일터인 도서관에서 길을 잃고 책장 사이를 헤매던 기억과도 같다고나 할까. 11.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그림자 작가 생활을 계속할 것인지? 나를 믿고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는 고객들이 많다. 우선은 내 생업인 보험업에 집중하고 싶다. 고객에게 누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12. 앞으로도 좋은 작품으로 독자들과 만나길 바란다.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은 머리보단 가슴이 뜨거운 나라인 것 같다. 내 작품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을 따르지 말고 다른 가정이나 가설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이천보는 매력적인 사내다. 하지만 내 나라 사람은 아니다. 숨겨진 역사를 찾아 발굴하는 것은 한국 독자들의 몫이라고 본다. 나는 다만 일말의 가능성만을 보여드리는 수준이다. 좋은 소재가 있다면 작품은 언제든 쓰고 싶다. 책의 결론과는 무관하게 남들이 모르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기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