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Ⅶ.친미파가 형성되다
1. 미국에 첫 상주외교사절 파견 2. 이완용 ‘좋은 인상’, 이상재 ‘더러운 사람’ 3. 영어 한마디 못하던 ‘천치’가 유창해져 4. 금발미녀 사로잡은 ‘상투 댄디’ 5. 배씨 부인, 탁월한 영어 실력 과시 Ⅷ. 영어, 권력을 업다 1. 권력의 전면에 나서다 2. 고종, 황태자에게 독선생 붙여 영어교육 3. 영어학교 지원금, 일어의 3배 4. 이승만, 조선인 최초 영어연설을 하다 Ⅸ.영어 습득자들의 근대 개혁운동 1. 영어파 각종 신문 창간을 주도하다 2. 영어파, 독립협회 등 사회운동 이끌어 3. 오늘날 서울의 원형을 그리다 4. 영어 습득자들의 국제무대 진출 5. 지상낙원을 찾아 미국 포와(布)로 Ⅹ.서양문물의 침투와 망국으로의 질주 1. “젖과 꿀이 흐는 조선”… 넘치는 서양인 2. ‘스프링 침대’ ‘뻐꾸기시계’에 넋잃어 3. 조선을 사로잡은 커피 4. 영어파 이완용의 배신 5. “영어를 쓰니 일인이 우러러 보더라” 11. 입신의 제 1자격, 영어! 1. 우민화정책으로 영어능력 추락 가속 2. ‘국수주의의 항성’ 신채호도 영어 배워 3. 영어, 산업을 이루다 나가는 글 영어 과잉 속‘벙어리 영어’1백년 Not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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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씨 부인은 1892년 2월 2일 오후 4시에서 7시가지 외교계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다회를 열었다. 공사관 응접실은 각종 식물로 장식됐다. 부인은 엷은 청색의 비단 한복을 입고 손님들을 맞이했는데, 허리에는 노란색 무늬를 놓은 붉은 우단을 둘렀다. 부인의 영어는 완벽했다. 다회의 즐거움을 함께하기 위해 그녀에게 가까이 오는 많은 사람과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나눴다.” --- p.40
이 가운데 황태자에게는 따로 영어 독선생을 붙여 교육시켰다. 정확히 언제부터 영어를 가르쳤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외부대신 박제순이 1898년 10월 영국 판사공사 조던(J. Jordan)에게 황태자 영어교사 졸리 부인의 계약서를 요구한 기록이 보인다. 또 1902년에도 계약서 요청 기록이 있고, 1904년 작성된 조선 주재 일본 공사관 기록 ‘내장원 외국인과의 계약 요항’에도, 황태자 영어교사 영국인 졸리와의 계약기간(2년)과 월급(330원)이 명시돼 있다.이를 토대로 추정해 보면, 1898년부터 영어 개인교습을 받아 1904년까지 최소 6년 동안 영어 가정교사를 두고 교육을 받은 셈이다. --- p.72 ‘국수주의의 변치 않는 별’이란 별명이 붙은 단재 신채호도, 수주 변영로에 따르면 아래와 같이 영어를 배웠다고 하니, 영어는 가히 일제하 조선에서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지식인의 필수품’이라 할 만했다. “어느 겨울에 연구하섯는지 영어를 정통하야 칼라일의 영웅숭배론, 끼본의 나마쇠망사 등 서적을 책장에 담배ㅅ진은 만히 뭇치실망정 원어로 읽으신다는 것을……” 신채호는 처음에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우다가 까다롭게 발음을 따지는 데 질려 이광수에게 찾아가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 p.2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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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두려움, 개혁과 욕망, 배신이었다’
이 책은 한반도, 한국인들의 삶에서 영어는 무엇이었고 어떻게 기능했는지를 보여준다. 영어는 두려움으로 다가와 개혁과 욕망, 배신의 상징어가 됐다. 왜 십년이나 배워도 ‘벙어리’일 수밖에 없는지도 따진다. 처음엔 두려움이었다. 폐쇄사회 조선에 있어서 외부 세계는 체제 위협 요인들이었다. 중국이외에는 굳이 소통하려 하지 않았다. 귀찮게 하는 왜와 오랑캐는 다독이는 수준이었다. 그런 조선에 서양은 배로 접근해 왔다. 그들은 교역을 원했지만 조선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로서 함부로 교역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말도 통하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 만난 영어는 왜가리 지절거리는 소리였으며, 알파벳은 정체불명이었다. 그러나 조선에도 호기심 많은 지식인들은 있었다. 그들은 중국을 통해 책을 들여와 소위 ‘서학’을 독학했다. 그러다 ‘믿음’이 생겼고, 그 믿음을 지도해줄 이들을 청했다. 프랑스신부들이 들어와 믿음을 전했다. 서양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그러나 권력은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조선이 영어와 영어사용국 미국에 관심을 쏟게 된 것은 일본이 한반도 침략을 노골화 하면서 부터였다. 도움을 구할 국가로 ‘공평한’ 미국을 상정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은 선교사들의 입국을 허용하고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와 병원을 세울 수 있게 해주었다. 국가개혁을 꿈꿨던 개화파 인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영어에 관심을 기울이고 배웠다. 갑신정변 후 서재필 등은 미국으로 망명해 새로운 문물과 제도 등을 익히고 귀국해 개혁에 앞장선다. 잠든 민중이 깨어나며 영어는 출세의 수단으로 각광받게 된다. 외국 기업들과 개발업자들이 속속 진출함에 따라 영어 사용자 민관 양측 수요를 충족시키기 힘들 정도였다. 영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알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벼슬을 할 수도 있게 됐다. 찹쌀떡 장수 이하영이 외부대신에 오르는 모습은 젊은이들에게 영어를 통한 신분상승 욕망을 품게 했다. 이완용은 고종이 만든 영어학교 육영공원 출신이었다. 그는 초대 주미 공사관원으로서 친미파의 핵심 중 한명으로서 미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조선 내정 개혁의 한 축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등을 돌리고 한일합방에 앞장 선 매국노가 됐다. 친일파들은 해방되자 얼굴을 바꾸어 미군정 통역 등으로 권세를 누리며 추악했던 그들의 지난날을 지웠다. ‘벙어리 영어’ 탄생의 배경을 추적한 것도 흥미롭다. 일제의 영어 배격 핍박과 입시영어는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오던 말 중심 외국어 공부의 틀을 깨뜨렸다. 그 뿌리가 아직도 뽑히지 않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영어로 인한, 영어를 통한 사회적 차별과 구분이 생겨났다고 분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