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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감사의 말 | 한국사 연표 | 한국 지도
1. 고구려와 고대 한국 2. 선덕 여왕과 신라의 삼국통일 3. 통일신라 4. 고려왕조의 창건 5. 고려 사회의 지방주의와 종교 6. 원 지배기 7.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8. 조선왕조 초기의 유교와 가족 9. 왜란과 호란 10. 조선 중기의 이념, 가족, 민족의식 11. 18세기 후반의 지적 활로 12. 조선 후기의 대중문화 13. 19세기의 사회적 불안 14. 1894년, 운명의 해 15. 대한제국 16. 일본의 국권 강탈, 1904~1918년 17. 기나긴 1920년대 18. 식민지 시대 후반기의 민족, 문화, 일상생활 19. 전시동원체제, 1938~1945년 20. 해방정국, 1945~1950년 21. 한국전쟁 22. 북한 체제 초기 23. 1960년대의 한국 24. 1970년대 한국의 문화와 정치 25. 북한 사람들의 삶과 기념물 26. 한국의 민주화 27. 새 천 년의 한국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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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만한 역사적 기록에 의해 한반도에 등장한 최초의 정치체로 인정받은 고구려(기원전 1세기에 건국, 서기 7세기에 멸망)는 전성기인 6세기 후반에 한반도 중부와 만주를 지배했다. 이 같은 광활한 지배 영역 외에도 군사적·문화적 업적, 그리고 정치적·종교적 권위의 형태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가 발견되어 고구려는 초기 한국 문명을 공식적으로 대표하게 되었다. …… 한국 문명의 초창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주제(천손인 시조가 일찍이 겪는 시련과 고난 따위)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대륙의 지배 문명인 중국과는 다른, 한국의 정체성을 지닌 독자적인 특징을 담은 신화 속에 둘러싸여 있다. --- pp.21-22
중앙아시아인 중에 칭기즈칸의 후손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의 근거가 되는 DNA 분석 결과는 오늘날의 한국인 중에도 칭기즈칸의 후손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수없이 되풀이된 정복의 결과다. 물론 그런 식의 혈통의 혼합이 이뤄진 비극적 상황을 떠올리거나 치욕스런 결과에 몸서리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사의 이 특별한 사연을 비난하든, 아니면 학문적으로 냉정하게 연구하든지 간에 그것은 확실히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는 것 같은 단일민족 개념을 뒤흔들어놓는다. --- p.106 북학파는 조선 사회에 즉각적이고 주목할 만한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북학파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북학파의 활동은 그저 흥미로운 사실일 뿐 결국에는 영향력이 미미했던 지적 운동에 불과한 것일까? 앞서 살짝 언급했듯이, 18세기의 그 장밋빛 발전을 둘러싼 ‘가정’은, 19세기의 비극으로 이어진 유아론적 쇠락을 고려할 때 유난히 아쉬우면서도 흥미진진한 문제다. 여기서 기본적인 쟁점은, 다소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조선 사회 내부의 발전이 자체적으로 근대로의 이행을 촉발할 만큼 충분했는가 하는 것이다. --- p.183 하지만 이완용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각 분야의 수많은 한국인들이 국권 강탈 과정에 편승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완용은 황실과 인척관계에 있었다. 한편으로는 비극적인 역설이었지만, 그것은 저항과 수용이라는 두 측면 사이의 흐트러진 유대와 흐릿한 선, 즉 다수의 한국인 앞에 놓인 분명하지 않은 선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많은 역사가들과 교육가들이 국권을 지키기 위해 애국계몽운동에 전념한 반면 다른 사람들은 민족이 살아남으려면 정치적 독립을 포기해야 한다고 믿었다. --- p.265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기까지는 공산주의권의 서열을 충실히 따라야 했다. 기밀 해제된 문서를 비롯한 여러 사료를 분석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지도자들에게 남침을 허락받고 전쟁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다고 볼 수 있다. 스탈린은 국공내전에 참전했다가 잔류한 수천 명의 한국인 의용군을 귀국시키려는 마오쩌둥의 조치에 동의했다. 김일성은 북한도 중국처럼 공산주의자 주도의 무력통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마오쩌둥을 설득했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개입을 우려했지만 김일성에게 중국군의 원조를 제안했다. …… 한편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보인 스탈린은 김일성의 결사적인 남침 시도를 마지못해 허용하고 북한군에 전략적·물적 지원을 해주는 동시에 소련이 연루되었다는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요구했다. 바로 그런 점을 못 박아둔 뒤에야 비로소 남침을 허락했다. --- pp.342-343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 사회의 뼈아픈 분열이 절정에 이르러 폭발한 사건이라는, 그리고 급진화, 지역주의, 반미주의, 민주주의를 비롯한 이후의 한국의 정치와 사회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결정적인 특징의 근원이라는 훨씬 큰 역사적 의의가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사의 진정한 분수령이었다. 그리고 대중문화의 측면에서도 광주민주화운동은 매력과 성찰의 원천으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 p.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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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관점으로 바라본 역사 속 결정적 사건들을 통해 한국사의 정체성을 추적한다!
《맥락으로 읽는 새로운 한국사》(황경문 지음, 21세기북스)는 매우 독특한 역사서다. 먼저, 고려한 독자가 다르다. 이 책은 재미 역사학자 황경문 교수가 외국인을 대상으로 영어로 집필한 한국사다. 그래서 배경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한국 역사의 전체적 맥락을 쉽고 특징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노력이 담겨 있다. 이 점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미덕으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맥락’을 추적하는 데 있다.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적 패턴을 찾아가는 일은 저자의 집요한 관심사이며 학문적 주제였다. 이 책은 과거의 사건과 현상이 오랜 시간을 넘어서서 어떤 맥락으로 현재 한국과 한국인의 삶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한 역사적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시대 구분이나 중요한 사건을 선택하고 해석하는 방식도 새롭다. 건국신화의 의미와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객관적 사료만을 근거로 삼아 ‘고구려’를 한국 역사의 시원으로 본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건국까지는 오랜 시차가 있다는 입장이다.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시도도 단호히 배격한다. 고구려야말로 한국인의 정체성이 시작되는 역사적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민족주의 시각으로 고구려를 바라보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외세를 끌어들인 민족적 배신으로 간주하는 시각도 오류가 있음을 지적한다. 고구려부터 이명박 정부의 집권까지 한국사의 모든 내용을 한 권의 책에 담아낼 수 없기에, 저자는 지금의 한국인을 만든 중요한 사건과 상황, 인물 등을 선택하여 다루었는데, 주목하는 지점이 남다르다. 예를 들어 조선의 건국 장면 대신 이방원과 정도전의 대결 구도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이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형성과 후세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 분량의 절반 이상을 근현대사에 할애하고, 해방 이후 북한의 역사에 대해 병행해서 다룬 점도 특이하다. 한국사의 과거와 현재 사이의 연관성 이 책은 한국사의 특징적 장면을 포착하여 현대 한국의 복잡한 대중 관계와 대일 관계, 사회적 계급제도와 정치권력 사이의 유대, 종교가 촉발하는 중요한 변화의 분출 같은 되풀이되는 양상을 지각함으로써 엄청난 시간적 거리가 있는 사건들의 연관성을 끌어내고 있다. 특히, 왕조의 역사 같은 지배계급 중심의 역사 전개를 지양하는 대신 문화와 종교, 생활상 등에서 신분과 관계없이 한국인의 삶이 어떤 패턴을 보이며 변해 왔는지를 탐구한다. 예를 들어, 한국사에서 여성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관해 비중 있게 다루었다. 선덕여왕, 기황후,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씨, 장희빈, 조선의 기생들, 나혜석, 사회참여가 활발한 현대 한국여성들,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여성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며 당시 여성의 지위와 활동을 다루었으며 변화 양상과 그 의미를 설명했다. 특히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 씨가 남긴 분재기(재산을 상속한 기록)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딸에게 재산을 상속했다는 사실과, 제사를 지낼 후손으로 둘째 딸의 셋째 아들인 율곡을 지정했다는 점에서 관습(딸에게 상속)과 유교(제사 지낼 후손을 남성으로 지정하고, 상속 시 배려함)가 혼합된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밖에서 본 한국사 한국인의 한국사 인식에는 ‘자긍심’이 개입할 여지가 많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쓰인 이 책은 이러한 자긍심을 배제한 채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시야로 역사를 서술했다. 그래서 읽기에 불편한 내용도 눈에 띈다. 원의 침략과 지배를 받은 고려 말 충렬왕 이후의 모든 왕들(마지막 왕 공양왕을 제외하고)은 원의 공주와 결혼한 후 고려로 돌아와 즉위했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이다. 당시 몽골족과의 혼인이 신분과 관계없이 두루 이루어졌고 몽골문화가 사회를 압도했던 점을 고려하면, 우리가 혈통적으로 단일민족이라는 전제는 부정된다. 그러나 이때부터 우리 민족이 진정한 의미의 세계 질서에 편입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비참한 우리 현실을 일본 제국주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따끔한 지적도 있다. 한국사에서는 한국인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관점을 반드시 견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외세가 한국을 강제로 지배하기 위해 이용한 여러 수단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흔히 놓치는 자명한 사실이다. 한국인은 외세의 강제 지배 시도에 저항했지만, 동시에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여러 측면에서 거기에 도움을 줬다. 그러므로 국권 상실로 이어진 길은 제국주의와 한국인의 동의가 상호작용하면서 열렸다는 해석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남북한 역대 정권에 대한 외부적 평가도 눈길므 끈다. 조만식의 ‘대타’로 소련에 의해 선택된 김일성은 외세의 강한 영향을 받는다는 역설적 반증으로 주체사상을 부르짖었다. 80년대 후반까지 극단적 어려움 없이 유지되던 북한 경제가 파국으로 치달은 결정적 이유는 소련의 붕괴에 따른 지원 중단이었다. 이후 자연재해와 사회 시스템의 후진성을 극복하지 북한 정권은 점점 극단의 길을 달렸다. 박정희 정부는 ‘군사적’ 성격이 강한 독재정권으로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해 산업화를 추진했다. 노태우 정권은 군사정권의 연장으로 볼 수 있지만 도도하게 흐르는 민주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다. 오히려 ‘북방외교’ 등으로 대공산권 외교정책의 틀을 바꾸기도 했다. 김영삼 정권은 군사정권과 단절하고 민주주의를 정착시켰지만 산업화와 성장 중심의 폐해를 극복하지 못했고, 김대중 정권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남북관계를 회복시켰다. 노무현 정권의 탄생은 그 자체로 한국 젊은 세대의 자유주의적이고 역동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보수를 표방한 이명박 정권의 향방은 앞으로 더 지켜볼 과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