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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서문 제1부 하나님을 거부하다 1. 부르심 2. 타락 3. 좋지 못한 결과 4. 새로운 소명 제2부 나는 왜 무신론자가 되었나? 5. 나는 왜 무신론자가 되었나? 6. 하나님을 반박하며 7. 어느 문에나 있나니 8. 칼람의 우주론적 증명 9. 친애하는 신학자여 제3부 기독교는 무엇이 문제인가? 10. 성경과 도덕성 11. 팝법적인 살인은 허용되어도 좋은가? 12. 아무쪼록 선한 사람이 되기를 13. 성경의 모순들 14. 모순을 이해하기 15. 예수는 존재했는가? 16. 예수는 죽은 후에 정말 부활했을까? 제4부 인생은 좋은 것이다! 17. 워싱턴에 가다 18. 무신론의 모험 19. 삶과 죽음의 문제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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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대부분은 종교에 비판적이지 않다. 설교를 해온 19년 동안 예배가 끝난 후에 나를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바커 목사님, 설교의 출처는 무엇인가요?”라고 물은 적이 없다. 나는 단순히 목사라는 이유로 노력 없이 얻은 존경을 무한정 허용했다. 회의론자,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인본주의자는 어디에 있는가?(그런데 왜 나는 그들이 교회 안에 있기를 기대해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 일어났을 때 왜 신자들은 나의 확고한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을까? 돌이켜 보면, 이 모든 세월을 통틀어 거리에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경우는 두어 차례밖에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버릴 때 나는 굉장히 놀랐다. 이제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지만, 그때에는 어떻게 하나님을 회피할 정도로 길을 잃을 수 있는지 당혹스러웠다. --- p.45-46
예수는 여전히 재림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최초의 기독교인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 세대는 자신들이 ‘말세’에 살고 있다고 늘 생각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태복음 16장 28절). 그는 또 “내가 속히 임하리니”라고 말했다(요한 계시록 3장 11절). 그러나 2천 년이라는 세월은 ‘속히’가 아니다. 나는 내가 믿었던 것이 무언가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을 - 설마 하면서도 - 서서히 알게 되었다. ‘아, 내가 이 점에서 성숙해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나는 이론적인 것에 경도되기 시작했다. 근본주의는 점점 더 작아지고, 복음주의는 더 온건해져 갔다. 나는 다양한 성격의 교회에 초대되어 설교하고 노래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대부분 복음주의적이었지만, 온건하고 진보적인 집회에서도 나는 음악을 연주했다. 나는 설교에서 지옥에 관한 것은 줄이고, 사랑에 관한 것은 더 많이 언급했다. 사후의 삶에 대해서는 더 적게 이야기하고, ‘이승’의 삶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했다. 나는 여전히 강하고 헌신적인 신앙인이었지만, 복음주의를 줄이고 ‘기독교인의 행보’에 대한 설교를 더 늘렸다. --- p.72 “당신은 언제 성숙해졌나요?”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전반적인 기간을 가리킬 수 있어도, 어떤 특정한 순간을 가리킬 수는 없다. ‘한 가지’만 있지 않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는 수없이 마음 아픈 실현의 순간들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의 무신론으로 인해 나타난 결과였지, 그것 때문에 무신론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말한 것은 1983년 여름이었다. 내가 말하기 전, 외로운 4, 5개월 동안 어느 누구도 이것을 알지 못했다. 뭔가를 예감하고 있던 친구 두 명과 아내가 수상쩍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꽤 성공한 목사직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관상으로는 거의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 p.78 근본주의를 버린 후에, 나는 내가 설교했던 것과 정반대의 것에 주목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이 인간의 가치와 깊게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의 사회에서 무신론자로 인정받고자 하는 충동(그리고 용기)을 가진 사람은 무언가 특별한 동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이런 것이리라. - 종교적인 부도덕에 대한 분노 - 미신적이고 반지성적인 것에 대한 혐오 - 기독교인의 위험한 편협성에 대한 두려움 - 진실한 연민을 방해하는 종교적 불화에 대한 불만족 - 교파의 편협으로 희생된 자들에 대한 동정 - 믿는 자들의 위선에 대한 격분 -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데 앞장서는 교회들에 대해 참을 수 없음 도덕적 동기가 무엇이든, 이것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주장을 거부하거나, 진실에 대한 이성적 접근이 아닌, 공정함과 동정심, 진실한 인간에 대한 사랑, ‘이 세상’에 대한 관심 등과 깊이 연관된 마음에서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 p.164 우주는 자연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법칙은 법칙 제정자가 있어야 한다. 우주에는 신성한 지배자가 있음이 틀림없다. 우주는 어떤 것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며, ‘복종하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규범적인 법칙과 서술적인 법칙은 서로 다르다. 자연법칙은 사회 법률과 마찬가지로 규범적인 지시가 아니라 다만 일반적으로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인간의 정의이다. 내가 연필에서 손을 뗄 때, 연필은 “오, 힘이 풀리고 나는 움직일 자유가 생겼다. 나는 지구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이 더 좋다. 혹은 나의 설계자와 함께 곤경에 처했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광자?若?“가속 페달로 쉽게 가라. 나는 빛의 속도보다 빠른 여행 티켓을 원치 않는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억제하지 않는다. 교통 법규와는 달리 자연법칙은 일어날 것 같은 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을 서술한다. 이 법칙들을 사용하여 우리는 예언할 수 있다. 그래서 물질이 자연의 질서에 따라 ‘행동’할 때, 이것은 마치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우리의 마음에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 p.1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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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속에서 신앙을 잃다
누군가 당신에게 다가와 속삭인다. “신을 믿습니까?” 과거의 당신이 머뭇거렸다면 이 책을 읽은 당신은 이제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을 수 있다. “신은 없습니다.” 이 책에 헌사를 바친 세계적인 석학 리처드 도킨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독자들에 대한 댄 바커 자신의 고해이다” 그렇다. 이 책 앞부분의 1/5 가량은 그가 결국 버려야만 했던 ‘신앙’에 그야말로 모든 걸 다 바쳤던 19년간의 세월을 술회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건 그가 신앙을 버리고도 마지막 2년여 동안 전과 다름없이 설교를 하러 다녔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에게 신앙은 절대적이었다. “당신은 혹시 전도를 하기 위해 4,300km를 한달음에 차를 몰고 간적이 있습니까?” 참고로 판문점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불과 460km밖에 되지 않는다. 댄 바커가 고백하는 이 시기의 여정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당시 그가 체험했던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자아가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이 여과 없이 전달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 중에 한때나마 독실했던 종교인이 있다면, 어찌 보면 그 2년은 오히려 짧을 수도 있겠다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 합리적인 이성, 그리고 자유 의지가 댄으로 하여금 신앙을 버리도록 했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 댄 바커에게 신앙을 버리도록 종용한 것은 신앙 그 자체였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댄 바커가 이 책의 대부분을 할애해가며 성경 속의 가르침, 칼람의 우주론적 증명, 지적 설계론, 창조 과학 등의 모순들에 대해 하나씩 열거해가며 논박해나가는 과정에선 연민마저 느껴진다. 게다가 한편으로는 19년간이나 그의 삶에 퇴적된 신앙의 흔적들은 유신론 특히 근본주의적 개신교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품안에서 안전핀이 사라져버린 수류탄처럼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가 헌사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모든 이성적 노력들이 유신론자들에게는 아무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의 실수는 모두가 명확히 알 수 있도록 그들에게 조용하고 합리적인 목소리로 말하고 그 명백함을 펼쳐 보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착각을 제거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스스로 근본주의의 사슬을 끊고 이것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한 지성으로 말해주는 이들이 더러 존재합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지적했듯이 변화는 이해와 관용에서 시작한다. 이런 사명을 짊어지고 나가기에는 댄 바커가 적임자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책은 그 결정체이라 감히 단언한다. NASA가 보내온 사진 한 장 이제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자. 우리는 월요일 아침 출근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돌진하는 지하철 역 입구에서, 아니면 지칠 대로 지쳐 가만히 서있기도 힘든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피켓을 들고 목청을 높이는 열렬한 전도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어느 승객의 스마트 폰의 액정에서는 미항공우주국(NASA)이 공개한 지구에서 몇 억 광년 떨어진 우주에서 일어나는 은하 간의 충돌 장면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속해 있는 태양계가 수천억 개쯤 모여 있다고 알려져 있는 이 은하 간의 충돌은 비록 4인치 액정 속에서 구현될 뿐이지만, 우주의 경이로움을 만끽하는 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한편 언제 어디서나 접속 가능한 인터넷에서는 무신론 및 종교를 표방하는 동호회 및 커뮤니티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으며, 여론의 바로미터로 자리 잡은 대형 포털 사이트의 게시판에는 배타적인 종교 행위에 염증을 느끼고 이를 조롱하는 글이 수도 없이 올라오고 있다. 또한 전 현직 목사들의 반성적 출간 역시 줄을 잇고 있다.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한용상, 해누리(김해석), 2001)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 (종교 믿음을 팔고 권력을 사다)』(김상구, 해피스토리, 2011) 『맞아 죽을 각오로 쓴 한국교회 비판』(조엘 박, 박스북스, 2008) 『진정 회개할 곳은 교회다(새로운 종교로 변해 가는 한국 개신교를 향한 쓴소리)』(권영진, 리북, 2010) 이런 책들은 비록 무신론적이진 않지만 우리 사회의 종교적 근본주의의 병리적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편 과학적인 측면에서 종교와 무신론의 궤적을 다룬 내용을 포함하는 책은 앞서 소개한 이 책에 찬사를 보낸 유명 인사들의 저서 외에도 거의 빠짐없이 번역서가 출간 되어 있으며, 아래와 같은 책 역시 종교와 무신론에 관한 내용을 짧지만 객관적으로 다루고 있다. 『지식의 대융합』(이인식(과학평론가), 고즈윈, 2008) 그리고 이를 뛰어넘어 30년 여를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살다 무신론자가 된 저자가 자신의 경험과 깨달음을 ?탕으로 성경을 비판한 서적도 속속 출간되고 있다. 『신 벗어던지기(교회에서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 성경공부)』(블루칼라, 미담사, 2010) 하지만 『왜 다윈이 중요한가』, 『진화경제학』 저자인 마이클 셔머가 말했듯이 우리 사회에서 무신론자들은 아직까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마지막 소수자들일 뿐이다. 이를 예감키라도 한 듯, 댄 바커는 『신은 없다』의 서문에서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적었다. “이 책이 종교가 있는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 저녁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방법을 찾고 있는 무신론자 또는 불가지론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도서출판 치우 역시 『신은 없다』를 읽는 모든 이들이 무신론자가 되길 바라지는 않는다. 단지, 그들의 가슴에 “모든 선택의 주인은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는 참된 진실의 씨앗이 뿌려지길 희망할 뿐이다. 아울러 이 책이 한국의 종교적 근본주의 진영에겐 쓰디쓴 제언으로, 그리고 오랜 세월 종교적 균형 지대를 희망했던 수많은 대중에겐 가뭄 끝의 단비 같은 도서로 자리매김하여, 언제고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서로의 의견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때가 오길 간절히 기원한다. 끝으로 『신은 없다』는 도서출판 치우의 과학자들의 욕망에 희생된 한 작은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언어의 기원과 소위 ‘인간 본성’의 궁극적 원천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지니』(2011)와 현대 사회보장정책이 드러내고 있는 난맥과 그 배경에 도사리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역사적으로 추적한 『왜 사회보장인가』(2011)에 이어 도서출판 치우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타가 될 또 하나의 양서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