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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중국 관료제의 분석 시각 사회주의·근대사·역사
1. 도입 2. ‘사회주의’의 관료제 3. ‘근대화’ 과정의 관료제 4. ‘역사’로서의 관료제 5. 결론 2장 건국기의 정치와 관료제 1. 도입 2. 재정경제위원회의 형성과 구조 3. 재정경제위원회의 인적 구성 4. 재정경제위원회의 정책과 기능 5. 중앙관료 기구의 문제점 6. 결론 3장 제1차 5개년계획기의 정치와 관료제 1. 도입 2. 제1차 5개년계획기의 소련 학습 3. 국가계획위원회의 형성과 발전 4. 국가계획위원회의 구조와 기능 5. 국가계획위원회의 인원 구성 6. 국가계획위원회의 구체적 활동 7. 국가계획위원회를 둘러싼 문제점 8. 결론 4장 대약진운동 시기의 정치와 관료제 1. 도입 2. 대약진운동이란 무엇인가? 3. 대약진운동의 형성 과정과 관료제 4. 대약진운동·인민공사의 전개와 관료제 5. 대약진운동의 좌절과 관료제 6. 결론 5장 경제 조정기·문화대혁명 초기의 정치와 관료제 1. 도입 2. 경제 조정과 관료제(1960~1962년) 1) 조정 정책의 개시와 발전 2) 중앙집권화와 당 지도의 강화 3) 국가계획위원회의 역할 확대 3. 정치적 급진화와 관료제(1962~1965년) 1) 마오쩌둥의 불만과 사회주의 교육 운동 2) 제3차 5개년계획을 둘러싼 논의와 국가계획위원회 3) 3선건설과 두 개의 국가계획위원회 4. 문화대혁명과 국가계획위원회(1965~1968년) 5. 결론 6장 문화대혁명 후기의 정치와 관료제 1. 도입 2. 정치체제의 군사화와 관료 조직(1969~1973년) 1) 린뱌오 사건 전후의 정치체제 2) 마오쩌둥의 상황 인식 3) 경제계획의 군사화와 분권화 4) 관료 조직의 동태: 국가계획위원회의 경우 3. 정치투쟁의 격화와 관료 조직(1973~1976년) 1) 저우언라이 주도하의 정치체제 2) 덩샤오핑 주도하의 정치체제 3) 관료 조직의 동태: 국가계획위원회의 경우 4. 3중전회를 향한 과정과 관료 조직(1976~1978년) 1) 과도기의 정치적 전개 2) 과도기의 정치체제와 관료제: 국가계획위원회를 중심으로 5.결론 7장 개혁·개방정책의 전개와 관료제 1. 도입 2. 경제체제 개혁과 국가계획위원회 1) 1979~1981년의 기능조정기 2) 1982~1984년의 권한을 둘러싼 논쟁기 3) 1985~1990년의 권한 저하 및 전면 개조의 시기 3. 정치체제 개혁과 국가계획위원회 1) 기구 개혁과 인원 문제 2) 당정 분리 3) 인사 문제 4) 관료주의 4. 결론 8장 개혁·개방 시대의 발전 전략과 정치체제 1. 도입 2. 근대화 구상과 정치체제의 정비(1979~1983년) 1) 마오쩌둥 시대의 정치체제 2) ‘4개 현대화’와 정치체제 3) 1980년대 초반의 기구 개혁과 정치체제 4) 정치체제 속의 군 3. 개혁·개방정책의 진전과 관료 체제(1984~1989년) 1) 경제개혁·대외 개방의 전개와 정치체제의 변화 2) 정치개혁 요구의 대두와 후야오방 사건 3) 제13차 당대회와 정치개혁 4) ‘신권위주의’와 천안문사건 4. 천안문사건 이후의 정치체제(1990년대 초반) 1) 소련·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와 중국의 정치체제 2) 덩샤오핑의 ‘남순강화’와 정치체제 3) 제14차 당대회와 정치체제 5. 결론 종장 계획경제의 종언과 관료제 1. 도입 2. 국가계획위원회의 영고성쇠 1) 제1기(1949~1957년): 경제 부흥에서 제1차 5개년계획까지 2) 제2기(1958~1978년): 대약진운동에서 문화대혁명까지 3) 제3기(1979~1997년): 개혁과 개방의 심화 3. 국가발전계획위원회 1) 1998년 기구 개혁 2) 국가발전계획위원회와 국가경제무역위원회 3) 개조의 정치 역학 4. 결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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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중국 국가계획위원회의 영고성쇠(榮枯盛衰)의 역사를 축으로 삼아 중국 관료제의 구조 및 기능의 동태를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중국의 관료제는 사실상 공산당 지배를 위한 도구였으며, 그 본질적 성격은 개혁·개방의 시대인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 공산당은 국가와 정부의 상위에 위치하는 지도 기관이며, 권력상에서도 우위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그 개인이 조직의 정점에서 군림하며 관료제를 정책 과정의 도구로 활용했기 때문에, 아직 형성 과정 중에 있던 관료 기구와 그 간부들은 마오쩌둥 개인의 독재적 권력 앞에서 무력화되었다. 요약하자면 그것은 ‘인치’의 관료제라 할 수 있다. --- p. 20 중국의 관료제를 정치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역시 ‘사회주의’의 정치체제를 토대로 삼고 있다. 1950년대에 형성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를 둔 전위로서의 공산당 지도에 의한 관료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기본 구조가 바뀌지 않고 있다. 이 부분에 손을 대지 않는 한, 아마도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체제 개혁은 불가능할 것이다. --- p. 47 이상으로 재경위의 인사 배치에 대해 검토했다. …… 여기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중국공산당 이외에도 민주 인사, 여러 지식인, 기업가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협력 체제는 신정권이 구상했던 ‘통일전선에 의한 연합정부’를 반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시기 중앙의 경제조직 인사, 특히 재경위를 통해서 보면 광범위한 인재를 추구했던 연합정부의 관료제라고도 부를 수 있는 중국적인 특수 형태가 여기에서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 p. 63 중국은 1·5계획기에 철저하게 소련형 사회주의 체제를 모방함으로써 일당 지배하의 정치체제를 확립했다. 그와 동시에 소련형 제도를 도입하는 한편으로 이를 실제로 운용할 때는 사회의 요구에 따라 당 중앙에서 그것을 ‘중국화’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중국의 관료제는 소련이라는 모델을 통해 그 골격을 형성시켰지만, 오히려 알맹이는 ‘중국적 특색’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 p. 84 그러나 이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은 심각한 당내 논쟁을 경험하는데, 루산을 무대로 1959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개최된 정치국확대회의와 중국공산당 8중전회에서 벌어진 이른바 펑더화이 사건이 그것이다. 이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루산 회의에서 국방부장인 펑더화이가 도를 넘은 대약진운동·인민공사의 심각한 문제점을 의견서로 정리해 마오쩌둥에게 제출했다가 마오쩌둥의 노여움을 사 여기에 동의했던 군 총참모장 황커청, 외교부 부부장 장원톈(張聞天), 후난성 당위원회 제1서기 저우샤오저우(周小舟) 등과 함께 8중전회에서 ‘반당(反黨) 집단’으로 몰려 모든 직무에서 해임된 사건이다. --- p. 138~139 중국은 대약진운동으로 황폐해진 국가를 바로세우고, 새로운 국가주석 류사오치를 중심으로 경제 조정 정책을 단행하며, 공산당의 지도를 강화하고 관료 조직을 재생시키는 등 정치체제의 정비에도 착수했다. 그렇지만 …… 마오쩌둥은 ‘관료주의’에 빠진 당을 재생하는 방법은 권력의 전환밖에 없다고 결단하고, 류사오치 등을 ‘실권파’로 규정한 뒤 문화대혁명을 발동하기에 이른다. 이런 과정을 거쳐 중국의 관료제는 또다시 한 인간에 의해 파괴된다. --- p. 150 이 시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잠재되어 있다. 그것은 애초에 ‘전기’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문혁이 왜 타성에 젖은 것처럼 1976년까지 계속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즉, ‘문혁 전기’에서 만들어진 산더미 같은 과제를 왜 ‘문혁 후기’에서 해결할 수 없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중국 정치의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역사의 악순환이 또다시 반복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금할 수 없다. --- p. 180 이와 같은 강권화 경향의 조류 속에서 1989년 4월 15일, 갑작스레 후야오방이 사망하고 뒤를 이어 천안문사건에 이르는 비극의 드라마가 막을 열었다. 당국은 후야오방의 명예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행동을 ‘동란’이라고 규정했는데,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단식투쟁에 돌입하고 이런 그들을 자오쯔양이 물밑에서 지지하게 되면서 시위는 단번에 100만 명 규모로 팽창했다.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는 이것에 위협을 느끼고 5월 20일에 베이징시 일부에 계엄령을 시행함으로써 학생을 견제했지만, 학생들의 저항 활동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6월 4일, 날이 채 밝기도 전부터 당국은 천안문 광장과 그 주변에 대한 진압 활동을 개시했고, 그 결과 학생과 군이 충돌하며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 p. 267~268 반복해서 말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경제개혁에 보조를 맞춘 정치개혁 도입의 필요성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폐해를 시정하는 가장 좋은 방책은 정치체제에 경쟁 원리, 즉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뿐이다. 민주화된 정치체제 아래에서만 특정 개인이나 정치집단에 좌우되지 않는 건전한 관료제를 육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그렇다. 민주주의의 규칙에 따라 약자에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자리와 권리를 부여하고, 동시에 정책의 투명성을 향상시킴으로써 부의 편중을 시정하는 길을 열며, 의회나 정권에 의해 형성된 정치적 합의에 기초해 적정 규모의 정부 아래에서 전문화되고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안정된 관료 기구가 이를 실행한다. 중국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이와 같은 평범한 프로세스인 것이다. --- p. 306~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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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성, 혹은 정체성
중국의 정치는 특이하다. 물론 다당제 국가의 눈으로 일당독재가 이루어지는 국가를 본다면 생소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중국 내 정치권력의 이질성은 단순히 체제의 차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 핵심에 언제나 한 개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사실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중국은 중국공산당의 통치를 받았다. 그들은 정치 조직은 물론이고 행정 조직과 경제 조직, 교육 조직에도 당원을 파견해 당이 국가의 모든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도록 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현시점에도 중국공산당에 의한 일당독재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중국공산당은 다시 한 권력자의 의지에 좌지우지되었다. 그의 이름은 마오쩌둥일 때도 있었고, 덩샤오핑일 때도 있었다. 공산당과 권력자 중 우위를 점했던 것은 언제나 권력자였다.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을 주창했을 때 중국공산당은 이를 막지 못했고, 그 결과 대참사가 벌어졌다. 마오 주석은 이 충격을 미처 수습하기도 전에 재차 문화대혁명을 추진했고, 그때 역시 공산당은 무력했다. 중국은 엄청난 국력을 잃었다. 중국은 중국공산당에 의해 일당독재가 이루어지는 공산국가이다. 그것이 중국의 정치성이다. 또한 중국은 카리스마적 개인의 의지에 따르는 ‘인치(人治)’의 국가이다. 그것이 중국의 정체성이다. 이 두 가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이래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았던 진실이다. 중국의 재건을 맡았던 관료제 역시 이 진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중국의 관료제 근대국가의 건설을 논의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관료제이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아우르는 국가를 건설하는 사업에서 관료제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관료제에는 문제가 있었다.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중국만의 고유한 특성인 인치였고, 또 하나는 관료제의 보편적 특성인 관료주의였다. 전자의 문제는 원래 정치로부터 독립되어 객관성을 지켜야 할 관료제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요동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가령 중국의 계획경제를 책임졌던 국가계획위원회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며 혼란스러웠던 중국의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일조했지만 이어지는 대약진운동 시기에는 정신주의의 광풍 속에서 터무니없는 경제 목표를 설정해 국가 파탄을 가속화했고,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반(反)엘리트주의라는 구호 아래 구성원 대부분이 하방(下放)되는 고초를 겪었다. 후자의 문제는 ‘번문욕례’라는 말로 표현되는 업무의 불합리성과 관료들의 부패를 야기했다. 이 같은 상황은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와 시너지를 일으켰다. 당의 간부들은 결재 절차를 늘리거나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업무 흐름에 제동을 걸고는 했고, 사업 인허가권을 무기 삼아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관료주의에 물든 관료제를 개혁하자는 목소리가 수차례 나왔지만 이미 기득권을 누리던 고위 간부들은 가지고 있는 것을 결코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중국의 현 국가주석인 시진핑이 아직까지도 부패와의 전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노라면 이 문제가 얼마나 근절하기 어려운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중국의 관료제는 먼 미래에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할까? 이 책의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두 가지 열쇠, 정치와 관료제 20년 동안 현대 중국의 관료제를 연구했던 일본방위대학교의 고쿠분 료세이 총장은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모아 ??현대 중국의 정치와 관료제??를 펴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앞서 언급한 국가계획위원회지만, 여기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70년 정치사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후의 혼란 속에서 경제 재건의 사명을 받고 탄생한 국가계획위원회와 이들 위에 군림했던 중국공산당, 그리고 이를 지배했던 권력자들이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윤무곡의 끝에는 우리 눈앞에 놓인 지금의 중국이 있다. 관료주의, 일당독재, 인치가 만연한 무대 위에서 국가계획위원회는 어떤 행보를 거쳤을까? 그러한 무대를 뒤에서 조종한 의지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방대한 참고 자료의 목록과 인물들의 정보, 각 역사적 국면에서 볼 수 있는 저자의 통찰은 20년의 연구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죽(竹)의 장막’이라 불릴 정도로 정보를 얻기 어려운 나라가 중국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수십 년 전의 조직도를 재현하고 이를 구성하는 인사들의 명단을 추려내는 저자의 묘기는 감탄을 자아낸다. 그것이 천부적인 재능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친 땀과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한 관료 조직의 탄생과 성장, 쇠락과 소멸의 역사가 이야기해주는 현대 중국의 격동기는 미래의 중국이 나아갈 길을 가늠하게 해주는 토대가 되어준다. 저자는 말한다. 중국의 정치가, 또 중국의 관료제가 지금 눈앞에 놓인 숱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면 이 나라는 한층 더 선진적인 국가가 될 것이라고. 그러나 해결하지 못한다면, 떠나는 민심을 잡지 못하고 부질없는 저항을 하다 결국 몰락하게 될 것이라고. 어느 쪽이든 현재의 상태가 유지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게 고쿠분 료세이의 주장이다. 이제 중국은 변화의 기로에 섰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에 따라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 전체가 큰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베일 속에 감춰졌던 중국의 실체를 알아가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때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