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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슬픔을 틀어쥔 왼손 6
Chapter 1 이름 없는 환자와 손이 차가운 간호사 12 Chapter 2 블루스타 26 Chapter 3 당신의 희망과 공포를 이해하는 누군가 60 Chapter 4 여섯 개의 영상 86 Chapter 5 블리자드 120 Chapter 6 Somewhere Only We Know 142 Chapter 7 우리의 미래 202 Chapter 8 남겨진 사람들 262 Chapter 9 녹색섬광 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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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하고 있니?”
희정이 물었다. “지금 윤이는 어떨까요?” “어떨 것 같아?” “추울 것 같아요.” 수인은 거침없이 고윤의 푸른 등 밑으로 손을 넣었다. “바닥이 너무 차갑잖아요.” 쏘아보는 수인의 눈빛에는 약간의 비난이 서려 있었다. 희정은 다음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윤이를 이대로 둘 순 없어요.” 그것은 수인의 의지인 동시에 희정을 향한 질문이었다. 수인은 희정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는 다 들었어요.”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사실이 희정의 입안에서 껄끄럽게 돌아다녔다. 고윤은 너를 매일 찾아와 네 곁에 머물렀어. 하지만 너는 5년 동안 코마 환자였잖아. “윤이가 와서 말해줬어요. 전부요.” 수인은 희정의 의문을 읽은 듯 대답했다. 그러고는 희정의 손을 잡고 고윤의 손 위에 올렸다. 세 사람의 손이 겹쳐졌다. 아랫배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간호복을 훑으며 올라왔다. 수인과 고윤의 손은 차디찼다. --- p.23~24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온몸이 찢기는 것 같다. 점점 더 비참한 감정 속으로 수인의 흰 단화가 빠져들었다. 더러운 진흙 같은 감정이 흰 단화와 면 조직 양말로 감싼 발목에서 찰랑였다. “그때마다 네가 와주었는데.” 수인의 혼잣말은 입김이 되어 차가운 고윤의 뺨에 가 닿았다. “내가 너무 늦게 깨어났지.” 생닭처럼 무력하게 누워 있는 내가 지르는 비명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어. 수인은 손을 뻗어 고윤의 왼 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네가 애타게 지르는 비명도 들어주지 않았어. 나는 전부 들었는데. “우리 용서하지 말자, 절대로.” --- p.34 죽음에서는 피 같기도 하고구토한 토사물 같기도 한 냄새가 난다. 나는 분명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존재가 만드는 냄새였지만, 그것은 생명의 냄새가 아니라 죽음의 냄새다. 차갑고 축축하고 어두운 그 냄새를 맡으면 이곳은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든다. 의식은 존재하는데 기억이나 정체성은 없는 의식. 의식은 점점 흐릿하고 희미해진다. 어서 빠져나가고 싶어. 하지만 어디로 간단 말인가? 절망 속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윤이의 손이 단호하게 내 손을 잡아끈다. 마치 내가 절망 속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 p.60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기적이 어디에도 없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수인에게는 더욱 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사가 기적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다는 것이 조금 어색하지만 너를 보면 물리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된단다. 물리학자도 기적이라는 말을 했는데 의사라고 못 할 이유가 없지.” 창가 옆에 서 있는 강철주의 허리 부분으로 오후의 햇살이 쏟아졌다. 햇살은 의사의 하얀 가운을 감귤 색으로 물들였다. 이 장면을 누군가 본다면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의사, 언제나 현장에서 만나길 원하는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룬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족들이 함께 저녁을 먹고 둘러 모여서 볼 저녁 뉴스에 나올 만한 감동적인 스토리. 주연은 물론 따뜻한 의사와 아름다운 소녀이고, 두말할 나위 없이 시청자들을 감동시킬 것이다. 하지만 승열은 자신을 포함한 열댓 명의 의사들이 그저 이 감동적인 스토리를 빛나게 하는 소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 p.72~73 꿈속에서 태양은 붉게 빛나지 않았다. 태양은 녹색으로 빛났다. 우리는 녹색으로 빛나는 태양을 나란히 서서 바라보았다. 윤이는 많은 것을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낯선 외국 작가의 이름이 윤이의 입에서 나왔다. 나는 낯선 그 이름을 입안에 넣고 굴렸다. 쥘 베른. 쥘 베른. “쥘 베른은 항해사이자 작가였어. 그도 우리가 본 녹색의 빛을 봤어. 그는 그 빛을 어떤 화가도 팔레트에서 찾아낼 수 없는 녹색이라고 했어. 천국에 녹색이 있다면 바로 저런 녹색일 거라고.” 아마 그 말이 맞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항해사이자 작가라면 세상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일 테니까.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그 빛은 헛된 기대와 거짓말을 사라지게 한다고, 그 빛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은 물론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도 읽을 수 있게 된다고 그는 말했어.” 나는 윤이의 손을 잡았다. “너와 이 바닷가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어. 여긴 천국일 테니까.” 윤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건 네가 사는 거야. 윤이의 생각이 단단히 잡은 우리의 손을 타고 나의 귓가까지 당도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언가를 내주는 동시에 무언가를 얻고 있었다. 윤이가 내 손을 놓았다. 그러자 내 몸이 둥실 떠올랐다. 윤이의 어깨를 지나 머리, 정수리보다 높이 올라갔다. 한참을 떠오르던 내 몸이 다시 땅을 향해 떨어졌다. 나는 눈이었다. 희미한 눈송이가 되어 떨어졌다. 그리고 바다로 떨어져 수면에 닿자마자 녹아버렸다. --- p.86 “형사님을 믿어도 돼요?” 시작은 무원이 아니라 수인이 했다. 형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수인은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한가롭게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실은 풍화되듯 깎여 나가 사라지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면 우리를 도와줄 거예요?” 우리. 소녀가 말하는 우리는 누구일까. “나는 네가 하는 말을 믿어도 되니?” 무원은 되물었다. “믿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지금까지 도움이 되는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테니까.” 무원은 허를 찔린 채 할 말을 잃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고윤이 자살한 지 일주일이 흘렀지만 고윤에 대해 새롭게 알아낸 것은 별로 없었다. 그저 몇 가지가 마음에 걸려 있을 뿐이다. 사망확인서를 작성한 순환기 내과 의사와 병원 주차장 아스팔트에서 빛나던 정체 모를 푸른빛, 그리고 여전히 찾을 수 없는 아이의 휴대폰 정도가 분리수거 되지 않는 쓰레기처럼 무원의 머릿속에서 각각의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인은 그 한복판에 서서 무원을 차갑게 응시했다. “형사님이 제대로 하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왜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어른들은 대부분 그러니까요. 알고도 안 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아요.” --- p.105~106 승열은 당직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흐릿하고 갈피를 잡지 못해 흔들리는 자신을. 블리자드가 몰아치는 것은 남극만이 아니었다. 승열의 마음속에서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블리자드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것이 승열을 암흑 속으로 이끌었다. 1년의 시간 동안 승열은 블리자드를 일시적으로 몰아내기 위해 술에 의존했다. 그리고 남극 장보고기지 월동대원 심사에서 번번이 탈락했다. 사유는 경미한 알코올 의존증이었다. 승열은 이곳을 떠나고 싶으면서도 결국 주저앉히는 자신의 나약함을 혐오했다. 수인은 그런 승열 앞에 어느 날 문득 나타났다. 파블로 네루다는 아기 펭귄의 눈망울을 두고 오래된 바다 같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몸 양옆에 붙은 작은 날개는 작고 단단한 노와 같다고 했다. 승열은 수인의 눈빛에서 바다를 갈구하는 작은 새를 보았다. 그리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그 몸으로 언젠가는 꼭 그녀가 바다에 갈 것이라는 것을 직감 했다. --- p.125 꿈에서는 나도 평범한 여중생이었다. 우리는 함께 바닷가에 서 있었다. 내가 윤이의 손을 먼저 잡을 때도 있었고, 윤이가 내 손을 먼저 잡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서로 끌어안고 서 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신경이 쓰였다. 내 작은 가슴과 너무 마른 몸이 마음에 걸렸다. 윤이가 알아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꿈에서도 간절하게 생각했다. “수인아, 지구의 하늘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이곳에 태어난 우리는 정말 행운아야.” 윤이의 말을 듣고 나니 내가 하는 걱정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 p.142 “전 여기서 뛰어내릴 수 없어요.” 노인의 손이 수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윤이는 어떻게 여기서 뛰어내렸을까요? 이렇게나 높은데.” 노인은 가만히 소녀의 말을 들었다. “내가 윤이 손을 붙잡아줬더라면 윤이가 여기서 뛰어내리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요.” 노인의 입에서 아주 작은 신음 소리가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지겹도록 똑같은 하루들이 끝없이 계속되었어요. 그러다가 꿈에 윤이가 나오면 그날은 정말로 기뻤어요. 윤이가 꿈에 나온 날은 전부 기억할 수 있어요. 5년 동안 침대에 누워만 있었던 내 말을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요.” 노인은 손녀보다 훨씬 어린, 어쩌면 갓 태어난 아기에 더 가까운 작은 여자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노인의 귓속으로 수인의 이야기가 계속 흘러 들어갔다. “윤이가 꿈에 나오면, 누군가 강제로 내 마음속 구멍에 처박아둔 나무토막 같은 걸 치운 것 같았어요. 그리고 나무 토막이 빠진 자리로 시원한 물이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노인은 짧디짧은 인생의 대부분을 외로움으로 보냈을 소녀의 마음을 가늠해보았다.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겠죠.” 수인의 꿈에 고윤이 나오는 날은 공교롭게도 고윤이 카르코바이오에 다녀온 날이었다. 그날 고윤은 수인의 곁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다. “윤이만 빼놓고 우린 전부 살아 있어요. 이건 불공평해요.” 수인의 말이 끝나는 동안 노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p.197~199 “어째서 이렇게 추운 걸까, 냉기가 몸을 파고들어서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난 꼼짝도 하지 않았겠죠.” 희정은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은 소아중환자실에 훈증 소독을 하는 날이었다. 방역 때문에 일시적으로 병동을 폐쇄하고 환자들을 다른 병실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몇 년째 코마 상태인 수인을 신경 쓰는 의료진은 없었다. 얇은 환자복 한 벌만을 입은 수인은 병동 복도에 방치되었다. 깨어날 가망 없는 환자에 대해 사람들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조만간 강제퇴원 조치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환자 보호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돌았다. 그때 희정은 이미 호스피스 병동에서 근무를 하고 있던 터라 나중에야 소아중환자실 간호사에게 그 사실을 들었다. 그런데 수인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 가해진 무성의하고 폭력적인 시간들과 자기보다 먼저 깨어난 운 좋은 아이가 털어놓은 충격적인 고백 전부를. 이 아이는 알면서도 내가 어떻게 할지 지켜보고 있었구나. “그렇게 다들 지켜만 보다가는 나중에 소중한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을 때 누구도 나서주지 않을 거예요. 언젠가는 그게 내 일이 되죠. 반드시.” --- p.215~216 나는 우리가 다른 곳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 여덟 명 모두가 너무 먼 곳에 흩어진 채 살고 있어서, 연락을 할 수도 없고 영원히 만날 수도 없는 곳에 점처럼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야 아무도 우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 어른이 되도록 해주지 못한 사람들을 영원히, 영원토록 미워하기로 했다. --- p.262 “남극에 여름이 오면 해가 20시간 동안 떠 있다고 해요. 밤은 고작 4시간밖에 되지 않아요.” 수인이 말했다. “20시간씩 깨어 있는 상태로 형사 일을 한다……. 그런 하루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한데.” 무원이 말했다. “그곳에 가서 살면 그동안 누워서 흘려보낸 날들을 조금은 채울 수 있지 않을까요?” 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해본 적이 없으니 그 줄에서 조금 전에 내려온 소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저 상상해볼 뿐이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곤충채집 당한 잠자리처럼 붙들린 채 누워 있는 상상을. “윤이는 겁쟁이가 아니에요. 두려워서 뛰어내린 게 아니니까요. 기억해달라고 뛰어내린 거예요.” 애써 냉담한 표정을 유지하던 수인의 얼굴이 조금씩 흔들렸다. “열다섯 살이 되면 뭘 해야 하는지 윤이에게 배우고 싶었어요.” 소녀가 자신에게 닥친 지독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기대’였다. 소년이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언젠가는 자신도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거라 바라고 기다렸다. 이야기 중에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소녀만의 상상으로 채워넣었다. 나중에 깨어나면 확인해볼 것들의 리스트가 점점 늘어났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고 싶지 괴롭고 힘들고 싶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누군가를 아프고 괴롭게 하는 일에는 절대 힘을 실어주면 안 돼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도와주는 거예요. 의사나 형사는 그런 힘이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수인의 말이 아프게 무원의 마음을 찔렀다. 열다섯 살의 소녀의 말은 단순했지만 그것은 진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진실. 하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진실. 수인의 동그란 이마에 푸른 핏줄이 비쳤다. 길고 긴 싸움을 끝낸 소녀는 조금 지쳐 보였다. --- p.303~304 “승열 선생님의 방에 붙어 있던 사진 속 바다는 정말 아름다웠어. 너도 보면 좋을 텐데. 정말 그런 곳이 있을까? 그 바닷가와 비슷한 곳을 찾아보고 있는데 모르겠어.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먼 곳이겠지?” 수인은 이제 자신의 병실 벽에 붙어 있는 남극의 바다를 떠올렸다. 그리고 꿈속에서 보았던 바다를 떠올렸다. 꿈속에서 우린 그저 평범한 열다섯이었다. 우리는 함께 해가 떨어지고 있는 수평선을 보았다. 수평선에 잠긴 해의 위쪽이 푸르게 빛났다. 우리는 그 녹색의 빛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난 정말로 궁금했어. 어째서 나였을까. 왜 하필이면 내가 살았을까. 나는…….” 고윤의 목소리가 잠기기 시작했다. 고윤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답을 자신의 안에서 구하려 했지만 남는 것은 마음속에 고여 있는 죄책감뿐이었다. “쓸모없는 기적이 아닐까. 나는 네가 어서 깨어났으면 좋겠어. 사람들이 널 버리려고 해. 아직 깨어나지 않은 너를 병원에서 내보낸다고 했어.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 전에 네가 먼저 깨어나야 해.” 수인 또한 그렇게 하고 싶었다. 빨리 깨어나서 함께 평범한 열다섯이 되었으면. “같이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어른이 되면 널 지켜주고 싶었어. 네가 내 옆에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나는 괜찮아.” --- p.311~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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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을 넘어가는 태양의 위 둘레가 녹색으로 빛나는 찰나,
생의 의미를 되찾기 위한 소년과 소녀의 싸움이 시작된다 시내에 위치한 세현병원. 한 열다섯 소년은 그 병원의 옥상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장소로 선택한다. 소년의 손목에는 자해흔이 가득했다. 다른 정황이 의심될 리 없는 죽음이었다. 그런데 그날, 마치 운명이 엇갈리듯 세현병원에서 코마상태에 빠졌던 한 소녀가 깨어난다. 소녀는 간호사에게 소년이 와서 모든 것을 말해줬다고 말한다. 코마상태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게 가능이나 할까? 게다가 소녀는 꿈속에서 소년과 대화를 나눴다는 얘기까지 했다. 누가 들어도 터무니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형사 무원은 점점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사라진 소년의 휴대폰, 담당의가 아닌데도 소년의 사망확인서를 작성한 의사……. 게다가 소년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증거가 담긴 6개의 동영상을 소녀의 담당 간호사에게 남겨두었다. 소년의 죽음은 단순한 자살이 아니다! 5년 전, 세현병원에서 시작된 끝없는 악연. 이들은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어른들은 대부분 그러니까요. 알고도 안 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아요.” 어른들이 입을 다문 세상을 용서하지도 가만히 있지도 않은 아이들의 이야기이자, 그런 어른만은 되고 싶지 않은 어른들의 이야기 태양이 지평선을 넘어가는 순간 태양의 윗가장자리가 녹색으로 보이는 현상을 ‘녹색섬광’이라고 한다. 천국에야 있을 법한 빛이자 헛된 기대와 거짓말을 사라지게 하는 빛. 소녀는 소년과 영원히 녹색섬광이 비치는 꿈속에서 존재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찰나의 빛에서 희망을 가지고 현실로 돌아오고, 침묵을 강요하던 어른들에게 스스로 말하고 저항하기 시작한다. 『녹색섬광』은 어른들이 입을 다문 세상을 용서하지도, 가만히 있지도 않은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또한 아이들을 외면하는 어른만은 되고 싶지 않은 어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도 타인의 목소리를 지울 권리는 없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치고 저항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삶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