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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기억전쟁
영동 고자리서 단양 느티마을 까지 도망가란 신호였는데... 남자는 결국 학살됐다 충북 보도연맹원 사건 희생자 이웅찬의 66년 전 그 날 “금단추 달린 코트 입고 피난... 그렇게 부자였는데” 조혜자의 겨울 난리 피난길 경험담 '대한민국 만세' 부르면 살려 주겠다던 국군, 하지만... 오창양곡창고 보도연맹사건 “머리 빡빡 깎인 채 광산에 끌려가 총살되었지” 영동군 보도연맹원들이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학살된 사연 수 백 구의 시신... 바짓단으로 남편 찾은 아내 “가매장한 곳에 괭이를 심어놨어요” 충주시 살미면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열여섯 살에 형 시신 수습, 충북 모스크바’의 참상 수리너머 고개에서 큰 형의 시신을 수습한 박헌영씨 사연 월북지식인과 같은 동네... 찍힌 이유였다 괴산군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사건’의 상흔 “이름만 같았을 뿐인데...” 억울하게 학살당한 오월성 충북 영동군 보도연맹원 학살 실태... 만삭 임신부 등 400여 명 숨져 총 8발 맞고 살아난 임산부, 국가는 보상하지 않았다 쌍수리 학살사건 생존자 강영애씨의 기구한 사연 “친정엄마가 찾으러 올 테니까 따로 묻어 주세요”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서 학살당한 보도연맹원 박정순씨 사연 “학살당한 동생들 시신, 낫으로 수습 했어요” 남로당 증평면 사건과 그 후 안덕벌이 과부촌이 된 사연 보도연맹사건, 두 지서장의 다른 선택 청주 강내지서장과 제천 한수지서장이 겪은 한국전쟁 영동의 의인, 가마니창고에 갇힌 50명 목숨을 구하다 충북 영동군 용산면 보도연맹원 50명 살린 김노헌씨 총살 직전 보도연맹원 40명 목숨 구한 시골 지서주임 충북 영동 용화면민들이 지서주임 공덕비 세운 사연 ‘충북의 쉰들러’ 남정식 지서장 공덕비는 왜 세워지지 못했나 의인 행적 기록한 대동청년단 내덕동 감찰부장 장기암과 전 영동경찰서 정보보안과장 이창세 한 노병의 참회 “죽기 전에 고백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전 6사단 헌병대 일등상사 김만식의 트라우마 탈출기 남들 황천길 보내놓고, 자기는 술판 벌여 충북보도연맹 간사장 신형식의 인생 역정(歷程) 1 “김일성장군” 실언해 감옥 간 신형식, 전향공작 앞장서다 충북보도연맹 간사장 신형식의 인생 역정(歷程) 2 시력 잃은 퇴직교수가 한국전 ‘민간인 학살’ 파헤치는 까닭 7살 신경득은 왜 야맹증을 앓았을까 일제와 싸웠던 의열단(義烈團)원의 유해, 60년 넘게 방치된 까닭, 의열단원 홍가륵의 삶과 죽음 책상을 손수 만들었던 아버지 땅 때문에 처남 팔 자르고 여동생 가족 몰살 충주시 엄정면 민간인학살 실태...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대한 대량 학살 빈번 매일 밤 지서 순경이 마을에 올라온 이유 한국전쟁기 충주시 엄정면에서 벌어진 ‘피의 제전’ 우익단체 활동한 19세 청년은 왜 ‘북한군 대위’가 됐나 영동군 민간인 307명이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사연 장손이라는 이유로 밀고 당해 부역혐의로 처형된 제천 덕산면 전이준 황간면의 저승사자는 완전범죄에 실패했다 부역자처벌에 앞장 선 황간면 대한청년단장 “군인 피하려고 딸들을 김칫독에 숨겼어요” 8사단 군인들이 충주 살미면에서 자행한 성폭행과 가축약탈 성폭행 당한 딸, 화병에 죽은 엄마... 모녀의 ‘비극’ 한국전쟁의 희생양이 된 여성들... ‘좋은 전쟁’은 없다 ‘얼음장 물고문’이 군인에게는 장난이었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했던 괴산 청천면 사람들의 한국전쟁 밟혀 죽고, 숨 막혀 죽고... 시신 가득했던 부역자 이송기차 부역자들이 부산행 기차와 부산형무소에서 죽은 사연 유해에 빨갱이 색깔을 덧씌운 지서장 빨갱이 소리 들으며 장례 치르고... 엄마 따라가겠다는 7살 딸 말렸는데, 마을에 폭격이 충북 영동군 제2의 노근리사건 피난민 수 백 명에 네이팜탄 폭격, 곡계굴의 비극 마지막 생존자 조봉원의 ‘단양곡계굴사건’ 증언 죽은 소 버리기 아까워 먹었다가 목숨을 잃었어요 충주와 단양 주민의 겨울 난리 체험기 청주형무소가 불타던 날, 놋그릇 덕에 살았다 문철근 옹이 말하는 1950년 청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20년 동안 경찰 감시’,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닥친 일 보도연맹원 사건으로 아버지 잃고 경찰 감시당한 박태용씨 사연 80대 노인이 일주일에 한 번 국회를 찾는 이유 이세찬 충북유족회 회장의 과거사법 투쟁기 괴산 장터에서 만난 사람 충북 영동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7명이 학살된 사연 영동군 황간면 김영옥 일가의 전쟁 피해 "퇴비장에 버려진 곰팡이 난 밥으로 목숨부지" 한국전쟁 고통으로 4번 자살기도를 한 서순남 보리쌀 두 되와 맞바꾼 목숨 청주형무소가 불타던 날 분터골, 싸리고개, 어서실에 울려 퍼진 총성!!!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 10년사 [상] 기억여행 10년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 10년사 [하] 2부 역사와 사건 History & Event Ⅰ. 한국전쟁과 충북지역 민간인학살 대한민국 정부 수립│국민보도연맹 결성과 운영 Ⅱ. 충북지역 사건유형별 민간인학살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청주형무소 재소자 학살│군에 의한 학살│보복학살│결론 Ⅲ. 충북지역 민간인학살 현황 사건유형별 학살 현황 국민보도연맹원 학살│부역혐의 학살│청주형무소 재소자 학살│6.25이전 학살 미군에 의한 학살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학살│보도연맹원 소집 후 풀려난 사건 Ⅲ. 피해자 명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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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배 사 들고 무덕전을 세 번 찾아간 이웅찬
한국전쟁 직후 충북화물자동차 기사였던 이웅찬은 청주시 수동 육군병원 뒤편에 있던 자취방에서 앰프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방송에서는 “보도연맹원들은 청주상과대학으로 모이라”는 목소리가 반복되었다. 점심을 먹은 후 청주상과대학 운동장으로 간 그는 잠시 후 청주경찰서 무덕전으로 이송되었다. 무덕전은 경찰들의 체력 단련장으로, 주로 유도를 배우던 곳이다. 무덕전에는 수 백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있었고, 이웅찬이 아는 얼굴도 더러 있었다. 평소 그를 알고 있던 경찰이 형사들과 수군거렸다. 그런 후에 경찰은 “웅찬이 자네, 담배 좀 사 갖고 오게!”라며 담배 값을 주었다. 사복형사와 이야기를 나눈 경찰은 상업학교 축구부 출신인 이웅찬을 알아보고 그를 살려 줄 셈으로 담배 심부름을 시킨 것이다. ‘내놓고 도망가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알아서 도망가겠지’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눈치를 채지 못한 그는 담배를 사 들고 다시 무덕전을 찾았다. 자신이 특별히 지은 죄도 없고, 죽으러 끌려 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이웅찬을 살려 주기 위한 경찰들의 노력도 집요했다.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이웅찬에게 담배심부름을 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웅찬은 담배를 사 갖고 무덕전으로 갔던 것이다. 결국 그는 후퇴하는 군·경에 의해 학살당했다. 대다수 보도연맹원들이 이웅찬처럼 순박했던 이들이고, 이들은 국가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 이름이 같아 학살된 오월성 닭이 울기도 전, 이른 새벽에 GMC 트럭에 탄 경찰들이 영동군 양강면 죽촌리 외함마을에 들이닥쳤다. 경찰들은 명부를 들고 다니며, 보도연맹원 이름을 불러댔다. 그런데 외함리에서 중대사고가 터졌다. 성을 부르지 않고 이름만 부른 것이다. “월성이 나와! 월성이!” 외함리 오월성은 이른 새벽에 영문도 모른 채 바지를 추어올리며 대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마을 고샅길을 뛰어 다니던 영동경찰들은 오월성을 붙잡아, 대기하고 있던 GMC 트럭에 실었다. 외함마을 보도연맹원들이 모두 붙잡히자 윗마을인 중함과 내함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보도연맹원들을 트럭에 태웠다. 트럭은 영동경찰서로 향했다. 1950년 7월 18일 해뜨기 전이었다. 영동경찰서 유치장과 마당에 구금되었던 오월성 일행은 포승줄과 광목천, 삐삐선으로 묵인 채 트럭에 실려 영동읍 부용리 어서실로 끌려갔다. 미리 파 있던 커다란 구덩이 앞에 일렬로 세워진 채로 영동경찰들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영동군 양강면 죽촌리 외함마을 오월성은 보도연맹원이 아니었다. 그런데 죽촌리 중함마을 이월성을 잡으러 간 경찰이 외함에서 성을 부르지 않고, “월성이” 이라고 이름만을 불렀기에 이런 사단이 발생한 것이다. * 일제와 싸웠던 의열단원의 유해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있다. 해방 직후 친일파청산이 좌절되고, 역대 정권에서 독립운동가가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음을 자조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 해괴한 경우가 있다. 약산 김원봉이 창설한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하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3년의 옥살이까지 한 독립운동가의 유해가 방치되고 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홍가륵(洪加勒)이다. 홍가륵은 1913년 10월 19일 경기도 수원군 음덕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1927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배재고보 시절 내내,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교장사택에서 심부름을 하는 등 고학으로 학교를 다녔다. 1932년 배재고보 졸업 후 대구사범을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는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1933년 봉천을 경유해, 상해로 갔다. 이곳에서 김원봉을 면접하고, 의열단에 가입한 후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교했다. 2기생으로 입학한 것이다. 2기생들은 정치교육, 정신교육, 군사교육을 받았는데, 군사교육의 역점은 법령·군사지식·정보·폭파·전술 등 각종 군사기능 숙련에 있었다. 홍가륵의 조부 홍승하(1863년생) 목사는 1903년에 하와이 이주 1세대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 이다. 안창호와 이상만보다 선배로 활동했던 이다. 홍가륵 부친 홍형준 목사도 일제강점말기 창씨개명을 반대해 충북 진천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홍가륵은 삼대(三代)째 독립운동을 한 이였지만, 해방 후 좌익으로 몰려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한국전쟁기에 학살당했다. 그런데 홍가륵의 유해는 청원군(현재의 청주시) 낭성면 호정리 도장골에 묻혀져 있다. 이 유해매장지에는 70여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방치되어 있는 현실이다. * 청주형무소가 불타던 날 언제 끌려 나갈지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순간 싸한 휘발유 냄새가 났다. ‘무슨 냄새지’라는 생각은 잠시, ‘이러다 불에 타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동료들과 함께 구사일생으로 감방을 뛰쳐나온 날은 1950년 9월 24일 경이었다. 추석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문철근이 청주형무소가 불타던 날의 상황에 대해 입을 열었다. 문철근은 해방 후 청주에서 치안대 활동을 했다면 혐의로 북한군이 점령시절, 반동으로 규정되어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다. 북한군과 지방좌익들은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던 우익인사들을 청주 당산에서 학살하다가 시간이 없자, 형무소에 휘발유를 뿌려 태워 죽이기로 결정했다. 1950년 9월 24~25 양일간에 당산에서 220명, 형무소에서 14명이 학살당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죽은 사람들이 있다. 청주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120 여명이 서문다리 아래에서 학살되었고,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갇혀 있던 95명의 우익인사가 산성리 토굴(민영은 묘지 아래쪽)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이념의 과잉시대에 사람목숨은 파리 목숨에 불과했다. 하지만 치안대활동을 한 것이, 구장(이장)과 대한청년단 활동을 한 것이 죽을 만큼의 죄를 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우익인사들을 집단학살한 사건은 국군수복 후 부역자들을 불법적으로 학살하고, 감금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불운한 역사의 반복이었다. 시대와 이념을 초월해 존중되어야 할 것은 인권 존중의 정신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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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2,578명 수록
민간인희생자 2,578명을 성별, 학살일시, 장소, 사건유형별로 정리했다.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가 만 5년간의 조사를 통해 충북지역 피해자 약 900명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했다. 2018년 현재 미신청인 약 1,600여명이 확인된 것이다. 이 책은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구성되면 충북지역 민간인희생자 조사에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다.. 『기억전쟁』 출판이 갖는 의미 충북지역 현대사 정리와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한 종합적인 정리뿐만 아니라 보도연맹사건, 형무소사건, 부역혐의사건 뿐만 아니라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학살사건까지 정리해, 보편적 인권에 근거한 국가폭력의 문제를 다루었다.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사건과 더불어 ‘충북의 쉰들러’를 깊게 다룸으로써 전쟁기 인간의 존엄과 의인의 참모습을 다루었으며, 향후 과거사법 개정이 이루어지면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구성될 것이다. 국가기관의 진실규명 사업이 진행될 때, 위 책은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