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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_고흐의 눈 · 고갱의 눈, 그들은 왜 탈진하도록 싸웠나?
제1부 만남과 이별 1. 아마추어 화가 2. 뒷골목의 화가 3. 첫 만남 4. 재회 5. 갈등 6. 이별 제2부 고흐의 눈, 고갱의 눈 1. 거리의 여인 vs 유한마담 2.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vs 버림받은 아이 3. 검은 옷의 여인 vs 부정한 여인 4. 수도승 vs 장 발장 5. 단골 술집 vs 악의 소굴 6. 아를의 여인 vs 뚜쟁이 여인 7. 흡혈귀 vs 돈벌레 8. 소크라테스 vs 술주정꾼 9. 마리아 vs 촌 아낙네 10. 시인 vs 사티로스 11. 고대 로마의 유적지 vs 더러운 남부의 구덩이 12. 붉은 포도밭 VS 인간의 고뇌 13. 미치광이 vs 음모가 14. 해바라기의 화가 vs 해바라기 그리는 고갱 15. 일본화 같이 그리고 싶다 vs 페루에서 온 일본인 16. 로맨티스트 vs 호색한 17 노동자화가 vs 귀족화가 18. 귀를 자른 고흐 vs 머리를 자른 고갱 19. 고흐의 무덤 vs 고갱의 무덤 20. 닥터 가셰 vs 타히티 여인들 제3부 모방과 표현 1. 모방에서 표현으로 2. 고흐와 고갱에서 추상미술까지 부 록 반 고흐 연표, 폴 고갱 연표 참고서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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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사람들은 선한 고흐, 악한 고갱이라는 말로 고흐와 고갱을 부른다. 선한 고흐, 악한 고갱은 1888년 11월, 고갱이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농담 삼아 한 말인데, 그 말이 백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고흐와 고갱을 구분할 때 사용하게 될 줄은 고갱도 몰랐을 것이다.
--- p.4 ‘서문’ 중에서 전도사직을 박탈당한 고흐는 평생의 희망이 좌절된 충격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집과의 연락을 끊은 고흐는 탄광촌에서 틈나는 대로 성경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그를 짓누르는 가장 큰 고통은 “뭔가 세상에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도사 일을 빼앗긴 지금 도대체 무슨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불현듯 고흐의 뇌리를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그에게 화가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림으로 그려 전하는 사람이었다. 1880년(27세), 보리나주 탄광촌에서 고흐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 p.18~19 ‘아마추어 화가’ 중에서 고흐는 행여 고갱이 노란 집에 실망해 빨리 떠날까 봐 노란 집의 내부를 장식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라마르틴 광장이 보이는 전망 좋은 방으로 고갱의 방을 배정하고, 바닥에는 고갱이 좋아할 고급스런 카펫을 깔았다. 최대한 그의 취향을 고려하여 고갱의 방을 장식하였다. --- p.45 ‘재회’ 중에서 어린 시절, 고갱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고갱의 어머니는 옷 수선 일을 하며 어린 고갱과 마리를 양육했다. 어려운 경제 환경과 생활환경으로 그는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 학교 성적은 엉망이었다. 고갱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려 하였지만 포기하고 선원이 되었다. --- p.87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VS 버림받은 아이’ 중에서 사람의 특성을 꿰뚫는 고갱의 예리한 눈은 지누가 숨기고자 하는 그의 정체를 예리하게 포착한 것이다. 지누가 이런 표정으로 고갱의 모델을 서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 지누의 이 표정은 고갱이 아를에 도착한 첫날, 지누에게서 받은 인상이었을 것이다. --- p.134 ‘흡혈귀 VS 돈벌레’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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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두 명의 무명화가,
세계 미술사를 바꾸다! -고흐와 고갱의 비슷한 꿈, 다른 생각 고흐와 고갱의 공동 작업은 무명의 가난한 아마추어 화가였던 두 사람이 각각 꿈꾸고 있던 ‘화가 공동체’에서 출발했다. 고흐의 화가 공동체는 화가들이 공동으로 작품을 제작하여 팔고, 그 수입금을 공동생활과 작업에 다시 사용하는 방법으로 원시 기독교 공동체와 비슷한 개념이었다. 반면, 고갱은 후원자로부터 기금을 후원받아 화랑을 세운 후, 화가들에게 작품을 기증받고, 기증한 작가는 무료로 화랑에서 전시 판매하는 상업적인 형태의 예술 공동체를 꿈꾸고 있었다. 이처럼 출발 지점부터 서로 달랐던 고흐와 고갱의 ‘화가 공동체’에 대한 꿈은 서로의 각기 다른 필요성 때문에 아를에서의 동거를 시작했다. 고흐에게는 자신의 꿈에 동참해줄 동지이자 동료인 고갱의 존재가 절실했다. 그러나 여관비를 내지 못해서 작품까지 압류당한 처지였던 고갱은 고흐 형제가 생활비를 지원해주고 자신의 작품까지 팔아주겠다는 약속 때문에 마지못해 고흐의 제안을 수락했을 뿐이었다. 고갱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고흐는 행여 고갱이 노란집에 실망해 빨리 떠날까 봐 노란집의 내부를 장식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라마르틴 광장이 보이는 전망 좋은 방으로 고갱의 방을 배정하고, 바닥에는 고갱이 좋아할 고급스런 카펫을 깔았다. 고갱을 고상한 시인이라고 생각한 고흐는 「시인의 정원 the Poet’s garden(1888)」 연작과 「해바라기」 그림들로 고갱의 방을 장식했다. -60일간의 동거, 파국으로 끝을 맺다 이런 고흐의 애정과 관심에도 불구하고 고갱은 아를에 도착한 지 채 며칠이 되지 않아서 고흐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너무나 다른 생활방식과 예술관으로 격렬하게 다투기 시작하였다. 공동생활이 2개월째로 접어들 무렵 두 사람의 불만은 폭발 직전까지 가게 된다. 1888년 12월, 고갱이 머지않아 아를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고흐는 불안감에 떨기 시작했다. 고흐의 정신분열증 증세가 나날이 악화되는 가운데 고흐와 같이 지내는 일은 고갱에게도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운명의 12월 23일, 고흐와 고갱이 공동 작업을 시작한 지 꼭 두 달째가 되던 날 밤, 고갱과 다툼이 있고 난 뒤 고흐는 면도칼로 자신의 왼쪽 귓불을 잘라냈다. 사건 다음 날, 고갱은 간단한 경찰의 조사를 받은 후 도망치듯 아를을 떠났고 고흐는 아를의 시립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이후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고흐와 고갱의 이별의 의미는 서로 달랐다. 고갱에게 고흐와의 이별은 단순한 헤어짐에 불과했다. 반면 고흐에게 고갱과의 이별은 그가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예술 공동체라는 꿈의 종말이었다. 고흐가 정신분열증 속에서 자신의 귀까지 자른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견디기 힘들었던 고갱과의 이별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고흐의 ‘눈’ vs 고갱의 ‘눈’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이 파국을 맞은 가장 큰 이유는 전혀 다른 성장 배경에 의해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완벽하게 달랐던 두 사람의 성격과 세계관의 차이에 있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전도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고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가난 때문에 매춘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거리의 여성 시엔과 사랑에 빠지고 그를 돌보았다. 반면 아버지 없이 페루에서 자랐던 고갱은 후견인의 도움으로 베르탕 은행에 취직한 뒤 중산층 출신 덴마크 여성 소피 가트와 결혼해 전형적인 부르주아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이 같은 출신 성분과 자라난 환경, 타고난 성격의 차이로 인해서 고흐와 고갱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극명하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공동작업을 시작했지만 두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완전히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고흐에게 유일한 친구인 조셉 룰랭과 술을 즐겨 마시던 아를의 ‘밤의 카페’는 자신이 쉴 수 있는 단골 카페였다. 그러나 고갱의 눈에 비친 ‘밤의 카페’는 술꾼과 접대부들로 가득한 ‘악의 소굴’에 불과했다. 밤의 카페를 운영하는 지누 부인은 고흐에게는 지혜롭고 교양있는 중년 여인으로 보였지만 고갱에게는 술꾼들의 피를 빠는 뚜쟁이로 보였을 뿐이었다. 아를 역에서 근무하던 집배원으로 고흐의 둘도 없는 친구였던 조셉 룰랭에 대한 평가도 극명하게 달랐다. 고흐에겐 자신을 포함해 가족 전부가 기꺼이 자신의 모델이 되어주었던 조셉 룰랭은 책임감 있는 이상적인 아버지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이었다. 반면 고갱의 눈에 비친 룰랭은 카페에서 밤새 술이나 마시는 술주정뱅이에 불과했다. 생활방식도 두 사람은 확연하게 달랐다. 수도승처럼 검소했던 고흐는 거울이 자신이 소유한 최고의 물건일 정도로 늘 가난하게 살았다. 최고의 사치가 담배였고 군화 같은 작업용 신발만을 신고 다닐 정도로 가난했던 고흐는 늘 농민 화가를 꿈꿨으며 자신을 “그림을 그리는 노동자”라고 생각했다. 그런 고흐의 취미는 독서, 편지쓰기, 논쟁, 산보였다. 그러나 “예술은 원래 귀족주의일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했고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실직하기 전까지 부유한 중산층으로 살았던 고갱의 취미는 악기 연주, 펜싱, 시 낭송과 같은 귀족적인 것들이었다. 이처럼 전혀 다른 ‘눈’을 가진 고흐와 고갱의 작품은 당시 기성의 미술 화풍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비슷했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미치다 고흐와 고갱의 공동 작업은 비극적인 결말로 끝났지만, 둘의 예술세계와 그들의 작품 이라는 세계 미술사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고갱은 그들의 공동 작업에 대해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작업을 하였다. 우리는 분명 모종의 결실을 거두었다”고 말했다. 고흐는 고갱의 상징주의 예술관을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그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자신의 예술관을 확고하게 굳힐 수 있었다. 고갱이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고흐에게는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고갱이 아를에 도착하기 전, 고흐는 고갱을 기다리며 「해바라기」를 비롯하여 「화가의 침실」, 「시인의 정원」과 같은 걸작들을 그려냈다. 고흐는 고갱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고 정말 열심히 그렸고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또 고흐는 고갱의 영향으로 기억과 상상력에 의존해 그리는 방법을 배웠다. 고갱은 애써 고흐의 영향을 부인했지만, 고흐에게서 감정을 담아 강렬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발견하였으며, 자신의 상징주의 예술관을 굳건히 다지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아울러 이들의 공동 작업은 19세기 후반, 사진의 출현으로 위기에 빠진 미술을 구하고 20세기 현대미술의 길을 닦는데도 영향을 미친다. 고흐와 고갱의 예술은 1905년 야수파(Fauvism), 1910년 표현주의( Expressionism), 1916년 다다이즘(Dadaism), 1925년 초현실주의(Surrealism), 그리고 최종적으로 비기하학적 추상미술(Non Geometrical Abstract Art)인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의 탄생에 기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