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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새로운 출발점에 서서
제1부 어린 시절 쌍둥이 / 시골마을 / 시골쥐 / ‘장원’ / 광주상고 시절 제2부 시대의 아픔을 안고 대학 진학 / 1980년 서울의 봄 / 5?17쿠데타와 광주5?18 / 남영동 대공분실 / 첫 번째 감옥 생활 / 죄지은 자식 / 민청련 / YMCA 앞 시위 / 강릉교도소 / 결혼 / 성남 민청련 / 첫아이 / 연변에서 온 편지 / 무산된 성묘 / 여강출판사 / 두 후배의 죽음 / 국회의원 보좌관 / 29년 만의 무죄 판결 제3부 청와대 시절 스승 / 6가지 배움 / 청와대 / 김 대통령과의 인연 / 청와대 생활 / 2000년 남북정상회담 / 공보기획비서관 / 어머니가 돌아가시다 /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 제4부 마지막 비서관 전직 대통령 비서관 / 2004년 동교동 풍경 / 김 대통령의 두 차례 입원 / 방북 실무대표 / 김 대통령과 전남대 강연 / 13일간의 미국 방문 / 2008년 퇴임 6년차 / “생시인가, 악몽인가” /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 마지막 연설 / “담벼락에 욕이라도 하라” / 입원 / 37일간의 세브란스 입원 / 병원에 찾아온 사람들 / 현대사 특강 / 운명의 날 /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다” / 김대중 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호소 / 『김대중 자서전』 후기 자전 에세이를 마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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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이제 정치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경제적, 생태적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민주주의 이름으로 정의가 훼손되거나, 부정의가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정의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우리 시대의 정의는 모두가 골고루 함께 잘 사는 것이다.
어머니는 밖으로 나가려는 아들을 주방의 식칼을 들이대며 ‘엄마를 먼저 죽이고 가라’며 막아섰다. 아버지는 아들을 광주에서 도피시키기 위해 밀짚모자를 씌우고 당신 양복을 입혀 변장을 시켜 농로를 따라 걸어 안전한 시 외곽으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욕설을 해대며 때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취조가 시작됐다. 주로 이선근 등 선배들 이름을 말하며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처음에는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또 몽둥이찜질이 시작됐다. 평생에 그렇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대통령은 침묵을 지켰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열린우리당에서도 구애의 손길이 뻗쳐왔지만 어느 한쪽으로도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거기에는 두 당 모두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민주당은 대북송금 특검을 막지 못했고, 열린우리당은 민주당을 깨고 나왔다. 한편으로는 두 당은 대통령에게는 하나는 형이고, 하나는 아우인 형제당이었다. 둘 다 자기 자식들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일부 참모들은 참여정부(노무현 정부)는 국민의 정부(김대중 정부)의 업적과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국민적 열망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박지원 비서실장과 협의를 거쳐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과 나를 남측 실무대표로 지명하고 북측과 협의하도록 했다.……김 대통령이 나를 실무대표의 한 사람으로 지명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김 대통령의 측근으로 대외발표를 담당하고 있는 나를 직접 보냄으로써 북측에 당신의 방북 의지를 분명히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인터뷰에 배석하고 있는 내 휴대폰으로 ‘노무현 대통령 서거’ 속보가 문자로 날아왔다. 기자들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전화가 쉴 새 없이 걸려왔다. 인터뷰가 끝나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가 확인되었다고 말씀드리자 김 대통령은 한참동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나서 김 대통령은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이 준비한 추도사의 내용은 이러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노무현 당신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서 민주주의 위기, 경제 위기, 남북관계 위기, 이 3대 위기를 헤쳐나가는 데 힘이 되어주십시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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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 최경환의 자전 에세이
어린 시절 하고 싶었던 야구를 관두며 좌절감에 방황하던 소년, 장학퀴즈에서 우승을 거듭하며 장원에 올랐던 모범생, 세상의 부당함에 분노하고 함께 싸우는 동료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던 운동권 청년, 국회의원 보좌관에서 청와대에 들어간 후 세계적인 민주주의 지도자 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이 되어 임종을 지키기까지. 이 책에서 최경환은 [어린 시절], [시대의 아픔을 안고], [청와대 시절], [마지막 비서관] 등 모두 4부에 걸쳐 자신의 인생의 모든 순간들을 『배움의 시간』이라는 제목 아래 담담하게 그려놓았다. 언론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김 대통령의 퇴임 후 활동과 임종 직전의 모습이나 최루가스 연기를 마시며 결혼식을 올려야 했던 80년대의 이야기들은 웃을 수는 없으나 놓칠 수는 없는 이 책의 재미 중 하나이다. 또한 단지 비서관과 대통령의 사이를 넘어 김 대통령을 ‘스승’이라 생각하며 정치 철학과 사상은 물론 삶의 자세를 배우려 했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김 대통령 서거 후 『김대중 리더십』의 출간과 ‘행동하는 양심’의 결성은 김대중 전도사로서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민주화운동 15년, 국정에 참여한 15년, 30년 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부딪치고 고민한 최경환이 지금껏 걸어온 배움의 시간들을 돌아보며, 앞으로 걸어갈 배움의 시간들을 다지며 그 마음을 이 책에 담았다. 김대중 대통령을 ‘스승’으로 모셨던 행복한 시간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들과 간담회를 하다가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 천재인줄 알았는데 정책의 천재더라. 뭘 해보려고 하면 김 대통령이 먼저 시작했거나 이미 제시했던 내용이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김 대통령이 재임 기간 중에 이룬 IMF 외환위기 극복, 남북관계 개선, 민주주의 제도 정착, 인권위원회 설립, 사회복지 기본망 구축, 사형 집행 폐지 등 뚜렷한 업적들은 평생에 걸친 독서와 사색을 통해 담금질된 것이다. 이런 김대중 대통령을 ‘스승’으로 7년을 모실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큰 행운이다. 최경환은 김 대통령 퇴임 후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행운에 감사하고, 그 배움의 기회가 다시 올 수 없다는 것을 아쉬워한다. 김 대통령에게서 배운 소중한 6가지 김 대통령은 살아있는 한국 현대사 그 자체였다. “김 대통령의 저술과 연설문을 읽고, 국내외 언론과의 인터뷰 내용을 가까이서 보고 듣고, 행사와 면담에 배석하며 보고 듣는 것 자체가 학습이고 훈련이었다. 공보비서관으로서 김 대통령의 말씀을 받아쓰는 것은 학습의 과정이었다.”(134쪽) 한적한 토요일이면 사저 응접실에서 정치, 인생, 종교, 역사, 인물, 문학 등 다양한 주제로 김 대통령의 말씀을 듣는 것은 행복한 ‘토요강의’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김 대통령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 삶에서 보여준 자세였다. 저자는 이것을 용기, 실사구시의 정신, 노력, 가족, 신앙, 감성의 6가지로 정리해 말한다. 쌍둥이 형과의 우애와 감사 최경환은 딸 셋 있는 집에 쌍둥이로 태어났다. 5분 먼저 세상에 나온 쌍둥이 형과는 중학교만 다르고 초등학교, 고교를 같이 다녔다. 5분 차이가 날 뿐 사주가 똑같은 형제는 인생행로가 너무 달랐다. 쌍둥이 형은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경환의 뒷바라지까지 가장 노릇을 맡아 했다. 경환이 운동권 생활을 할 때 용돈을 챙겨주는 등 늘 이해하고 격려해주었다. 경환은 이런 5분차 형을 존경하며 자랑스럽게 여긴다. 쌍둥이 형을 통해 가족에 대한 책임과 형제간의 우애를 늘 되새긴다. 80년대 민주화 투쟁 속에서 몸으로 익힌 희생정신 대학시절의 꿈은 신문기자였다. 그러나 힘들게 들어간 대학신문사를 일주일 만에 그만둔다. 80년 서울의 봄, 학내 민주화운동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고향 광주에서 일어난 5.18민주화운동은 그를 투사의 길로 운명적으로 몰아간다. 1981년 6월 ‘학림사건’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무수히 매를 맞고, 첫 감옥살이를 한다. 출소 후 경환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에 참가한다. “민청련은 조직의 상징으로 두꺼비를 내세웠다. 두꺼비는 알을 품고 뱀을 찾아 나서 뱀의 성질을 돋우어 스스로 잡혀 먹힌다. 뱀에 잡혀 먹힌 두꺼비는 죽지만 두꺼비 몸속의 알은 뱀을 자양분으로 부화해 새끼들로 살아난다. 이렇게 민청련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먹이가 되기를 자처했고, 민청련이 수많은 새끼를 낳아 결국 민주화를 이룰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런 민청련이 좋았다.” (81~82쪽) 86년 5월 5.18 6주년을 맞아 종로 2가 YMCA 앞에서 ‘광주학살원흉 처단 국민대회’를 주동해 두 번째 감옥에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