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한국 그림의 전통]을 내며
Ⅰ 총론편 1. 한국 회화의 전통 1) 머리말 : 전통의 의의 2) 전통회화의 변천 가. 삼국시대 및 남북조(통일신라, 발해)시대 나. 고려시대 다. 조선시대 3) 전통회화의 시련 4) 전통회화의 현황과 방향 5) 맺음말 2. 한국의 회화와 미의식 1) 머리말 2) 한국미에 관한 제설(諸說)의 검토 3) 선사시대의 선각화(線刻畵)와 미의식 가. 신석기시대의 선각화와 미의식 나. 청동기시대의 선각화와 미의식 4) 삼국시대 및 남북조(통일신라, 발해)시대의 회화와 미의식 가. 고구려의 회화와 미의식 나. 백제의 회화와 미의식 다. 신라의 회화와 미의식 라. 통일신라 및 발해의 회화와 미의식 5) 고려시대의 회화와 미의식 6) 조선시대의 회화와 미의식 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회화관 나. 조선시대의 회화와 미의식 7) 맺음말 Ⅱ 산수화편 1. 한국 산수화의 발달 1) 머리말 2) 삼국시대 및 남북조(통일신라, 발해)시대의 산수화 가. 고구려의 산수화 나. 백제의 산수화 다. 신라의 산수화 라. 통일신라 및 발해의 산수화 3) 고려시대의 산수화 4) 조선 초기의 산수화 5) 조선 중기의 산수화 6) 조선 후기의 산수화 7) 조선 말기의 산수화 8) 맺음말 2. 한국 남종산수화의 변천 1) 머리말 2) 남종화의 개념 3) 남종화의 동전(東傳)과 수용 가. 고려시대 나. 조선 초기 다. 조선 중기 4) 남종화의 정착과 유행 가. 조선 후기 나. 조선 말기 5) 맺음말 Ⅲ 풍속화편 1. 한국의 문인계회와 계회도 1) 머리말 285 2) 고려시대의 문인계회와 계회도 3) 조선시대의 문인계회와 계회도 가. 조선시대의 문인계회 나. 조선시대 계회도의 변천 4) 맺음말 2. 한국 풍속화의 발달 1) 머리말 321 2) 조선시대 이전의 풍속화 가. 청동기시대 나. 삼국시대 및 남북조시대 다. 고려시대 3) 조선시대 전반기의 풍속화 4) 조선시대 후반기의 풍속화 가. 조선 후기(약 1700~약 1850)의 풍속화 김홍도 이전의 풍속화 김홍도 이후의 풍속화 나. 조선 말기(약 1850~1910)의 풍속화 5) 맺음말 Ⅳ 회화교섭편 1. 한국 회화사상 중국 회화의 의의 1) 머리말 2) 한국회화의 원류(原流)로서의 중국회화는 어떠한 미술인가 가. 일반적 측면 나. 정신적(사상적) 측면 다. 기법적 측면 3) 한국인들은 중국회화를 어떻게 수용(受容)하였나 4) 한국인들은 중국회화를 수용하여 무엇을 이루었나 5) 맺음말 2. 한, 일 회화관계 1500년 1) 머리말 2) 삼국시대~고려시대 회화의 일본과의 관계 가. 삼국시대 나. 남북조시대 및 고려시대 3) 조선시대 회화의 일본과의 관계 가. 임진왜란 이전 나. 임진왜란 이후 4) 맺음말 [한, 일 회화관계 참고문헌 약목] [통신사일람] [통신사왕래약도] Ⅴ 부록 미개척 분야와의 씨름 ― 나의 한국회화사 연구 도판목록 참고문헌 찾아보기 |
안휘준의 다른 상품
|
한국미술의 역사는 신석기시대부터만 따져도 7~8천 년이 넘고, 또 그것은 시대의 변천과 분야 또는 지역의 특수성에 따라 끊임없이 그리고 다양하게 발전하거나 변화해 왔다. 그러므로 종횡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다양한 양상을 하나로 묶어서 명쾌한 단정을 내리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오직 근사한 접근을 시도하고 이해하는 수밖에는 없을 듯하다. 그리고 한국미술 자체를 하나로 포괄해서 보기보다는 시대, 분야, 지역 등으로 좀더 나누어서 보는 것이 보다 근사치에 접근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시대, 분야, 지역 간의 차이라는 것을 크게 확대해서 보면 서로 대체적인 연관이 있음은 물론이지만 작게 쪼개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좀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 p.44
저자의 견해로는 야나기가 주장한 ‘애상의 미’나 ‘비애의 미’라는 설은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수긍하기 어렵다고 보며, 따라서 그의 설을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여 한국의 미를 ‘비애의 미’ 또는 ‘적조미’로 정의한 고유섭 선생의 설도 이제는 재고를 요한다고 본다. 야나기는 조선시대의 도자기나 목공품을 논하면서 그것들을 만든 것은 자연이라는 불가사의한 큰 힘으로 간주할 뿐 실제로 그것들을 만든 장인들의 창의성이나 개성을 소홀히 보는 결과를 낳았는데 이것을 그냥 받아들인 것도 역시 수긍하기 어렵다. 자연은 사람에 의해서 반영되고 대표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견해를 토대로 한 고유섭 선생의 ‘무관심성’ ‘무계획성’ ‘무기교의 기교’ 등의 설명도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도대체 관심이 주어지지 않고 이루어진 미술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물론 그것이 오직 상대적인 정의라 할지라도 한국미술의 전반적인 특질을 잘 정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차라리 자질구레한 세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대체를 구한다는 의미에서 ‘대범성’이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또 고유섭 선생의 그러한 정의들은 한국미술 전체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조선시대의 미술, 그중에서도 민예적인 미술에 중점을 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만약 이것들을 한국미술에 관한 통시대적, 범분야적인 의미로 파악한다면 한국미술을 진정하게 이해하는 데에 도달하기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앞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이제 한국미술 전체를 굳이 한두 마디의 어휘로 정의를 시도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시대별, 지역별, 분야별 등으로 나누어 좀더 구체적으로 특성을 찾아보고 그에 수반된 미의식을 알아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 pp.55-56 그런데 한국에서의 중국회화의 수용과 연관해서 한 가지 큰 오해가 자리를 잡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한국이 중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으므로 중국회화와 미술이 한국으로 저절로 흘러들어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정말로 잘못된 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역사시대에 접어들면서 국가 대 국가로 존재하였고, 양국 사이에는 철통 같은 국경이 설정되어 있었으며, 양국 간의 내왕은 철저하게 통제되었었다. 국가의 공식적인 허가가 없이는 양국 간의 왕래도 어려웠다. 그러므로 지리적 인접성만 가지고 중국회화가 아무 때나 아무런 통제나 견제 없이 자유롭게 한국에 들어오고 또 들어온 것들이 무조건 수용되었으리라고 보는 것은 양국 간의 역사적 상황을 전혀 모를 때의 막연한 억측에 불과한 것이라 하겠다. 지리적으로 아무리 가까워도 국가 간의 문화적 교류는 무한히 소원할 수 있고 또 반대로 지리적으로 아무리 멀어도 문화적으로 지극히 긴밀할 수 있다는 사실은 현대의 남한과 북한,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통해서 너무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옛날이라고 국가 간의 관계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 pp.422-423 미술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복합적 성격과 특성들 중에서 역사학적 측면에서 각별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모든 미술작품은 다소간을 막론하고 기록성과 사료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기록을 목적으로 제작된 의궤도나 각종 기록화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의 고분벽화, 고려시대의 불교회화에 보이는 세속 인물들과 건물의 모습을 그린 부분들, 조선왕조시대의 풍속화, 각 시대의 초상화 등은 기록성, 사료성, 시대성 등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그림들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 해당되는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대단히 큰 지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문헌기록만으로는 그림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생생하고 입체적인 파악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옛날 중국의 문인들이 “시보다는 산문이, 산문보다는 그늸이 더 구체적이다”라고 한 얘기는 언제나 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비단 이러한 그림들만이 아니라 순수한 감상을 위한 그림들도 기록성과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심지어 유치원의 어린이가 엄마의 모습을 그린 그림조차도 그 엄마의 머리 매무새, 화장법, 옷차림 등을 드러냄과 동시에 어린이의 심리상태와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된 재료 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약간의 사료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림이 단순히 감상의 대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미술사가에게는 모든 미술작품이 문자에 의한 기록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료인 것입니다. --- pp.528-529 --- pp.528-529 |
|
한국미술사의 어제와 오늘, 안휘준
한국에서 미술사, 특히 한국미술사의 역사는 길게 잡아도 백 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미술사의 인기는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가면서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미술사라는 낯선 학문을 안착시키고, 근대 서구 회화에 길들여진 우리의 눈을 근대 이전의 회화에까지 확장시켜, 한국미술을 눈여겨볼 만한 대상으로 만들었던 여러 학자들의 숨은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중적 관심이 과연 생겨날 수 있었을까? 성과가 눈에 띄지 않아 단박에 인정받기 어렵지만,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자료와 그림과 문헌 속에서 묵묵히 그 길을 걸어온 이가 있다. 한국미술사를 이야기하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름, 안휘준.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은 한국미술사 베스트셀러들도 그가 닦아놓은 기초에 많은 부분 의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그림의 전통》은 한국에 없던 ‘한국회화사’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만들고 기틀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듬직하게 역할을 수행했던 안휘준의 1988년작 《한국회화의 전통》을 재편집한 결과물이다. 노학자는 지난 30여 년 사이에 새롭게 발견된 내용들을 추가하고, 색인을 보강하고 참고문헌 목록을 새로 만들고 작품을 컬러화하는 등의 작업을 첫 책을 내는 열정으로 꼼꼼하게 진행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내용의 흐름과 방향은 바뀌지 않았다. 저자가 세워놓은 한국회화사의 기틀이 아직도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휘준의 불끈한 기운이 느껴지는 책 원래 고고인류학을 전공하려던 청년 안휘준은 미술사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 당시 미술사라는 학문은 한국에 없는 학문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대학에는 미술사학과가 따로 없었고, 고고인류학과 안에 몇 개의 미술사 과목이 있었을 뿐이었다. 심지어 연구할 대상인 회화는 전하는 수도 적고 보존상태도 좋지 않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작품 대부분 조선시대 것들이었고, 일제강점기의 ‘조선/유교 망국론’ 아래 오랫동안 평가 절하되어왔다. 일본의 어용학자 세키노 타다시(1867-1935)가 한국 미술을 ‘발생기(상대)-융성기(통일신라)-전성기(고려)-쇠퇴기(조선)’로 구분하고, 한국에서 빛나는 문화유산은 통일신라를 중심으로 한 과거의 것이며 조선시대 이후로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 통설로 받아들여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안휘준은 1967년, 스승들의 권유로 고고인류학에서 미술사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모험에 가까운 외국 유학길에 오른다. 하지만 한국에도 없는 한국미술사가 하버드에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모험과 도전은 계속되었고, 근대적 미술사 방법론을 배워 한국미술에 접목시켜 독학으로 한국미술사를 써나갔다. 마침내 그는 한국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첫 번째 사람이 된다. 한국회화사가 쓰이는 과정, 《한국 그림의 전통》 안휘준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한국회화사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70-80년대, 당시 역사학계의 화두는 ‘식민사관의 청산’이었고 한국미술사학도 같은 고민을 하게 된다. 한국미술을 일본 어용학자들의 눈이 아닌, ‘우리의 눈’으로 다시 보아야 한다는 요구에 따라 그간 외면당해온 조선시대 회화가 재조명받았고, 특히 조선 후기 풍속화와 진경산수화를 ‘근대적 주체성’의 발현으로 보는 관점이 힘을 얻기도 했다. 안휘준 역시 식민사관의 청산에 관한 한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쓴 〈한국의 회화와 미의식〉이라는 글에는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류의 한국미론에 대한 준열한 비판이 들어 있다. 미술품 수장가이자 민예학자였던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식민지 조선과 조선인들을 ‘가엾게’ 여기며 조선의 미술에서 ‘한 서린 슬픔’을 발견했다. “말하자면 빈약한 반도의 자연과 참혹한 역사 때문에 한국인들은 필연적으로 슬픔에 찌든 미를 창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한국 그림의 전통》, 48쪽) 이후 야나기 무네요시의 관점에 따라 많은 한국 학자들도 한국 미술에서 슬픔이나 한을 읽어내려 했다. 하지만 안휘준은 이것이 한국의 미술작품 중 지극히 협소한 범위, 즉 야나기가 애호한 일부 도자기류에 한정된 주장인 데다가, 자연 조건이 미의식을 결정짓는다고 보는 것은 근거가 빈약함을 지적한다. 안휘준의 한국회화사 연구는 조선의 패배주의적 민족성이 식민지배를 자초했다고 보는 식민사관을 실제 미술사료에 입각하여 하나씩 무너뜨리는 데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개인적인 감상에 치우치지도 않고 현학적인 풍모를 과시하지도 않는 한국회화사의 실용적인 개설서 우리의 눈과 우리의 관점에서 한국회화사를 쓰기 시작한 안휘준은 이제 개설의 정도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지금도 서점에 나가보면 한국회화사 개설서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책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어떤 책들은 유명 작품을 몇 가지 고르고, 거기에 주관에 가까운 개인적 감상과 지나치게 현학적인 지적 과시로 ‘개설’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 책 《한국 그림의 전통》을 통해 안휘준은 잘못된 개설에서 감상과 현학을 빼고 연구와 검증을 넣는다. 대표적으로 겸재 정선의 예를 들어보자.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산천을 조선인의 눈으로 직접 보고 그린 주체적 회화’, 전에 없던 새로운 화법의 그림으로 이야기된다. 문제는 정선과 그의 진경산수화에 대한 평가가 점점 더 객관의 단계를 넘어 신격화의 수준에 이른다는 점이다. 하지만 진경산수화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화법도 아니고, ‘천재 화가’ 정선이 불현듯 영감을 받아 창안해낸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정선은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개자원화전》 등 중국 화보들을 통해 남종산수화 기법을 익힐 수 있었고, 그의 진경산수화풍은 이를 체화하고 변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한국 그림의 전통》, 246-252쪽 참조). 1988년에 세상에 나왔지만 2012년에도 여전히 필요한 한국회화사 텍스트 《한국 그림의 전통》은 한국회화사를 정확하고 정제된 눈으로 바라보려 한 책이다. 그 출발점에는 식민사관의 청산이라는 문제의식이 있었고, 이후 저자는 실제 작품에 근거한 실증적 연구로 야나기류의 심정적인 한국미론을 무너뜨려나가는 한편, 시대와 지역이 다른 작품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회화사를 형성해왔는지 기나긴 흐름을 추적했기 때문이다. 《한국 그림의 전통》은 또한 한국회화사 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신석기시대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필견’으로 선택한 그림을 한데 모아놓았다는 점만으로도 곁에 두고 볼 이유가 있다. 저자가 손수 엄선한 회화작품들을 보는 것은 그가 수십 년간 훈련을 거듭해온 감식안과 역사관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평생을 한국회화사 연구에 바쳐온 전문가의 식견이 담긴 컬렉션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2012년 개정신판에서는 한국회화사를 공부하려는 초심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장치들을 보너스로 제공한다. 크게는 지난 30여 년간 새로 발견된 연구성과들을 꼼꼼하게 보완한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2011년 동산방화랑의 전시를 통해 조선 후기 화가 김창수와 김수철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저자는 이 같은 최신 연구성과까지 섭렵하여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자 노력했다(《한국 그림의 전통》, 29쪽 참조). 여기에 각주나 추기(부록의 참고문헌 목록, 1천여 개가 넘는 색인 항목은 관련 주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방대한 읽을거리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이정표 역할을 충실히 해준다. 어떻게 본다면 미술작품을 하나의 ‘사료’로 대하며, 작품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찾기보다 과연 무엇이 보이는지를 샅샅이 훑고 정직하게 기록하는 태도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일 것이다. 《한국 그림의 전통》을 읽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한국회화사 연구의 소중한 역사가 된 안휘준을 다시 읽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