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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김남주 시인 주요 연보제1부 격동기의 삶인간은 시대의 산물이다그래 그랬었다, 그는고등학교를 자퇴하다실망과 좌절의 세월『함성』과 『고발』시인으로 등단하다전사가 되다감옥이라는 학교5?18 광주민중항쟁출옥과 결혼붉은 새는 숲을 떠난다제2부 투쟁의 무기민족시인과 민중시인자유민주주의의 허상유물론과 관념론종교의 본질누구를 위한 예술인가?“나는 투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조국은 하나다세계의 민중문학욕의 미학자주·민주·통일마지막 한 사람맺음말미주이 책에 인용된 김남주 저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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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大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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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고 있다 또한 이 길의 어제와 오늘을이 길을 걷다가 쓰러진 다리와 부러진 팔과 교살당한 모가지를고문으로 구부러진 손가락과 비수에 찔린 등과 뜬 눈의 죽음을그들은 지금 공비와 폭도와 역적의 누명을 쓰고 능지처참으로 쓰러져 있다.아무도 그들을 일으켜 세워 자유와 조국의 이름으로 노래하지 못한다해와 달과 조국의 별이 밝혀야 한다 밤이 울고 있다나는 또한 알고 있다 내가 걷는 이 길의 오늘과 내일을”―「길」 부분칫솔을 갈아 우유갑에 시를 새기며 독재와 폭력에 맞서 싸운 시인 김남주먼저 1부에서는 김남주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한다. 김남주는 가난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창시절에는 미국식 교육과 입시 위주의 교육에 반발하여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중퇴했다. 민주화 투쟁을 위해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해 3선 개헌과 유신 헌법에 반대하여 『함성』이라는 지하신문을 펴내어 1973년 수배되기도 했다. 피신하는 와중에도 그는 『함성』지의 이름을 『고발』로 바꿔 전국에 배포하려 했지만 곧 체포되었다. 이때 받은 고문으로 인해 육체적 고통 앞에서 스스로 한없이 나약해졌던 체험을 「진혼가」에 자조적으로 고백하기도 했다. 이 시와 더불어 「잿더미」라는 시가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실렸고 이후 본격적으로 문인이자 저항시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한때 광주에서 민중문화연구소와 해남농민회를 결성하는 등 지역 활동을 활발히 하기도 했다. 1978년에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하 남민전)’을 결성하여 조직 신문인 『민중의소리』를 펴냈다. 남민전 전위대 활동으로 체포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면서도 독서와 독학을 하며 투쟁 준비를 계속했다. 그에게 시는 투쟁의 무기였고 시를 계속 쓸 수 있는 토양은 민중의 삶이었다. 감옥 안에서는 종이와 연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칫솔 끝을 뾰족하게 갈아 우유갑에 시를 썼고 이를 교도관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내보냈다.2부에서는 투쟁의 무기가 되었던 김남주의 작품을 다수 살펴보며 그의 예술관과 세계관을 해설한다. 김남주는 자유를 존중하고 진리를 숭상했으며 보편적으로 귀하게 여겨야 할 가치들이 이 땅에 실현되기를 바랐다. 돈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으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사라지는 세상을 염원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억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실현하기 위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동경했다. 이런 김남주에게 이상과 현실은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는 현실과 타협하고 입 닫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에 저항하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악에 반하여 행동하지 않는 것을 그에 동조하는 것이라 여기고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저항할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민중에게 요구했다. 남민전을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민중의 애환을 담은 작품을 썼을 뿐 아니라 루카치, 네루다, 브레히트, 푸시킨, 오도옙스키 등 유물론적이고 계급적인 관점에서 세계와 인간관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글들을 번역하고 책으로 엮어 널리 배포하며 독재에 항거했다. 옥중에서도 그는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한 편의 글이 독재정권의 총칼보다 무섭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변화는 시작되었지만 아직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4?19 혁명, 5?18 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 항쟁,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그리고 이름만 4대강으로 바꾼 대운하 사업. 우리는 분노했고 맞서 투쟁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기지 못했다. 2016년, 국정농단사태로 인해 광장에 사람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134일간 20회에 걸쳐 누적인원 1,600만 명이 광장을 찾았다.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 다시 불리기 시작했다. 김남주가 세상을 떠난 지 어언 20여 년이 흘렀고 이 땅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아직도 그가 이루고자 했던 세상은 온전히 오지 못했다. 여전히 우리는 이 거대한 자본주의적 구조와 친일 잔재들 속에서 노예처럼 소외당하고 착취당하며 살고 있다. 변화는 시작되었지만 아직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을지언정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하며 저항했던 김남주의 말처럼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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