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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3
무궁화 15 부록 작품 해제 3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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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는 세상 물정을 몰라. 미국 유학생은 정부 요인의 자식들이라도 좀처럼 뽑히기가 어렵잖아. 나처럼 반역자의 자식이…… 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어. 이 나라는 정치가 너무 많이 노출돼있어. 하나에서 열까지 정치에 줄이 닿아 있어. 시시각각 뒤처지는 것만 같아서 안절부절 못하겠어. 학교가 세워지고 훌륭한 교사들이 갖춰져 하루종일 24시간 내내 머리에 집어넣어도 다 못 집어넣을 만큼 배우겠다, 어느 나라 학생에도 지지 않겠다, 그런 희망이 있어도 언제 누구한테 배우냐구. --- p.53
영희는 겨자색 군복 모조품 상의에 같은 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흰색 완장에는 여성동맹이라고 쓰여 있다. 옥희는 놀랐다. 얘는 이런 차림을 하고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네. 어떤 것에도 주눅 든 기색 없이, 장교인지 뭔지가 된 것처럼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하게 다가오는 영희에게 옥희는 기가 죽었다. 그리고 영희의 얼굴이, 약간 평평한 얼굴과 딱 벌어진 어깨가 남장에 어울리게 생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튀어나온 엉덩이에 긴 허리 같은 것이 좀 봐주기 어려웠다. --- p.153 사랑채 쪽에 치안대 사무소가 생겼다. 한 개 소대 정도의 병력이 상시 주둔한다든가 해서 사랑채 쪽이 갑자기 떠들썩하게 되었다. 옥희는 방심은 금물이라고 생각해 오빠의 바지에 작업복 상의를 빌려 입고 남장을 했다. 얼굴을 더럽게 하고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중문은 빗장을 확실히 걸고 사랑채 쪽으로 통하는 툇마루 모퉁이를 식기 선반과 궤짝을 운반해 와 막았다. 소위가 한 명, 일등병사가 한 명, 나머지는 병졸이 몇 명 있었는데 자기들이 밥을 해먹었다. 그렇지만 때때로 중문을 두드리고는 하녀를 불러내어 된장과 간장을 달라고 졸랐다. --- p.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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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과 냉전, 그리고 이중적 글쓰기
한국문학사에서 장혁주(1905~1998)는 그다지 명예로운 이름이 아니다. 1940년대 전반 그의 전시 협력물도 비판의 대상이지만 더 문제적인 것은 해방 이후 일본 국적 취득(1952)과 일관된 ‘일본어 글쓰기’이다. 한국어로 쓰인 작품들을 연구한다는 한국문학사의 ‘자명한’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일본어 텍스트들은 작가의 친일 전력을 비판할 때를 제외하고는 진지한 연구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계에서는 이중언어(bilingual) 세대 작가의 창작이라는 입장에서 장혁주 문학을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장혁주는 김사량(1914~1950)과 같은 본격적인 이중언어 세대보다 앞 세대로 사실상 이중언어 세대 작가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동일한 이중언어 작가이면서도 민족적 저항의 이름으로 종군하여 한국전쟁 중에 일찍 생을 마감한 김사량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장혁주의 일본어 글쓰기에 대한 평가가 쉽게 바뀌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장혁주의 일본어 텍스트, 특히 해방 이후 일본어 텍스트를 조금 다른 맥락 속에 놓아보면 어떨까. 더 이상 제국이 아닌 장소에서 계속해서 마이너리티로 살아가야 했던 구(舊) 식민지인들의 삶과 언어라는 맥락 속에서라면, 그의 소설은 문학사뿐만 아니라 사회사적으로도 다시 한 번 살펴볼 만한 기록이 분명하다. 실제로 장혁주의 일본어 글쓰기나 귀화라는 선택은 장기간 식민 통치를 겪은 민족의 경우라면, 그 수가 많든 적든 나타날 개연성이 높은 유형이다. 특별히 작가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살던 땅에 계속 남기를 원한 이들에게 귀화라는 생존 방식이 하나의 선택지였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중적 글쓰기는 두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냉전 시대에 민감한 사안을 객관적으로 그릴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번역된 『아, 조선(嗚呼朝鮮)』(1952)과 『무궁화(無窮花)』(1954)는 모두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이다. 이 두 작품에서 장혁주는 당대의 한국소설에서는 다루기 어려웠던 소재―이를테면, 이승만 정부에 의한 양민 학살 사건, 부정 사건 등을 자세히 묘사한다. 당시 남한에서는 보도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사건들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어로 쓰였기에 당국의 검열을 피해 한국전쟁의 실상을 고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방기 남북협상파 정치가 일가의 몰락-『무궁화』 『아, 조선』 이후 2년 후에 발표된 『무궁화』(1954)는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된 한(韓)민족의 비참이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탐구한 소설적 시도이다. 미국과 소련의 글로벌한 세력 다툼이라는 외부적인 요인 이외에, 장혁주가 찾아낸 해답은 바로 해방 이후 조선의 정치 난맥상이었다. 특히, 그는 해방 이후 조선의 정치 실패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 바로 ‘남북협상파’(당대에는 ‘중간파’, ‘협상파’로도 불린)의 몰락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무궁화』는 남북협상파 정치가인 김명인 일가의 돌이킬 수 없는 몰락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북 분리가 민족의 비극’이라는 것, ‘남북 각각의 배후에 있는 2대 세력을 배제하고 민족 자체의 힘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당시 남북협상파의 주장은 대다수 조선인들의 상식이나 희망과 일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정 수립 직후 정권의 대대적인 정치적 전향과 숙청 작업의 대상이었다. 남북협상파 인사들이 사람들의 시야에서 하나 둘씩 점점 사라지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부 권위에 편승했던 세력이 남과 북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 상황이야말로 장혁주가 『무궁화』를 통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동족끼리의 전쟁을 야기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인 셈이다. 주로 중도자유주의 정도의 성향을 보인 남북협상파가 1950년대 한국소설에서 거의 등장조차 할 수 없었던 한국문학사의 사정을 환기해보자. 비록 몰락하는 과정을 그렸다 할지라도, 남북협상파를 이 정도로나마 재현해낼 수 있었던 것은 장혁주의 창작 언어가 일본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를 비추는 낯선 거울, 이중적 글쓰기 전후의 가장 명민했던 시인 중 한 사람인 김수영도 개인의 가장 내밀한 생각을 적는 일기를 일본어로 썼을 만큼 일본어의 영향력은 당시 한국의 문인들에게 광범위하고 일반적이었다. 한국어로 사유하고, 사유한 언어 그대로 창작하는 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최근의 일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중언어 세대 작가와 그들의 글쓰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들의 존재는 식민지라는 것, 식민지인으로 살아간다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동시에 한국 근대문학의 출발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혼종적’이라는 사실도 새삼 자각하게 만든다. 한편, 1950년대 일본어로 쓰인 장혁주의 이 작품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전쟁의 재현 관습을 상대화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중 가장 큰 사상자를 남긴 미군의 공습이 기존 한국소설에서 의외로 과소 재현되었다면, 두 소설에서 공중 폭격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자세하고 세세하게 묘사된다.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비유했던 하이데거 식으로 말한다면, 일본어에 존재를 의탁했던 작가의 시선은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낯설게 응시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