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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총대주교청 인증서 4
한국어판 저자 서문 5 Ⅰ 역사적 전망들 정교회와 세계 총대주교청 11 Ⅱ 찬양과 공간 예술, 건축, 그리고 전례 37 Ⅲ 신학의 은사 기초적 원리와 관점들 61 Ⅳ 사랑의 소명 선택과 소명으로서의 수도 생활 89 Ⅴ 영성과 성사들 기도와 영적 삶 113 Ⅵ 피조세계의 경이로움 종교와 생태학 133 Ⅶ 신앙과 자유 양심과 인권 173 Ⅷ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1.사회적 정의 : 가난과 세계화 205 2.종교와 사회 : 근본주의와 인종주의 241 3.전쟁과 평화 : 갈등과 대화 285 후기 우리 안에 있는 희망 319 추천사 만남의 신비와 희망의 영성 327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지금까지 살아 온 길 353 참고 문헌 381 |
Patriarch Bartholomew I ,세계총대주교
그레고리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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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 교부들과 교회 저술가들의 전통에 따르면, 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공부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그것은 성 삼위 하느님에 대한 공부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하느님의 본질에 관한 지식의 단순한 축적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올바르고 선한 삶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과의 인격적 만남이다. 정교회에서 신앙은 과거로부터 전해진 가르침 혹은 전통들의 총합이 아니라, 사랑이 충만한 인격적 만남이요, 인격적 하느님과의 인격적 신뢰의 관계이다. (p70)
심지어 교회의 교리들조차도 진리의 충만을 다 헤아렸다고, 또 정확히 규정했다고 장담하지 않는다. 교리들은, 그 밖으로 나가면 위험해질 수 있는 경계선 혹은 안내선을 표시하는 표지들이고, 신성한 빛에 대한 어떤 하나의 지식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일뿐이다. 정교회 전례가 그렇게 선언하듯, 우리는 부활을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부활을 보았고, 참 빛을 보았다.”21 비록 ‘신조’(Credo)라는 이름으로 잘못 알려져 왔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 요약은 사실 ‘신앙의 상징’(Symbol of Faith)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어떤 신학적 주장의 목록도 우리가 가진 신앙을 다 포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p83) 이렇게 금식을 통해 우리는 “땅은 주님의 것”(시편 24:1)이지, 우리에게 속한 것도, 착취할 것도, 소비할 것도, 통제할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땅은 언제나 타인과의 친교 안에서 공유되어야 하고 감사를 통해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것이다. 금식은 포기하는 것만 아니라 오히려 주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분리가 아니라 만남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이웃과 세상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원하셨던 바, 세상에 관한 본래의 시선을 회복하는 것이고,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것은 탐욕과 강제로부터의 해방의 의미를 제공한다. 실제로 금식은 이기적 욕망과 뻔뻔한 낭비에 기초한 우리 문화를 효과적으로 바로잡는다. (p127) 오늘날 이 시대에 자유에 대해 논할 때, 습관적으로 우리는 어떤 것들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무제한의 가능성을 상상하곤 한다. 간단하게 현대적 사고에서 자유는 선택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교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정의는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지상의 모든 것과 모든 활동 중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영적인 시각으로 볼 때 타락과 죄와 사멸의 현실로 젖어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자유는 제한된 선택지 앞에 선 확실성과 미결정 사이의 단순한 차이 그 이상의 무엇이다. 이것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심리학적 자유가 초점으로 삼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심리학적 자유란 인간의 나약함을 강화시키고 인간의 마음을 지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영적 관심은 이보다 더 심오한 무엇을 향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 타락의 결과들 혹은 인간 실존의 허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싸움이다. (p177)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기억한다. 그것은 생과 사의 주관자이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 심판의 척도가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복음서 이야기가 말하는 심판의 척도가 추상적이거나 자의적이지 않음을 확인하는 것은 얼마나 충격적인가. 우리의 책임, 아니 우리의 소명은, 세상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작은 지역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만남들 속에서, 우리의 행위가 미치는 영향력의 범위 안에서, 치유와 변화의 효과를 내는 것이다. (p239) 우리 세상에서 대화와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따라야 할 것으로 이미 확립되어 버린 규범적이고 방어적인 방법들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킬 것을 요청한다. 그것은 우리 마음과 우리 사회 속에 깊이 심겨진 가치들, 우리의 세계관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나 우리의 삶의 방식을 위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결정해버렸던 그 가치들을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영적 의미에서의 변화만이 폭력과 불의의 악순환을 깨뜨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왜냐하면 전쟁과 평화는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는 서로 모순되는 방법과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이것은 평화를 이루는 일이 개인적이고 제도적인 선택의 문제요, 또한 개인적이고 제도적인 변화의 문제임을 의미한다. (p286) ‘기쁨어린 슬픔’은 아마도 정교회 영성과, 예술, 건축, 음악 등 비잔틴 미학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세상을 가득 채운 어둠과 하느님의 빛을 화해시키기 위해 투쟁했던 성인들의 삶의 본질적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때로는 우리를 짓누르곤 하는 현실 앞에서, 그것은 희망의 징표, 낙관주의의 상징, 위로의 원천이다. ‘기쁨어린 슬픔’이라는 이 개념은 또한 현재까지도 힘겹고 암울한 시기를 거치며 싸우고 있는 세계총대주교청의 역사에서도 가장 특징적이고 규정적인 요소이다. 단 한 번도 세상적인 권력을 가진 세상적인 기관으로 자신을 증거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언제나 파나르(콘스탄티노플)의 세계총대주교청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 약함을 통해서 힘을 발견했다. 실제로 세계총대주교청은 그 자체로서, 세속 국가의 형태를 수용함으로써 세상 권력처럼 조직된 모든 종교 제도에 대한 하나의 비판이다. 결국 그러한 개념은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마르코 12:17)을 혼동시키는 데로 이끌기 때문이다. (p323)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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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치,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신비
단 하나의 중심 주제가,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가 이 책에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연결시킨다. 인간의 가치에 대한 그의 강조가 바로 그것이다. 첫 장에서부터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유일무이하게 창조된 각 인격은 하나의 신비일 뿐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존재다.” 미국에서 열린 환경 회의에서 강연할 때, 그는 매우 특색 있는 방식으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관계된, 정교 그리스도교의 세 가지 주요한 힘들”을 구별하면서, 그는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첫 번째 힘은 인간을 하나의 인격으로 이해하는 정교회의 개념이다. 우리에게, 인격성은 하나의 존재론적 범주다. 이 신학 사상은, 하느님을 성 삼위 하느님으로, 위격들 간의 친교로 이해하는 우리 전통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하느님의 살아있는 이콘, 인격의 본성적 특징은 자유 자유 없이는 진정한 인격도 없음을 확신하면서,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는 “자유로울 때만 진정 나는 한 인격일 수 있다”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자유는 나뉠 수 없다. 나의 자유를 지키는 것은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과 함께 가야만 한다. 자유를 위한 투쟁은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 억압받는 자들, 배척당한 자들, 차별과 남용의 모든 희생자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싸움을 의미한다. 이것 역시 총대주교에게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이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까?”(I 고린토 12:26) 내 형제는 나의 생명이다 “각각의 인간 존재가 다 우리의 이웃이다.” 이 책의 독자들은 바르톨로메오스가 ‘관계’, ‘만남’, ‘친교’, ‘나눔’, ‘대화’와 같은 단어들을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그 밖의 유사한 단어들과 더불어 이 용어들은 이 책 전체에 두루 등장하면서 하나의 통일된 관점을 제공해주는, 황금색 실과도 같다. 인격들로서 우리는 “만남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한다. 기도는 하나의 “관계의 말”이다. 우리의 기도는 그 성격으로 볼 때, “대화 같은” 것이다. 그 목적이 단지 말하는 것에만 있지 않고 또한 듣는 것에도 있기 때문이다. 금식을 통해 육체는 인격적으로 되어간다. 금식하는 것은 육체적 필연성들, 먹고 마시는 본성적 욕구를 “나눔의 신비”로 변화시키기 때 문이다. 사실 교회의 모든 성사는 하느님과만 아니라 나머지 모든 사람과의 친교와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세계총대주교는 자신의 결정을 다른 정교회에 강요하거나, 명령하거나 강제하려 하지 않고, 요청이 없는 한 내부의 일들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의 사명은 주재하고, 주창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그는 제안하지만 강요하지도 강제하지도 않는다. 프랑스의 정교회 사상가 올리비에 클레망이 표현한 것처럼, “불러 모으는 것은 이 교회다. 하지만 이 교회는 항상 다른 정교회들과의 충만한 일치와 의견타진을 통해서, 이 ‘불러 모으는 사명’을 감당한다.” 가교자(架橋者) 나는 “대화”야말로 오늘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정교회들, 다양한 그리스도교 교파들, 다양한 종교 공동체들, 시민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 그리고 세계화된 우리 세계의 모든 시민들 사이에 진정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대화는 결코 각자의 신념 혹은 신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내적 확신을 배신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신학적 용어로 “변모”(transformation)라고 일컫는, 관점의 전환, 태도의 변화를 포함한다. 대화는 회심이라고 하는, 인내심을 요하는 오랜 과정의 출발이지, 타협에 기초하여 어떤 애매한 계약을 맺기 위한 아이디어의 교환이 아니다. 대화는 진리와 정의를 드높이고, 지식과 학문을 진전시키며, 공포와 편견을 없애고, 관계들을 일구고, 지평들을 확장시킨다. 대화는 모두를 부유하게 만들지만, 반면 대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빈곤 속에 머물게 된다.(한국어판 서문) 녹색총대주교,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계성이 가지는 우주적 차원, 인간 본성의 본질적 총체성에 대한 총대주교의 신념은, 그로 하여금 열정적이고 활동적인 생태주의자로 만들었다. 바르톨로메오스에게, 예컨대 환경 위기의 뿌리는 일차적으로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이 위기는 환경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인간의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다. 세 번째 천년 기에 접어들며, 진정 우리에게 기대되는 것은, 더욱 정교해진 과학적 역량일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메타니아’, 즉 참회다. 그리스어 단어인 ‘메타니아’(μετ?νοια)는 문자적 의미로 “정신의 변화” 혹은 “영의 변화”를 뜻한다. 우리 자신과 창조된 세상과 하느님을 이해하는 새로운 인식 방법을 얻는 것이 우리에겐 시급하다. 이 책 전체를 통해서,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는, 특별히 환경의 악용과 우리 세계의 불의에 대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멸망이 아니라 희망의 예언자이다. 그의 에필로그 주제가 바로 이 희망이다. “희망은 삶에서 본질적이다. … 그리고 언제나 희망은 있다.” 그는 낙관주의자로 여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해결책은 언제든 찾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항상 낙관적이다.” 그는 6장에서 생태론에 대한 글을, 이와 유사하게 희망 가득한 언급으로 결론을 맺는다. “의아스럽게도, 우리 시대의 생태적 문제들은 나를 짓누르지 않는다. 우리는 분명 환경 위기에 직면해 있고, 그 위기는 어떤 정치가도 소홀히 여길 수 없으며, 어떤 과학자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어쨌든 나는 항상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닮아가도록 창조된’(창세기 1:26) 인간의 근본적인 선함과 긍정적인 의도를 매우 낙관적으로 생각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