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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 교실에선
2. 제 갈 길로 가는 아이들 3. 아이들이 없는 학교 4. 학교 문제는 사회와 맞닿아 있다. 5. 열려 있는 몸, 닫혀 있는 성 6. 아직 교실은 따뜻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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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같이 남이 중요한 사회에서는 자신의 삶의 거울이 늘 외부를 향해 있다는 것조차 안 보일 때가 허다하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하는 '남들'을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무엇인 것처럼 받아들이기 쉽다. 아니, 자신의 삶 속에 들어와 있는 '거대한 남'을 볼 수 조차 없어진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외부, 타인에게서 찾는게 얼마나 공허하고 부자연스러운 일인지, 끊임없는 자기분열과 열등감 속에서 불행해지는 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은 아이들은 설사 자살이라 할지라도 명백한 사회적 타살이다.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이기는' 사회는 사실상 희망이 없다. 눈앞에 보이는 적이 있을 때, 삶은 비교적 단순하다. 생존이란 엄숙한 생의 명제를 따라, 대의를 따라 살아가면 되니 말이다. 그러나 먹고 살 걱정이 없고, 눈에 보이는 분명한 적도 없는 살기 좋은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일이란 훨씬 복잡하고 힘든 일이다. 삶의 의미도 없고, 왜 살아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는, 그래서 그때그때 눈에 띄는 재미를 찾아 부나비처럼 방황 하면서도 정신적 공허감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삶의 진정한 즐거움을, 풍요로운 웃음을, 남보다 튀어서 주목받는 기쁨보다 누가 보지 않아도 스스로 재미있어 노력해 얻은 작은 성과의 쫄깃한 참 맛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아이들이 더 이상 황폐해지지 않도록 정서적으로 돌보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 ---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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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중 자신이 '따'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봐.”
“희경이요, 희경이!” “야, 미화, 너 손들어, 빨리~.” 아이들은 반에서 성격 좋고 인기 많은 희경이나 미화를 놀리며 까르르거린다. 아이들에게 따라는 게 실은 '남과 조금 다른 사람'일 뿐이고 그걸 못 받아들이는 집단 문화의 야만성, 무서움에 대해 말하고 싶어 꺼낸 얘기였다. 물론 아라를 염두에 두기도 했지만. “난 말이야, 실은 학교 다닐 때 따였어. 그것도 왕따.” 애들이 눈이 동그래진다. “그런데 난 내가 왕따라는 것도 몰랐다는거 아니니.” 애들은 비로소 웃으며 “그랬을 거예요!”라고 소리친다.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정말 난 외롭기만 한 왕따였다. 다만 그땐 따라는 개념이나 용어도 없었고 나처럼 자기 세계에 틀어박혀 지내거나, 다른 아이들과 좀 다른 괴짜 아이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아이들이 소외도는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지만 지금처럼 심하게 집단으로 소외시키거나 괴롭힌 것 같진 않다. '따'에 대해 말도 많고 대책도 분분하지만 학교에선 여전히 따로 몰려 전학을 가거나 옆에 아무도 앉지 않아, 짝도 없이 홀로 앉아 지내는 아이들이 있다. 문화의 획일성, 나와 다른 사람 못 봐주기는 어른 사회에만 있는게 아니다. 아라가 어느 글에서 썼던 것처럼 아이들 역시 아니, 아이들에게 주어진 제도권 교육이라는 획일성과 그 여건의 열악함에 의해 어쩌면 더욱 심하게 획일화된 집단 문화를 갖고 있다. 똑같이 TV 쇼프로를 보고, H.O.T나 젝키를 보고 소리지르고, 똑같이 농구만 하고, 축구만 보고, '구구단을 외자' 게임을 해야한다.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따가 된다. 남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자 하고 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아이들이 설 자리가 제도권 교육 내에는 거의 없다. 규율과 억압, 통제와 경쟁, 수백 수천 명이 똑같이 입시를 향해 '앞으로 나란히'를 하고 있는 학교에서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고 다양성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배운다는 건 그야말로 하늘에서 별따기와 다름없다. 아라 같은 아이는 그러나 ,행복한 따에 속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속성을 스스로 알고 그 집단에서 살아남는 방법도 익히고 있다. 아라의 현명함과 월등한 성적은 특별한 힘을 가진 따가 되게도 한다. 그래서 아라에게 웃으며 묻고 씩씩한 대답을 들으면서 이 흉흉한 시절을 건너갈 수도 있다. --- p.1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