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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오노 나나미와의 대화
2. 로마인 이야기 입문 3. 우리들이 읽는 로마인 이야기 4.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5. 시오노 나나미의 깊이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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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황제(재위 : 서기 54년 10월 13일~68년 6월 9일). 아그리피나의 아들. 서기 49년에 철학자 세네카를 가정교사로 삼았다. 서기 50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가 되어 네로 클라우디우스가 되었다. 이듬해 아그리피나의 뜻대로 14세에 성인식을 치르고, 예정 집정관의 권리와 '황태자' 칭호를 얻었다. 서기 53년에 클라우디우스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한 뒤 원로원 회의장에 데뷔했다.
서기 54년 가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죽은 직후 '임페라토르'가 되어 원로원으로부터 제국 통치의 전권을 수여받고, 분위기쇄신을 바라는 시민에게도 환영을 받아 16세에 황제에 즉위했다. 세네카를 보좌역으로 삼아 아우구스투스 정치로의 복귀, 원로원 존중, 비서관 정치 폐지를 선언했으며, '관용'을 슬로건으로 삼았다. 초기의 원론원 의존 정책은 훗날 '네로의 5년 동안의 선정'으로 평가받았다. 서기 58년 무렵부터 원로원 의존 정치에서 황제 정치로 전환했다. 이듬해인 59년, 수 년 전부터 사이가 나빴던어머니 아그리피나가 옥타비아와의 이혼을 반대하자 어머니를 살해했다. '네로는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경우에는 극단적인 해결책밖에 생각해내지 못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서기 60년에 그리스의 '올림피아 제전'을 본뜬 '루디 퀸퀘날리'(5년제)를 개최하는등, 그리스 문화를 대규모로 도입했다. 서기 62년에 무술 사범 겸 근위대장인 부루스가 병사하고 세네카도 은퇴하자 '네로에게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다.' 같은 해 애인인 포파이아 사비나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 옥타비아와 이혼한 뒤 섬으로 유배하여 살해했다. 이로써 '황제로서 네로의 정당성('피의 계승'이라는 의미에서)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었다. 서기 64년, 시를 짓기 좋아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져 나폴리에서 가수로 데뷔했다. 같은 해 7월, 로마에서 대화재가 일어났을 때는 이재민 대책을 진두지휘하고 로마재건과 도심 개조를 위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통화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후 국비를 들여 웅장한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 건설에 착수한 결과, 사저를 의미하는 '도무스'라는 낱말이 시민을 자극하고 로마 대화재가 네로의 방화라는 소문도 퍼지게되었다. 당황한 네로는 시민의 적개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기독교도를 방화범으로 몰아 탄압하지만, '네로가 방화했다'는 소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 p.1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