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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세상과 나, 빛과 어둠의 엇갈림 속에서
1 내 삶의 부감도와 학창시절 '산민(山民)'에 담긴 뜻 제4지망과 세상바람 내 삶의 첫 무대 초등학교 시절 농촌의 어린 나무꾼, '도벌 선배' 중학교 입학, 고학의 시작 고교 입학, 3일 만의 한국전쟁 전락 속, 대학으로 가는 길목 전북대학교에 들어가서 날아간 2지망과 3지망 대학신문 창간에 징발되다 뒤늦게 고시로 '전향'하다 2 시국사건 변호사의 험난한 세월 고시 합격, 검사의 길 법무부 , 서울지겁 거쳐 변호사로 시국사건 변호 제1호 〈분지〉필화사건 '반미소설'의 법정 논쟁 크게 부풀린 동백림사건 천상병 시인이 동백림사건에 시화전, 시집 출판 누명 쓴 재일동포 이득현 씨와 두 일본인 변호사 통일혁명당사건과 김종태 3 1970년대 이 땅의 광기 속에서 김지하의 담시〈오적〉사건 월간〈다리〉필화사건 서승 형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사건 학국앰네스티의 창립 변호사 사무소 변천기 방송사 낙방생의 방송사 드나들기 남북 유엔 동시가입론과 김준희 교수 10월유신과 야당의원 탄압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사건과 박형규 목사 1970년대 초입의 내 생각 《법과 인간의 항변》과 방관죄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장준하 · 백기완 기독교계에 번진 유신철폐 개헌운동 4 끝없는 고난의 행렬을 따라 '성직자 구속' 유인물사건 이런 사이, 저런 모임 - 문학동네 〈한양〉지 '문인 간첩단사건' 긴급조치 4호, 민청학련사건 인혁당사건, 사법살인, 재심 무죄 '학생 선동'으로 구속된 연세대의 두 교수 납치당한 DJ, 법정에 서다 KNCC인권위원회와 나 이병린 변호사 구속 파문 5 변호사 - 구속자 - 실업자 - 구속자 - 실업자 반공법으로 구속된 반공법 변호사 변호사의 감옥살이 사계절 아홉달 만에 항소심에서 풀려나 실직자의 애환, 저작권 전문가 행세? 나의 장외, 삼민사 이야기 출판사의 추억과 '플러스 알파' 추방자들의 모임. ' 으악새'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조연으로 '마'의 지하실, 고문의 비명과 죽음 같은 침묵 군법' 회의'의 희비극 '김대중 사형'재판극과 감옥살이 6 1980년대 감옥살이, 강단, 법정 40대 후반에 소년교도소로 구속자 가족들의 맹활약 석방 이후, 그 시절의 내 생각 '개판' 이야기 법죠계 복귀, '노가바' 사건 재일동포 지문찍기 반대운동 저작권 강단 13년의 보람 혼자서 한 달간 '세계 저작권 기행' 〈민중교육〉사건의 전말 권인숙 양의 수난, 부천서 성고문사건 7 민주 · 통일을 향한 '사건' 속에서 정부의 '보도지침' 폭로사건 6월 민주항쟁과 변호사들의 가두시위 '민변' 의 출범과 항해 〈한겨례신문〉방북취재기획사건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 분단극복을 시도한 '죄인'들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규명운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10년 8 감사원에서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까지 감사원장에 취임하여 감사원의 독립, 3방위 수비 감사워의 원훈, 문자교육, 탈컴맹 감사원장의 국제무대 감사원장 정년을 70세로 늘려놓고 사랑의 택배업, 사회복지 공동모그회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반국가단체 지배지역' 북한 땅을 오가며 한구고이대를 거쳐 '사개추위'로 60년 만의 사법개혁, 그 난관을 헤치고 사법개혁의 마무리, 보람과 아쉬움 9 나 자신으로 돌아와서 나의 글, 나의 책 나의 건강, 그 허약함 속의 저력 엄숙과 유머, 내 양면성의 효용 나의 신앙 나와 정치 우리 집안, 우리 가족 법조인의 자화상 지식인의 길 에필로그_그래도 못다 한 말 한승헌 연보 |
韓勝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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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내 이름이 법률가 또는 법조인으로 안성맞춤이라고 덕담을 한다. 법 헌(憲) 자와 이길 승(勝) 자가 함께 있으니, 법대로 해서 이긴다는 뜻 아니냐고도 한다. 이름 석 자가 모두 힘 있고 상징성이 돋보이는 것 같아서 나도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 좋은 이름이 작명 40여 년이 지난 뒤 뜻밖에도 엄청난 화근으로 바뀌었다. 내가 터무니없는 무슨 시국사건으로 ‘남산’(당시 중앙정보부의 별칭)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을 때의 ‘희극’이었다.
“당신 이름이 이게 뭐요. 한승헌이라, 그러니까 한국의 (유신)헌법을 이기겠다, 이 말이야?” 아, 그 기막힌 상상력과 억지 앞에서 경탄과 폭소를 참느라고 입술에 힘을 주던 남산 지하실의 그때가 벌써 30년도 넘었는가. --- p.19 법정의 단상과 단하 사이에 오간 말의 강펀치에는 더러 반칙 같기도 하고, 핵심 같기도 한 우문현답이 작열(灼熱)했다. 단상의 심판관인 현역 소령이 선공(先攻)을 날렸다. “왜 목사, 전도사들이 하나님 믿으라는 전도는 안 하고 정치 문제에 간섭을 해서 혼란을 일으키는가?” 그러자 단하에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반격의 포성이 울렸다. “어찌하여 군인들이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망각하고 여기 와서 재판을 한다고 앉아 있는가?”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지신들의 행위가 하느님의 정의와 그리스도의 진리에 입각한 성서적 결단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 p.145(1974년 긴급조치 철회와 개헌청원 서명운동 허용요구 시국기도회사건 재판 중) 1975년 4월 8일, 그날 대법원에서 인혁당 사건 피고인 중 위의 7명과 민청학련사건 피고인 중 여정남에 대한 사형이 확정되었고, 선고 18시간 만에 그들은 형장으로 끌려가 불귀(不歸)의 몸이 되었다. 그때 여 군의 변호인이던 나 역시 반공법으로 구속되어 그들과 같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들이 저승의 문으로 끌려가던 날 새벽, 나는 그의 형 집행은 꿈에도 모른 채 같은 감옥의 다른 사방(舍房) 마룻바닥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 p.170 나는 서울구치소 2사(舍) 상 5방에서 감옥살이를 시작했다. 반공법사건 전문(?) 변호사가 반공법에 걸려 수감되다니, 이것은 마치 한강의 수상안전요원이 물에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혹시 변호사라는 내 신분 덕분에 구치소 안에서 무슨 우대를 받기는커녕, 가슴에 붙은 빨간 네모 딱지(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구속자라는 표지) 때문에 지독한 차별만 당했다. --- p.194 1980년 ‘5.17’에 끌려간 중년은 거의 1년 만에 서울구치소, 육군교도소, 그리고 소년교도소를 두루 순례하고 돌아왔다. 우리나라의 교도소 네 종류 중에서 세 군데를 거친 셈이다. 못 가본 한 군데는 청주여자교도소. 그건 하느님 소관이어서 내 힘으로는 갈 수가 없다. 미아동의 한빛교회에서 석방자 환영 예배가 끝난 뒤에도 나의 소년교도소 행은 화제가 되었다. 역대 수감 교도소 이름만 보면, 나는 소년시절부터 문제아로 자라서 군에 가서도 사고나 치고, 어른 된 뒤에도 큰일이나 저지른 상습범처럼 되어버렸다. --- p.242 나는 본시 ‘단체선호형’이 아니어서 집단의 형성에는 소극적인 사람이지만, 정법회나 민변의 시동에는 적극 찬성이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군사독재의 암울한 기상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 변호사모임이 출범할 때 내가 한 일이라고는, 정동에 있는 배재빌딩에 민변 사무실을 마련하고 개소식을 하던 1987년 7월 7일, ‘민변’의 현판을 만들어가지고 가서 걸어준 것뿐이었다. 간판 글씨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거라도 해서 ‘맨손’(수수방관)을 면하자 싶어 서툰 붓글씨나마 정성들여 써가지고 인사동에 가서 판각(板刻)을 해서 들고 갔던 것이다. 지금도 그 현판은 서초동 민변 사무실 문지방에 그대로 걸려 있다. --- p.289 한 야당의원이 추궁성 질문을 한다. “감사원은 왜 국정원 같은 힘센 기관에 대해서는 감사를 못하는가?” “무슨 법 몇 조에 국정원에 대한 감사를 제한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국회의원 여러분께서 만드신 법인데요, 하루속히 법을 개정하여 그런 제한 규정을 삭제해주시면 국정원에 대해서도 엄정한 감사를 하겠습니다.” 국회 예결위에서 오간 문답 한 대목. “정부가 전년도 국가 결산을 8월 말에야 국회에 보내오기 때문에 새해 예산 편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늦게 내는가.” “예산회계법 몇 조에 의하면, 국가 결산은 다음 회계연도 개시 얼마 전까지 국회에 제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부는 그 규정을 지켰습니다. 혹시 더 일찍 받아보시는 게 좋다면 제출 시한에 관한 조항을 개정해주시면, 정부로서는 그 날짜를 잘 지키겠습니다.” 예결위 회의장 뒤에서 선 채로 듣고 있던 정부 국·실장들이 쾌재를 부르더라슴 말을 나중에 들었다. --- p.329(감사원장 시절 국정감사 때) 생각해보면 나는 웃을 만한 일이 별로 없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가난, 전쟁, 고학, 반독재, 감옥, 그 어디에 웃을 일이 있었는가. 소위 ‘관직’도 관직 나름이어서, 내가 맡은 감사원이나 검찰 등의 공직은 하나같이 법규범과 엄격성의 틀에 얽매이는 자리였기 때문에 웃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변호사는 남의 불행을 떠맡아서 해결해주어야 하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공사 간의 생활이 ‘웃음친화적’이 아닌데도 나에게 얼마쯤 유머 기질이 있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기도 하다. 음지와 양지의 극한지대에서 숨이 아주 막히거나 좌절하기 않고 살아온 데는 유머라는 정서적 동반자의 ‘백업’이 주효했다. --- p.377 나는 서울 법대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과거 군사독재정권에 이용되었거나 편승하여 민주·법치를 파괴하는데 앞장 선 사람들 중에는 여러분의 선배가 많았다. 반면, 그런 도구화된 두뇌들이 일조를 한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운 이들 중에도 여러분의 선배들이 많았다. 과연 어느 부류의 선배를 본받고 따를 것인가, 이것은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있다.” --- p.397 나는, 내가 변호한 시국사건을 제대로 파헤치고, 그 ‘피고인’들의 의미 있는 수난을 기록하는 일을 변호인된 소임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글도 쓰고 책도 냈다. 그러는 가운데 과찬도 듣고 상도 탔다. 2007년 가을, 《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을 내고 많은 분들의 축하를 받고, 같은 책으로 ‘임창순 학술상’과 ‘단재상’을 받게 되었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남 벌 받은 이야기를 써가지고 내가 상을 타다니…….’ --- p.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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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사건 변호인 1호, 한승헌 변호사의 삶과 증언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시국사건이 총망라된 특별한 자서전이 나왔다. 무소불위의 군사독재정권 시대 ‘시국사건 변호인 1호’로서, 때로는 피고인의 한 사람으로서 무고한 이들과 고락을 함께한 한승헌 변호사의 증언록이다. 9남매의 자식 가운데 유일하게 장성할 때까지 성장한 무녀독남 외아들은, 사시 합격 후 법조계 유망주로서 탄탄대로의 양지를 걷는다. 그러다 변호사 전신(轉身)과 더불어 온갖 필화사건과 반공법사건의 변호를 맡으면서 서서히 음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고난과 역동의 세월을 돌이켜보면서, 저자는 음지 속에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었고, 인간적으로 성숙했으며 보람을 찾을 수 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음지 체험은 당신 삶의 양지였다고 회고한다. 자서전임에도 ‘사서 고생한 사람들’을 알리는 화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애썼기에 자신의 이야기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전면에 내세웠다. “의를 위해 저항하고, 무도하게 탄압받고, 그러면서도 ‘바른 세상을 향한 열정을 접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변호사 된 자의 소임”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어둠의 시대 ‘패소전문 변호사’의 비망록 “한 변호사가 변호한 사람치고 징역 안 간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시오.” 유신정권 시절 한 변호사의 변호를 받고 감옥에 갔다온 김상현 전 국회의원의 전언대로, 저자는 패소율이 가장 높은 변호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저자 자신도 무고한 사람을 한 명도 살려내지 못했기에 변호사로서는 참패했다고 고백한다. 1965년 남정현 작가의 소설 『분지』 필화사건부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2004년 노무현대통령 탄핵사건까지, 현대사의 거의 모든 굵직한 사법사건 속에 저자의 이름은 변호인 혹은 피고인으로 등재돼 있다. 자서전 곳곳에서 묘사되는, 숨 막히는 유식독재 치하의 군사법정 장면은 법과 정의가 발 디딜 틈조차 없던 시절에 정의를 위한 변호는 참패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준다. 사법부 위에 군림한 군인들은 ‘신성한 법정에서’ 코미디 버금가는 장면들을 연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 시대에 불의를 보고 ‘불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법조인으로서의 소박한 소신을 지키는 일조차 목숨을 건 싸움이었을 것이다. 결국 군부독재의 눈 밖에 난 반공법 전문 변호사는 반공법 위반으로 두 차례에 걸친 옥살이와 고문까지 받아야 했다. 저자가 아이러니와 치욕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 사법부의 역사를 전면에 드러내고 증언하는 이유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이기에, 그리고 절대로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의식 때문이다. 이른바 먹물들과 법조인들이 한 티끌이나마 양심에 어긋난 일을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순간, 구시대의 유물로 분류된 군사법정의 희대의 코미디는 언제든 현실 속에서 부활할 수 있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