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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목록
(1) 쿠르베 「사냥감」 (2) 로스코 「무제無題」 (3) 사전트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 (4) 루벤스 「술 취한 실레누스」 (5) 호머 「만류灣流」 (6) 고갱 「죽은 자의 혼이 지켜보다」 (7) 고흐 「한 켤레의 신발」 원전에 대한 노트 저자 서문 서론 : 평론, 예술을 '엿먹이다' 제 1 장 쿠르베 정신분석하기 제 2 장 마크 로스코 만들어내기 제 3 장 사전트 공상소설화하기 제 4 장 루벤스 취하게 하기 제 5 장 윈슬로우 호머 현대화하기 제 6 장 고갱 물신화하기 제 7 장 반 고호 벗겨 보이기 에필로그 감사의 글 역자의 말 |
Roger Kim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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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예술은 스스로를 작동시키는 진리다.
ㆍ정치적 올바름의 보다 깊은 효력은 어떤 유의 예술사가(藝術史家)가 주장하는 특정한 분파에서 -페미니즘, 마르크시즘, 정신분석 등등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비예술적 어젠더에 종속시키려는 결연한 노력에서 나타난다. 정치적 올바름이 가장 심한 파멸을 초래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다. 시각적인 것을 이념적인 것으로 대체시키면서, 그것은 예술을 본질적으로 비(非)미학적이고 탈(脫)미학적인 드라마의 소품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ㆍ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단순히 학문 교육이라는 면에서의 배신이 아니라 문화에 대한 공격, 이 세상과 이 세상 속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바라보고 가치를 재는 방법에 대한 공격이다. ㆍ예술사의 궁극적 동기인 존재이유는, 위대한 예술 작품들과 시각적으로 직접 맞닥뜨리는 데 있다. 다른 것들은 머리말이나 후기일 뿐, 메인 이벤트를 떠받치기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는다. 메인 이벤트는 예술에 대하여 배우는 것이라기보다, 직접 예술을 경험하는 것이다. ㆍ예술적 생산에 진정성이란 기준을 적용할 수 없게 되는 순간부터, 예술의 총체적 기능은 역전된다. 제식(祭式)에 기반을 두는 대신, 예술은 다른 행위, 즉, 정치에 기반을 두기 시작하는 것이다. ㆍ 발터 벤야민 ㆍ예술을 언어의 바다에 익사시켜 버리려는 유혹은 위험한 직업적 왜곡 이다. 비평가들은 자기 학식을 떠벌리기도 좋아하지만, 자신들의 말소리도 마찬가지로 좋아한다. 예술작품이 그들에게 이 두 가지를 다 뽐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니 그 얼마나 편리한가! ㆍ그렇다고 내가 예술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온갖 종류의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요소들이 개입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요소들은 개입될 수 있고, 실제로 흔히 그렇게 개입된다. 그러나 생생한 기운의 중심은 작품 자체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은, 예술사가 아니라 일종의 자서전 또는 정치적 설교가 되어버리고 만다. ㆍ현재의 예술 비평에 기름을 붓고 있는 저 유행성 급진주의는, 삶의 다른 영역에서 유행하는 급진주의들과 마찬가지로, 새끼를 잡아먹음으로써 살찐 동물과 같다. 늘 그런 식이었다. ㆍ대부분의 훌륭한 예술은 비평가를 일종의 결혼 중매자, 관람자와 예술작품 사이의 중간자로 왜소화시켜버린다. 그것이 겸허한 진실이다. 흔히 비평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는, 소개만 하고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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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숲속에서 먹을 것을 찾아다닐 생각이라면, 독버섯을 알아볼 수 있는 안내서를 들고 가려고 생각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오늘날의 예술사 학계라는 관목 숲으로 들어가게 될 때, 『평론, 예술을 '엿먹이다'』를 들고 간다면 유익하다는 것을 쉽사리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예술평론이라는 분야에 존재해온 많은 독버섯과 가짜 식용 버섯을 알아내고 피하게 되는 데 이 책이 분명히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니까 말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 책은 예술사가 근본적으로 ‘정치적 개입의 한 형태’라는 관점에 대해 통렬한 반격을 가하는 책이다. 다시 말해 예술사 공부에 스며들어가 있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독에 대한 해독제, 또는 적어도 그에 대한 대안을 주려는 것이다. 물론 저자라고 해서 모든 예술작품에 대한 평론의 필요성을 아예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예술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이해를 위해서 평론은 절대로 필수불가결함을 인정하면서도, 미사여구로 무장한 이론가, 평론가들의 정치적 의도 때문에 예술과 평론 사이의 관계가 ‘주객전도’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현실을 질타하려는 것뿐이다. 창작 행위를 하는 거장 화가들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아니, 심지어는 화가 자신이 적극적으로 해명하거나 부인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에다 성적인 의미, 인종주의적인 해석, 포스트모더니즘의 의도 따위를 억지로 갖다 붙이는 그들의 안하무인격 태도야말로 거장들을 (예술을) “엿 먹이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상생활의 무게에 눌려 예술을 접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는 더욱 난감한 보통 사람들이 그러한 자의적 해석을 보게 되면 이에 영향을 받아 순수한 감상이 불가능할 터이고, 그렇다면 예술가의 창작은 과연 무엇이 되겠는가? 예술을 본질적으로 비(非)미학적이고 탈(脫)미학적인 드라마의 소품으로 전락시키는 이런 평론의 독소를 없애는 방법은? 먼저 그런 ‘예술 능욕’이란 문제점을 인정하고, 자의적인 해석을 추구하기보다 눈과 가슴을 먼저 열고 작품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술의 참뜻이 무엇이냐에 관해서는 수많은 이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먼저 창작의 결과물을 마주 대하고 느껴보는 것으로 ‘예술 감상’ 혹은 ‘예술 누리기’의 회복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