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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와 김일성
냉전기의 북한 1945~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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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문/ 범례/ 문헌목록

1장 소련 참전으로부터 분단까지
1. 소련의 북한점령정책/ 2. 권력탄생/ 3. 모스크바 외상회의로부터 미소합동위원회로/ 4. 진행하는 38선 분단

2장 점령권력으로부터 건국으로―북한의 형성과 소련
1. 통역정치/ 2. 선행된 국가기구 건설/ 3. 헌법 제정으로부터 국가건설로/ 4. 북한건국과 소련/ 5. 남침통일 야망

3장 한국전쟁
1. 개전 전후/ 2. 개전/ 3. 유엔군의 반공과 중국 참전/ 4. 1950년 12월(제3회)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5. 화평교섭이라는 전쟁/
6. 스탈린은 조기정전론자였는가?/ 7. 남노당의 수난/ 8. 스탈린 사후

4장 전후 북한―1953년 8월~56년 1월
1. 전후복구와 소련·북한관계/ 2. 숙청/ 3. 4월 테제/ 4. 깊어가는 농업위기/ 5. 1955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 ‘주체’의 정치학―문예평론과 탈 소련

5장 스탈린 비판과 북한
1. 제20회 소련공산당대회와 최용건의 보고/ 2. 제3회 조선노동당대회/ 3. 김일성의 소련·동유럽 방문/ 4. 8월종파사건/ 5. 이상조 대사의 김일성체제 비판 6. 소련공산당·중국공산당의 반응/ 7. 동유럽 혁명과 김 체제/ 8. 1956년 총괄

6장 ‘주체’ 체제의 확립
1. 김일성 지배체재/ 2. 반대파 숙청/ 3. 중소 대립과 북한/ 4. 후르시초프의 구애/ 5. 허울뿐인 동맹조약

맺음말/ 관련연표/ 역자 후기/ 색인

저자 소개

저자 : 시모토마이 노부오
도쿄대학 대학원 법학정치학 연구과를 수료했다. 현재 호세이대학 법학부 교수이다. 아시히신문사 논설위원, 일본국제정치학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러시아 정치, 비교정치 전공이다. 주요 논저로『고르바초프의 시대』, 『러시아 현대정치』, 『아시아 냉전사』 등 다수가 있다.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6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314쪽 | 153*224*30mm
ISBN13
9788963571263

책 속으로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참전이 결정되면서 일본의 패배가 예상되던 동북아시아 지도는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한반도에 관한 문제는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의 주장에 따라 독립이 보장되었지만, 그 후 얄타회담에서 미소는 ‘상당기간’ 신탁통치 아래 두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7월 포츠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미소 간 구체적 합의가 없었다. 그 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이어서 9일 소련은 일본과 전투개시를 선언했다. 이렇게 하여 소련 적군(赤軍)이 대일참전을 했다.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싸우기 위하여 주요한 역할을 맡은 것은 제25군이었다. 이 군대의 최초 역할은 관동군이 한반도를 통해 본국으로 탈출하는 것을 저지하는 일이었지, 한반도 북쪽을 점령·지배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 해결은 새로운 문제, 즉 분단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소련 측과 합의하고 양국의 점령에 관한 분계선을 38선으로 설정했다. 왜냐하면 소련의 대일참전 후,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급속하게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5년간 한반도의 점령통치, 1948년 북한 건국 그리고 50년 6월 25일 김일성에 의해 시작된 남침통일과 같은 과정에 매우 깊이 관여한 것은 소련 적군(46년부터 소련군)이었다. 그러나 1945년 말 작성한 소련 외교문서는 일찌감치 미소 점령정책의 차이로 불가피하게 대립이 발생했다고 보았다. 소련 측이 일본 침략자의 군사력 일소, 한반도에서의 일본 영향력 배제, 한반도의 민주적 통일을 목표로 했다면, 미국은 그것과 정반대로 구체제 유지, 일본점령 협력자의 유지를 목표로 했다. 45년 말경에는 이미 미소 사이에 생각의 차이가 명확해졌다.
이후 소련외무성은 12월 20일 몰로토프 외상 이름으로 극비리에 보낸 답장에서, 한반도문제에 대해 합동위원회문제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 소련 측이 미소 군을 48년 초까지 철군 제안한 반면에 미국 측은 유엔대표위원회의 감시 아래서 선거를 제안했다는 것, 이것에 대해 소련 측이 내정간섭이라고 반대했다는 것 등을 보고했다. 이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관계는 더욱 멀어져갔다.
--- 「1장 소련 참전으로부터 분단까지」 중에서

국제적인 측면에서는 분열국가로 향한 움직임이 점점 멈출 수 없게 진행되었다. 1948년에는 47년 유엔에서 한반도문제의 상정으로 그리고 유엔감시 아래서 총선거를 실시하는 형태로 문제가 첨예화되었다. 특히 북한에 대한 유엔 감시단의 출입을 소련이 거부했다. 유엔은 2월 회의에서 5월 10일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는 문제를 내놓았다. 이어서 3월 31일 유엔총회에서는 미국이 유엔 감시 아래 전국에서 선거 실시를 제안했다. 이것에 대해 소련 측도 유엔이란 장에서 한반도에서의 미국·소련군의 동시철군과 한반도문제는 자국민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것은 거부되었다. 이렇게 하여 5월 10일 한국에서 선거가 실시되었다. 7월 24일 친미파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내각도 8월 5일 발족했다. 이후 1948년 소련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는 유엔 주도 아래 한국에서 행한 선거결과를 거부하고, 대신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와 그 이후 전국선거를 지지하는 시나리오가 승인되었다. 란코프가 말하는 것처럼, 이 조직은 남한에서 유엔 주도의 선거결과는 분열선거라고 계속 부인하면서, 한편으로 북한 주도의 선거는 전국적 선거라고 보았으며, 그것과 동시에 북쪽에서의 독자적인 국가 창설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그 후 북한의 독자적인 국가건설의 흐름이 결정되었다. 1949년 9월 2일 제1회 회의가 개최되고, 8일 헌법을 채택하고,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선언되었다. 그리고 9월 10일 최고인민회의가 열리고, 김일성은 북한인민위원회를 대표하여 ‘전북한의 통일적 입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에 권한을 이양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 결과 탄생한 중앙정부는 남북한 인민의 총의에 기초한 것이라고 강변했다[⑤/2/142]. 북측은 형식적으로는 남측을 해방되지 않는 영토로서 남측 인사를 자신들의 정부나 당에 포함시키려 했다. 북한헌법 아래서 통일이 가능하다고 한 이상, 북의 체제를 남한에까지 확대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1948년 9월 북한에서 국가제도형성이 완성되었다.

--- 「2장 점령권력으로부터 건국으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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