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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공제 EPUB
eBook 소설 징비록 1
EPUB
이번영
나남 2012.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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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목차

ㆍ칼과 글
ㆍ왕사(王使), 그 수수께끼
ㆍ시(詩) 없는 연회
ㆍ대마도의 운명
ㆍ가미카제
ㆍ무쿠리 고쿠리
ㆍ조선왕을 데려오라
ㆍ도주의 죽음
ㆍ왕사 다시 오다
ㆍ200년의 숙제
ㆍ미물이 변하여 사람이 되다
ㆍ조선인 왜구
ㆍ군왕의 적개심
ㆍ불운의 천재 정여립
ㆍ불운의 천재 송익필
ㆍ헌부지례
ㆍ통신사(通信使)
ㆍ가도입명(假道入明)
ㆍ사직지신(社稷之神), 이순신을 기용하다
ㆍ폭풍은 다가오는데
ㆍ동원령(動員令)
ㆍ전쟁, 드디어 닥치다
ㆍ토붕와해(土崩瓦解)
ㆍ망국의 간성(干城)들
ㆍ경당문노(耕當問奴)

저자 소개

저자 : 이번영
전북 부안 출생. 서울대 문리대 졸업. 경기고교 등 서울시 교직 종사. 저서로는 소시민의 사유적 진실을 그린 수필집《거기에 섬이 있다》, 실존의 향기가 서린 독특한 스타일의 스토리 에세이집《신혼여행》, 사랑의 한 근원을 천착한 대표문제소설《고향》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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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7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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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저사양 기기 사용 불가),PC(Mac)
파일/용량
EPUB(DRM) | 1.05MB ?
글자 수/ 페이지 수
약 21.6만자, 약 6.5만 단어, A4 약 136쪽 ?
ISBN13
9788930006057
KC인증

출판사 리뷰

임진왜란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다!!
‘가슴’이 아닌 ‘머리’로 보는 ‘진짜 임진왜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420여 년이 흘렀지만 대다수 한국인들은 임진왜란이라 하면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일어나거나 당시 입은 피해에 대해 분통을 터뜨린다. 이순신의 영웅적 활약을 부각시키면서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분절적이고 감성적인 접근방식만으로는 임진왜란의 전모를 파악하기 힘들다. 물론 참혹한 전쟁을, 더구나 우리 민족이 겪은 전쟁을 이성적으로 맞닥뜨리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가슴과 함께 머리를 깨워야만 ‘진짜 역사’를 볼 수 있다.
《소설 징비록》은 이러한 측면에서 매우 가치 있는 작품이다. 직접 임진왜란을 겪고 그 중심에서 전쟁을 진두지휘했던 유성룡이 쓴《징비록》을 토대로 한 이 소설은 임진왜란 전?중?후의 국내외 상황, 군( )?신(y)?민()의 움직임 등을 객관적이고 균형 있게 서술했다. 문학적 상상력이란 미명 아래 사실(~?을 지나치게 왜곡한 여느 역사소설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반영하되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틈새를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웠다. 전제군주제 시대였기에, 유교사회였기에 유성룡이 붓으로 쓰지 못했던 진실들 ― 임금 선조의 못난 모습들, 유성룡의 명재상으로서의 면모는 여러 역사책을 참고해 재구해냈다. 군더더기 없는 빠른 스토리 전개와 생생하고 간결한 문체도 큰 매력이다.
당시 임금과 신료들은 무엇을 했는가? 백성들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가? 명나라는 과연 우리의 우군이었나? 이순신과 유성룡은 왜 탄핵당해야 했을까? 등등, 임진왜란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파헤친 이 소설은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전말을 입체적으로 담았다.
일신의 안위만 걱정하는 임금, 권력다툼에 빠진 신하들, 굶주림에 떠도는 백성들…
모두가 버린 나라 조선을 일본이 가지려 한다!!

제1권 폭풍전야, 어둠의 빛깔들
1583년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은 분열됐던 일본을 통일하고 대륙침략의 야욕을 실현하려 조선침략을 꾀한다. 예전 고려?원 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할 때 조선과 일본 사이에 위치하여 큰 피해를 당한 대마도에서는 조선-일본의 전쟁을 막고자 가짜 일본사신을 조선에 보내 ‘일본에게 명나라로 가는 조공 길을 내주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 (假??? 가도입명)이라며 경고한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 서인 송익필, 정철의 모략으로 동인 정여립이 역신으로 몰리며 이와 연관된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는 기축옥사(1589년)가 일어나면서 전쟁에 대한 경고는 묵살된다. 일본은 조선이 당쟁과 내분으로 혼란한 틈을 타 1592년 20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침입한다. 4월 14일 부산성이 함락되고, 4월 15일 동래성이 함락되며 조선땅은 일본군에게 짓밟힌다.

제2권 살육의 광풍, 생존의 몸부림
선조는 뒤늦게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도체찰사에 유성룡, 도순변사에 신립, 경상도순변사에 이일을 임명한다. 그리고 경상감사 김수의 명령에 따라 군사들은 대구에 집결하지만 서울에서 내려온다는 순변사는 도착하지 않고 순변사가 올 때까지 군사들을 돌봐야 할 경상감사는 나타나지 않아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대구마저 일본군에게 점령되고, 뒤늦게 내려온 이일은 4월 25일에 상주에서 어이없게 패한다. 4월 28일에 충주에서 명장으로 추앙받던 신립마저 패하여 자결하면서 조선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같은 날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4월 30일 평양으로 몽진했다가 일본군이 계속 밀고 올라오자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떠난다. 그 후에도 계속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명나라로 망명하려고 했으나 유성룡 등의 만류로 겨우 조선에 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처참한 상황에서도 항전 의지를 불태우는 이들도 있었다.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은 거북선과 학익진법 등 과학적 군함과 체계적 전략을 활용해 5월 7일 옥포를 시작으로 사천, 한산도, 부산 등에서 계속 연승한다. 이어 의병이 일어나면서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의병들이 있다’는 희망을 빛을 던지기 시작한다.

제3권 참담한 상흔, 다시 망각 속으로
선조는 명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명은 그때 내부적으로 발배(?d; 보바이)의 반란세력을 진압하느라 여유 병력이 많지 않아 우선 조승훈 장군과 4천여 명의 병력을 조선에 보내준다. 그러나 조승훈은 일본군을 얕보고 신중하지 못한 태도로 전쟁에 임하다가 평양성에서 패전하고 그 책임을 모두 조선군에게 돌린다. 그 후 2차 명군으로 4만여 명의 병력과 함께 파견된 이여송 장군은 일본군 섬멸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일본군이 도망칠 수 있는 길을 내주고, 명군이 평양성에 들어가서 전적을 위조하려 조선의 민간인 1만여명을 학살하는 것을 묵인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의 나라 전쟁에 힘을 쏟고 싶지 않은 명과 장기전으로 인해 보급의 문제가 생긴 일본은 이해관계가 맞아 강화회담을 진행한다. 백성의 절반이 목숨을 잃어 강산이 피로 물들고 일본군과 명군이 들어와 주인처럼 행세하는데도 각성하지 못한 선조와 조정은 무고로 의병장 김덕령을 처형하고 이순신을 투옥시킨다. 그러나 원균의 대패로 3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은, 1597년 9월에 단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군함에 맞서 명량에서 대승한다. 1598년 9월, 전쟁을 고수하던 풍신수길이 죽자 일본군은 철군을 시작한다. 끝까지 도망치는 일본군을 섬멸하고자 한 이순신은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안타깝게도 전사한다. 그리고 이순신이 전사한 날 영의정 유성룡마저 파직된다. 7년간 전쟁의 참화 속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끝까지 싸운 두 거인은 이렇게 쓸쓸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무너진 왕국, 무엇이 문제였나?

임진왜란이 일본이 도발한 전쟁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200년간 지속되던 왕국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전란이 7년이나 계속되어 백성들의 절반이 신음 속에서 죽어간 것에 대해서는 임금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대마도 도주 종의지와 비교해 보면 선조의 외교와 국방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금방 드러난다. 대마도는 일본의 속국에 불과한 작은 섬나라이지만 일본과 조선의 전쟁의 기운을 감지하고 도주가 앞장서 두 나라의 전쟁을 막아 보려고 노력한다. 전쟁의 직접적 피해자는 아니지만 간접적 피해를 걱정했기에 사신을 파견하고 전략을 짜며 능동적으로 대처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직접적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조선의 임금 선조는 대마도 사신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신하들과 당쟁에만 몰두하며 적극적으로 전쟁준비를 하지 않았다. ‘문’(?을 사랑한 선조는 전쟁이 일어나면 칼이 글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또한 전쟁이 일어나자 의연한 태도로 군부를 이끄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야반도주해 버린다. 이러한 왕의 몽진은 수많은 장군과 관리들의 도주를 유발하고, 결과적으로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은 자신이 살던 곳을 버리고 피란을 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순신과 의병들이 분전했지만 일본에게 ‘주인 없는 나라’ 조선은 너무도 쉬운 상대였던 것이다.
나약한 선조는 명나라에 의존하고자 지원군을 요청하지만 조선에 온 명군의 행태는 우군이라고 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조선군을 업신여기고 일본군과 내통하며 그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길을 내주었으며 조선의 민간인을 학살하여 전적을 위조한다. 그리고 일본과 강화회담을 진행하면서 조선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국과 일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쟁을 매듭지으려고 한다. 선조는 국제 정치의 기본인 힘의 논리나 국가 간 역학관계는 간과한 채 순진하게도 이상적 유교주의 공동체를 꿈꾸며 형님 나라 명이 조선을 도와주길 바랐겠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냉혹했던 것이다.
《소설 징비록》을 읽으면 선조를 비롯한 당시 조선 지배층의 문제는 균형감각의 부족이었다고 느껴진다. 우선 대내적으로 ‘문’(?에만 치우쳐 ‘무’(?를 경시하다 보니 국방이 약해지고 나라 전체적으로 용기와 기백이 사라져 전쟁이 일어나자 속절없이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파 간에 서로 화합과 공존의 길을 모색하지 않고 반목과 대립만 계속하여 당쟁에 쓸데없이 국력을 소모하다 보니 백성들의 민생에 소홀해지고 외적의 침입에 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명나라만 전적으로 신뢰하고 일본은 오랑캐 나라라고 무시한 결과 명의 배신이나 일본의 도약에 대비하지 못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홀로 공중부양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문-무, 동인-서인, 군-신-민, 명-조선-일본 등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떠받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힘의 균형이 깨졌을 때는 균형점을 찾는 것이 정치가로서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용의 정치인 유성룡이 무너진 조선을 재건하며 ‘하늘이 내린 재상’이란 칭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유성룡은 동인의 선봉이었지만 동인과 서인의 화합을 도모하였고, 하급무관이었던 이순신의 역량을 알아보고 천거해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 또한 명나라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망명하려는 임금을 저지하고, 어려운 백성을 구제하는 세제개혁을 단행하여 민생을 안정시켰다.
광복 70주년. 여전히 강대국의 각축 속에서, 여러 세력의 힘겨루기 속에서 사는 우리는 한 명의 영웅보다는 안정된 나라를 갈구한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유성룡이,《징비록》이 다시 세상에 나온 이유일 것이다. 소설의 토대 유성룡의《징비록》에 대하여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총사령관)와 영의정을 맡았던 서애 유성룡(1542~1607년)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7년(1592~1598년) 동안의 일을 기록한 책. 전쟁의 원인과 경과, 자신을 포함한 조정의 신료들, 군지도부의 잘잘못과 전란으로 발생한 피해 등을 담고 있으며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제목은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해서 후환이 없도록 조심하리라’( @~ ?H?n, 여기징이비후환)라는〈시경〉구절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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