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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모두 여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은 일상에서 길어올린 글들이다. 쏟아져내리는 여름비에서 오히려 “그리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바스러질 듯이 건조해가는”(14쪽) 영혼을 자각하기도 하고, 술을 조심하다 술 한잔 못 마시고 지나가버린 인생을 한탄하다가 “취하지도 않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마취 없이 대수술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덕수궁이나 경희궁의 퇴락한 풍경에 쓸쓸해하기도 하지만 가장 쓸쓸한 것은 가을과 인생이 아닐까. 그러나 가을을 지나고(60쪽) 겨울 모닥불 앞에 서서는 따뜻하다고 해서 모닥불에 기대지 말고 인간답게 외롭게 살자는 호연지기를 보인다.(67쪽) “차라리 나는 나의 어둡고 침침한 굴속으로 걸어 들어가, 내 작은 호롱에 기름을 채워 심지 돋을 날을 기약하며 겨울잠을 청하리라. 한낱 모닥불에 나의 영혼을 맡기지는 말자.” 제2장은 주변의 식물 이야기다. 저자의 삶은 어쩌면 식물의 삶과 닮았다. 봄꽃부터 가을꽃, 집 안의 화분에 있는 식물까지, 저자는 그들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식물들은 모두가 인간에게 위안과 추억을 주는 존재들이다. 그런 중에 잘못된 생태행정으로 시골보다 도시에서 할미꽃을 더 쉽게 볼 수 있는 현실(111쪽), 자신들은 몸에 좋다고 하면 온갖 것을 다 먹으면서 곤충을 잡아먹는 네펜테스를 혐오스러워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고발한다. 「노랑나비 피나물꽃」(71쪽)에서는 누군가에게 ‘빨래’가 집으로의 귀환의 징표이듯이(빨래를 해놓고 외출하면 그것을 개킬 생각에 반드시 집으로 돌아온다) 저자에게는 식물을 사진과 글로 기록하는 것이 삶을 지푸라기라고 한다. 그리고 식물이 부지기수니 내 삶도 그만큼 더 풍성해지고 길어지지 않겠냐고 안도하는 대목에서는 인생의 고비를 넘긴 이의 관조와 유머가 넘실거린다. 그렇다고는 해도 살구꽃 지는 봄이 가는 건 항상 아쉽다. “이제 곧 살구꽃도 봄바람에 난분분할 것이다. 봄꽃 하나가 시대의 어둠을, 한 인간의 어두운 그늘까지 구석구석 밝혀주리라는 기대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아쉽기만 하다. 이대로 잠깐의 평화도 잦아지려나…….” (「살구꽃 샹들리에」 중에서) 동물의 이야기를 다룬 제3장은 주로 인간의 비인간적인 면모에 분노하고 그를 고발한다. 닭의 입장이 되어 야생성을 빼앗아간 인간을 힐책하고(119쪽), 한없이 나태한 꽃사슴에 분노하고(152쪽),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화초닭과 진주린에 마음 아파한다(141, 155쪽). 작지만 주체성이 강해 인간에게 사육당하지 않는 ‘참’새야말로 진정한 새다(137쪽). 그런가 하면 하루살이에게 장수 유전자를 주입하여 오래 살게 할 수는 없을까 하는 기발한 상상을 한다. 왜냐하면 TV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맛집을 소개하는 세상이지만, 저자는 하루살이처럼 입이 없어서 먹지 않고도 살아가는 삶을 이상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161쪽) “제발 모든 것을 그대로 뒀으면 좋겠다. 이리저리 비틀고 꼬아놓는 게 그리 깨 쏟아지도록 재미있는 것일까. 반드시 고쳐야 할 인간의 심성은 그대로 둔 채 말이다. 하다하다 이젠 물고기의 뱃살까지 (유전자를 조작해) 팔고 사는 지경에 이른 것 같아 자못 씁쓸하다. 그 사악한 머리통을 향해 이 가을의 잘 익은 알밤 한 대를 딱! 먹이고 싶다” (「진주린 잔혹사」 중에서) 제4장은 고향에 얽힌 이야기다. 저자는 고향인 경북 봉화에서 서울로 왔다. 인사동의 골동품들을 “비싼 값을 치르고 떨어대는 궁상”이라고 싫어하던 저자는, 어느 날 문득 고향을 깨닫는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너덜거리는 넝마처럼 이리도 남루해져 가는 것인가? 더 이상 내놓을 게 없어진 나는 마지막으로 고향이란 패를 꺼내 들며 만지막대고 있는 중이다. …… 낡고 헐은 것, 걸인의 발치에 던져진 동전 한 닢과 같은 것, 그것이 추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왜 눈부신 젊은 날에는 추억을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고향이, 추억이, 왜 나이 많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것일까.”(「고향」 중) 그렇게 피하고 싶었지만, 어느 날 고향은 자신에게 다가온다. 그리하여 딸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준 ‘어머니의 양산’, 송화다식을 만들던 할머니, 집앞의 오동나무, 호두를 따주시던 아버지를 하나하나 기억해낸다. 그리고 고향의 형제가 보내준 감을 차마 다 먹지 못하고 냉동실에 고이 보관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리워해도 어머니는 지금 산소에 누워계신 것이다.(196쪽) 제5장은 전시회 관람기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의 예술에 관한 지식과 미학관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무리 좋다고 알려진 그림이라고 해도 탐욕과 살육을 ‘부추기는’ 그림은 예술이란 무언지 회의하게 만들며, ‘고등사기’로 의미를 모호하게 한 현대미술도 저자는 불편하다. 제6장은 저자의 모사그림과 마우스그림을 글과 함께 묶은 것이다. 이야기꾼으로서 저자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앞에 두고 역사와 신화, 화가와 미술 사조를 흥미진진하게 엮어내는 한편, 일반인은 잘 모르는 ‘모사’의 세계를 안내하기도 하고, 모사를 통해 알게 된 세상을 독자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림들은 모두 불타 없어지지 않았는가. 그뒤에 쓰여졌을 글에서 저자는 ?조린다. “그림이란 그리움이다. 그림이 그립다. 이 그림을 보니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던 때가 몹시 그리웁다. 아느 해 8월의 그 검게 타오르던 여름날을 내 어찌 차마 잊으랴. …… 그때부터 나는 지금까지 상중이란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 눈물도 메말랐다. 인생이란 그저 견디는 것이라는 것을 체득하며, 집안의 가구인 양 무생물처럼 살았다. …… 그런데 지금은 그림이 그리워진다. 동토에 봄이 오려는가” 그리고 눈이 아파서 마우스그림도 그리지 못하게 된다. 결국, 저자는 다 놓는다. “이젠 돌아가야 하리라, 그동안 펼쳐놓았던 보따리들을 주섬주섬 챙겨야 하리라. 돌아가는 길엔 그 어떤 신비로움도 없다. 권태와 피로가 나를 덮치리라.”(299쪽) 그리고 글쓰기가 시작된 것이다. 저자 권오영의 매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누가 다칠 새라 조심조심 소심하게, 착하게 산다는 것. 하나는 필력이 단단하다는 것이다. 아, 그림도 잘 그린다. 그래서 그녀는 “그림 잘 그리고, 글 잘 쓰는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경쟁사회에 들어가지 않고 속도에 역행하며, 유쾌하게 살아간다. 1)책이 나오기까지_성장통을 겪은 어른 권오영은 한때 그림을 그렸다. 세밀화를 잘 그렸고 명화 모사에 뛰어난 자질을 발휘했다.(6장 참고) 유물을 발굴하여 닦고 다듬어서 가치를 발하게 하는 고고학처럼, “우리의 관심사에서 사라져가는 거장들의 그림을 닦고 또 닦아서 그 메시지를 재확인하는”(302쪽) 작업을 한 것이다. 모사그림 전시회 제의도 들어왔다. 전시할 작업이 차근차근 쌓여가던 어느 날 화실이 들어있던 건물이 화마에 휩싸였다. 꽝!하는 굉음에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고 슬리퍼 바람으로 문밖으로 나온 것이 작업실과는 마지막 인연이었다. 목숨이 붙어있는 것이 고마울 뿐이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몇 년의 목숨 같은 그림이 모두 재로 변한 것을 확인해야 했다. 그뒤 다시 붓을 들 힘은 없었다.(56쪽 참고) 권오영은 글을 썼다. 컴퓨터를 대하던 처음엔, 그림에 미련이 남아서 마우스로 그림을 그렸다. 가로세로 200픽셀의 작은 화면에 하나하나 점을 찍어서 표현하는 마우스그림은 눈알이 빠지는 고역이었다. 그만두려고도 했다. “그럼 나는 뭐하고 살아야 하나? 캔버스에 그림도 못 그리고 마우스로도 못 그리고 이제 나는 할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밥만 먹고 살 수는 없기에 “공사판 막일이라고 한다는 심정”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말하자면, “생존본능의 산물”이었다.(285∼286쪽) 그런데 그것이 그림을 더 이상 못 그리는 원인이 되었다. “12시간씩 마우스를 잡고” 씨름한 결과, 글씨와 모든 사물이 굴절돼 보이는 병이 나서 현재까지도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이제 붓을 들 마음은 있지만, 신체의 병(눈) 때문에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어려운 시기를 견디게 한 힘이 글이었다. 어릴 때 글쓰기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글 쓰는 일은 ‘예정된’ 것은 아니었다. 삶의 굴곡이 그를 글로 내몰았다. 무엇이라도 하려고 집 주변의 식물과 동물을 사진 찍으며 글로 이야기하고, 고향마을과 궁궐에 담긴 어제와 오늘을 풀어내고, 사진으로 몇 점 남겨놓은 그림을 대하면서 글을 썼다. 이 책은 오랜 시간 동안 블로그에 쌓인 글들을 추려서 정리한 것이다. 소설가 남정현 선생은 이야기한다. “어디엔가 오래 묻혀있던 인재가 갑자기 세상을 향해 출사표를 던졌다. 글도 그림도 만만치가 않다. 약이 되든 독이 되는 뭔가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기세다” (남정현) 그 모두는 ‘그리움’이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림에 대한, 작은 것에 대한, 그리고 지금은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글 군데군데 묻어있다. 세상을 다니며 고행을 하다 돌아와 제자들에게 설법하며 열반에 든 부처처럼, 저자는 갖은 시련으로부터 돌아와 거울 앞에서 자신과 마주했다. 어른의 성장통 자취가 한 권의 책으로 묶인 것이다. 2) 식물이 이야기한다. “나는 아프고 외롭다, 그리고 인간사회(육식사회)에 분노한다” 권오영은 착한 사람이다. 여름에 아무리 더워도 환경을 위해 에어컨은 켜지 않으며(25쪽), 20년이 넘은 텔레비전의 죽음을 슬퍼하고(16쪽), 작지만 마음을 환하게 하는 피나물꽃의 이름이 고작 ‘피나물꽃’인 게 안타까워하는가 하면(71쪽), 유전자 조작으로 동물의 모양도 변화시키는 인간(141, 155쪽), 먹거리와 농촌에까지 들어온 강대국의 모습(107쪽, 287쪽)에 분노한다. 언제부터인가 ‘착하다’는 말이 사람에게 쓰이면 ‘좀 모자란다’는 뜻이 되었다. ‘착한 가격’은 괜찮지만 ‘착한 사람’은 꺼려하는 ‘불편한 진실’. 그런데 권오영은 그 불편을 알면서 ‘착한 쪽’을 선택했다. 경쟁사회에 들어가기보다는 홀로 뚝 떨어져 조심조심 살아간다. 아등바등할 일이 있으면 포기하는 쪽을 택한다. 그것이 생태적 삶을 위한 실천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혼자 살지만 누구보다도 ‘함께 사는 세상’을 갈망하고 있다. 범위도 사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식물, 동물, 텔레비전 같은 사물까지……우리가 조심조심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었지만 손에 쥔 것이 없다. 괜찮다고 한다.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지” 권오영은 자유로운 사람이다. 사회적 통념보다는 자신의 취향에 충실하다. 편리보다 불편을 좇는 것도 취향의 연장선일 수도 있겠다. 블로그의 별명은 보헤미안인데, 실제로 그는 허기를 채우는 이상의 식사는 하지 않으며, 자신이 손수 만든 옷을 입으며, 동가식서가숙으로 지인들의 집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사회적 통념으로부터 자유롭다. 저자에 따르면, 아마 너무 이른 나이에 쇼펜하우어와 《장자》를 읽고 인생이 심드렁해졌기 때문일 수도, 언젠가 이집트 여행에서 마주했던 끝없는 모래언덕과 푸르디푸른 바다를 잊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인생을 ‘같잖게’ 바라보도록 하는 기막힌 매력” 때문에 한때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이젠 그로부터도 자유롭다.(33쪽) 권오영은 알고 보니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옛날에 할머니나 어머니가 잠잘 때 들려주던 이야기처럼, 권오영은 식물이나 동물에서 신화와 전설을 꺼집어내어 거기에 상상력을 더해서 조근조근 맛깔나게 전해준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어머니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제비꽃에서 역사를 꺼집어내고(74쪽) 계수나무에서 그리스신화를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달에 사는 토끼가 중국산(!)이라는 상상에 도달한다.(96쪽) 공작새에 얽힌 이야기(127쪽)는 다시 들어도 재미있고, 제라르와 루벤스의 그림을 놓고 이야기하는 신화(261, 265쪽)는 그 그림을 다시 보게 하는 힘을 지닌다. 모사한 명화에 얽힌 이야기들은 몇 번을 읽어도 재미있다. 그래서 권오영은 외롭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숙명처럼 따라붙는 외로움이다. 그런가 하면 권오영의 글은 발랄하고 유쾌하다. 외로움도 유머처럼 여유가 있다. 상상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뻗어가고 글의 붓끝은 독자의 허를 찌른다. 그것이, 이미지로 포장되지 않은 착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공유되기에 그의 글은 많은 이들에게 위안이 된다. 힐링이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