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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개
마음산책 2012.08.25.
원서
Chien Bl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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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 소개 1

로맹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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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in Gary,에밀 아자르

1914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4세 때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 니스에 정착했다. 법학을 공부한 후 공군에 입대해 1940년 런던에서 드골 장군과 합류했다. 1945년 『유럽의 교육』이 비평가상을 받으며 성공을 거두었고, 탁월하고 시적인 문체를 지닌 대작가의 면모를 드러냈다. 같은 해 프랑스 외무부에 들어가 외교관 자격으로 불가리아의 소피아, 볼리비아의 라파스,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 체류했다. 1949년 『거대한 옷장』을 펴냈고, 『하늘의 뿌리』로 1956년 공쿠르상을 받았다. 로스앤젤레스 주재 프랑스 영사 시절에 배우 진 세버그를 만나 결혼하였고, 여러 편의 시나리
1914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4세 때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 니스에 정착했다. 법학을 공부한 후 공군에 입대해 1940년 런던에서 드골 장군과 합류했다. 1945년 『유럽의 교육』이 비평가상을 받으며 성공을 거두었고, 탁월하고 시적인 문체를 지닌 대작가의 면모를 드러냈다. 같은 해 프랑스 외무부에 들어가 외교관 자격으로 불가리아의 소피아, 볼리비아의 라파스,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 체류했다. 1949년 『거대한 옷장』을 펴냈고, 『하늘의 뿌리』로 1956년 공쿠르상을 받았다. 로스앤젤레스 주재 프랑스 영사 시절에 배우 진 세버그를 만나 결혼하였고,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쓰고 두 편의 영화를 감독했다. 1958년 미국에서 『레이디 L』(프랑스판 출간은 1963년)을 펴냈고, 1961년 외교관직을 사직, 단편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1962)를 발표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1975), 『여자의 빛』(1977), 『연』(1980) 같은 소설을 남겼다. 1980년 파리에서 권총 자살했다. 사후에 남은 기록을 통해 자신이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그로칼랭』(1974), 『가면의 생』(1976), 『솔로몬 왕의 고뇌』(1979), 그리고 1975년 공쿠르상을 받은 『자기 앞의 생』을 썼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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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8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88쪽 | 462g | 140*225*20mm
ISBN13
9788960901438

책 속으로

내가 거실에 들어서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현명한 행동이었다. 나는 딱 보면 표정이 드러나는 얼굴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나를 보기만 해도 냉기를 느끼기에 충분했을 거라는 얘기다. 악한 진영에도 있듯이 이 ‘착한 진영’에도 상황을 이용하는 자들과 개자식들이 있다는 걸 내가 알기 때문이다. --- p.44

나는 진 세버그의 재정 문제에 코를 디밀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곳에 온 뒤로는 여섯 명의 협잡꾼들과 영원한 악한들이 그녀의 두 가지 죄책감, 즉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기 때문에 가장 멸시당하는 존재임에 틀림없는 영화계 스타라는 죄책감과 원죄를 신격화한 루터파 교인이라는 죄책감을 갖고 놀며 최대한 이용하는 걸 지켜보고 있다. --- p.53

나는 녀석에게 러시아어로 말했다. 다른 누구도 우리 얘기를 알아듣지 못하도록.
“내 말 잘 들어봐, 친구. 흑인을 물지 말라고는 하지 않겠어. 흑인만 물지는 말라는 거야.”
녀석은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개들은 피를 나눈 형제를 알아볼 줄 안다. --- p.66

나는 ‘감정 제거’라는 현대적 흐름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감정의 인플레이션을 빌미로 감정을 평가절하하길 거부하고, 100프랑의 고통이 1프랑의 가치밖에 없다고 받아들이기를, 다시 말해 어제는 단 한 사람의 죽음으로 충분했던 곳에 백 명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 p.75

그녀는 스물세 살의 젊은 여자였는데,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원예학 학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식인에게는 소르본대학이나 그와 맞먹는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창녀를 만나는 것보다 충격적인 일이 없기에 나는 정말이지 은총의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전채 요리로 멜론을 먹을 때 이미 우리는 문학을 얘기하고 있었고, 디저트에 이르러서는 ‘실존주의’까지 나왔다. 미국 창녀들은 20년쯤 늦었다. 우리 나라의 창녀들은 구조주의와 미셸 푸코를 얘기한다. --- p.85

미국의 성인 지성들이 자기 성기에 쏟는 이 지대한 관심에서 나는 거대한 거세를 떠올렸다. 가장 비극적이면서 안타까운 예는 헤밍웨이가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 스콧 피츠제럴드에 관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있다. 피츠제럴드는 자신이 ‘작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괴로워했던 모양이다. 헤밍웨이는 그의 물건을 보고 나서 그가 완벽히 정상이라고 안심시키며 의혹을 말끔히 없애주려고 친구를 루브르로 데려가 그리스 조각상의 성기 크기를 보여주었다. --- p.86

불타는 게토에서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탈취했다. 다른 사람이 이미 옷을 벗겨 간 벌거숭이 마네킹을 팔에 끼고 가는 흑인 청년이 그걸로 뭘 할지 내게 이야기를 좀 해줄 수 있을까? 휴지
통을 일곱 개나 들고 가는 사람은 또 어떤가. 저기 화장지를 잔뜩 들고 걸어가는 사람은 차라리 이해하겠다. 저 사람은 적어도 제 엉덩이 닦을 일만큼은 확실히 대비했잖은가. --- p.127

애버내시 박사, 입 닥치시오. 당신은 마틴 루터 킹이 살해당하기 몇 분 전에 사용한 면도 크림의 상표까지도 말하더군요. 깜빡 잊고 면도 크림을 안 가져온 당신에게 킹 목사가 그 크림을 건네며 당신더러 사용해보라고 했다죠. 당신 마음을 알고 이해도 합니다. 그 면도 크림은 성물이 되겠죠. 성스러움의 향기를 갖게 될 겁니다. 그러나 당신은 성경에 더는 자리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었군요. 성경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내가 장담하건대 하나님은 당신네 검은 약속에 오지 않을 겁니다. 그분은 이미 많은 약속을 바람맞혔습니다. --- p.178

분명히 말하지만 그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목소리가 드러내는 느닷없는 격정과 마비된 얼굴 근육은 의지에서 나온 것이고 의도적으로 야기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약간의 진실성이 있다면 영원한 응석받이 아이의 진실성이었다.
“손을 들지 않은 사람들은 여기서 당장 꺼지시오.”
어떤 인간이 망나니처럼 행동할 때마다 나는 내 낯을 잃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말론 브란도가 그런 식으로 ‘배수진을 친’ 블랙팬서들의 태도를 흉내 내려 했던 것임을 이해한다. 그러나 엉덩이에 발길질을 당할 위험조차 없는 이 백만장자는 이 행위로 ‘화이트팬서’는커녕 거실 양탄자에 오줌을 누는 강아지 꼴밖에 되지 못했다.

--- p.180

출판사 리뷰

격동기 미국을 바라보는 이방인의 신랄한 시선!
로맹 가리의 미국 체험이 고스란히 담긴 소설 『흰 개』 국내 초역


1968년 2월 17일 폭우가 쏟아지던 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숙소에 손님이 찾아든다. 산책을 나가 며칠이나 소식이 없던 누렁개 샌디가 친구를 데려온 것이다. 잘생기고 건장하며 친절하고 붙임성 좋은 이 회색 독일셰퍼드는 금세 로맹 가리 부부와 가족이 돼 사랑을 받지만, 가슴 깊이 불안함을 야기하는 미심쩍은 면이 하나 있었다. 바로 특정한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달려들어 살점을 찢으려는 것.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피부색이 검었다.

1960년대 초, 미국 앨라배마 주에서는 날로 골칫거리가 되어가는 흑인들의 인권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급기야 흑인을 골라 물도록 특수 훈련한 경찰견을 풀기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은 이 개를 ‘흰 개’라 불렀다…….

밖으로는 10년 가까운 베트남전쟁으로, 안으로는 인종차별 철폐를 부르짖는 흑인들의 시위로 고초를 겪던 1960년대 말 격동기의 미국, 그 혼란한 자리에 프랑스 사람 로맹 가리가 있었다. 집단 내지 국가 단위로 강제되던 이념 싸움에서 한발 물러나 소수자의 신념을 유지하고, 인간에 대한 회의와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인간애를 모순되게 품은 그에게 이 시절은 한 단어로 압축될 수 있었다. 광기.

이 책은 로맹 가리가 1960년대 미국에서 겪은 일들에 토대한 자전 소설이다. 흑인을 공격하도록 세뇌당한 ‘흰 개’를 원래의 심성으로 되돌리기 위해 흑인 동물조련사 키스를 찾게 되면서 겪는 인종 갈등, 부부 갈등, 이념 갈등 등 여러 인간 문제가 이 책의 주된 이야기다. 피부색과 이념에서 파생한 광기를 ‘태생적 소수자’로서 맞닥뜨린 주인공 로맹 가리의 고뇌가 냉소적이고 신랄하되 사색적인 어조로 담겼다. 1968년부터 1969년까지 2년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책은 흑인과 백인, 개인과 집단, 남성과 여성,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 각종 대립 구도로 사회 갈등이 한창 고조되었던 격변기 미국에 관한 생생한 현장 보고다.

『흰 개』는 인종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흑인을 두둔하지도, 백인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로맹 가리의 눈에 집단의 이념에 사로잡힌 인간은 늘 광기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로맹 가리는 이 책의 전면에 나서 인종주의를 고발하는 동시에, 당시 흑인 인권 운동에 앞장선 과격파 흑인 단체의 위선과 말론 브란도 등 스타급 인사들의 ‘숟가락 얹기’를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흑인 단체에 놀아나는 아내 진 세버그의 혼란과 자기모순을 비판적으로 어루만진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논리에 숨어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흑백 양 진영의 모순과 부조리를 이야기하는 이 책은 특히 아내와 ‘흰 개’의 심상을 교묘히 오버랩하여 가정의 위기를 사회 우화로 발전시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 부부의 미시사를 사회라는 거시사와 유기적으로 결합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42년 만의 국내 소개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화두


『흰 개』는 1968년 단편 형태로 미국 「라이프」지에 처음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이후 장편소설로는 1970년 프랑스에서 먼저 출간되었고, 같은 해 로맹 가리가 직접 옮긴 영어판이 미국에서 출간돼 곧장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국내에는 이번에 처음 번역되는 것으로, 첫 출간 후 42년 만에야 소개되지만 ‘적대적 공생’ ‘정치적 올바름’ 등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고민을 묵직하게 제시한다. 그의 여느 소설처럼 이 작품에서도 로맹 가리는 자기 경험을 천착하지만, 자신에서 사회로, 그리고 인류로 시야를 본격 확장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에 미국의 저명한 월간지 「하퍼스 매거진」은 “자신의 시대에 전설로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로맹 가리는 자신이 원숙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라고 호평했다.

이 작품은 1982년 새뮤얼 풀러 감독이 연출을 맡아 동명의 영화(우리 제목 「마견」)로도 만들어졌는데, 원래는 로맹 가리 생전인 1970년대 후반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연출할 예정이었으나 그가 법정 성폭행 혐의로 촬영 전 미국 밖으로 도피하는 바람에, 결국 1979년 진 세버그가 죽은 채 발견되고 1980년 로맹 가리가 권총 자살한 이후에야 제작이 완료됐다.

“진 세버그의 성전(聖戰)에 관한 이야기”

‘흰 개’의 이야기는 크게 하나의 줄기를 따른다. ‘흰 개’를 입양하고, 그 개가 ‘인종차별견’임을 깨닫고, 재훈련하기로 마음먹고, 결국 교화하지만 이번엔 다른 이념의 희생양으로 안타깝게 떠나보내는 것. 이 소설의 중심엔 언제나 ‘흰 개’가 있다. 그런데 ‘흰 개’를 보노라면 그 못지않게 가련한 어느 한 사람의 모습이 은유되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바로 로맹 가리의 아내 진 세버그다. 하얀 피부로 흑인의 인권 운동을 지원하는 그녀는 백인의 멸시와 흑인의 농간에 휘둘리면서도 순수한 선의를 끝내 놓지 못하는, 안타까우면서 갑갑한 여인이다.

“미스 세버그, 당신에게 해가 될 수 있는 편지 한 통을 가지고 있어요. 당신이 파리의 아프리카 출신 학생들에게 혁명적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이 담긴 편지죠. 거기엔 ‘블랙팬서’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까지 적혀 있어요. 우리가 이걸 출간하면 미국에서 당신의 배우 경력은……”
진은 대답했다.
“출간하세요.”
그런 뒤 그녀는 얼마간 울었다. 미스 세버그는 아직도 실망을 할 수 있는 나이였다.
나는 그녀가 할당액 수표에 서명을 하기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말해 거실이 비길 기다렸다가 자러 갔다. --- p.45쪽에서

이 소설에서 진 세버그의 모습은 원래 회색이면서 ‘흰 개’로 불려야만 하는 그 개의 모습과 겹친다. 둘은 커다란 갈등의 희생양이라는 점에서 같다. 로맹 가리는 이 점이 탐탁지 않았다. 피부색은 사람의 성질을 대변하지 못하니 본질을 봐야 한다고, 더는 집단의 농간에 놀아나지 말라고 자신의 말로, 그리고 남의 입을 빌려 종용한다.

악한 진영에도 있듯이 이 ‘착한 진영’에도 상황을 이용하는 자들과 개자식들이 있다는 걸 내가 알기 때문이다. --- p.44쪽에서

“흑인 개자식은 흑인이기 때문에 개자식이 아니라, 개자식이기 때문에 개자식인 거야.” --- p.176쪽에서

결국 뜻이 달랐던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는 1968년 가을 이혼한다. 소설과 현실 모두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부부의 이혼 사유를 오롯이 인종 문제에 관한 견해 차이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한 권의 소설이 나올 만큼 중대한 일이기는 했다. 인종 문제는 사회적으로도 중대했지만 부부에게도 중대했다. 개인사와 사회사, 그러니까 미시사와 거시사가 연결되는 건 이 지점이다.

물론 둘의 관계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두 사람에게는 이혼으로는 끝나지 않을, 애증과 연민으로 결속된 고리가 있었다. 『흰 개』가 출간된 1970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로맹 가리는 이렇게 말했다. “이혼이 우릴 갈라놓기엔 우린 매우 가깝습니다.” 그러나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그처럼 전형적인 미국 이상주의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호구라는 얘기죠.” 로맹 가리의 진심은 무엇일까.
그렇게 세월이 흘러 1979년, 진 세버그는 파리 외곽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보수적인 시절에 흑인 운동 등 진보적 발자취를 이유로 FBI의 감시와 대중의 뭇매를 맞던 터였다. 「워싱턴 포스트」 기사에 따르면 진 세버그가 죽은 뒤 로맹 가리는 이 소설을 이렇게 회고했다고 한다. “진 세버그의 성전(聖戰)관한 이야기다.” 『흰 개』가 한 작가의 삶에서, 부부라는 한 운명 공동체의 삶에서 어떤 의미일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백인과 흑인, 인간의 자리를 모색하다

『흰 개』는 로맹 가리 자신이 주인공인 자전 소설이다. 즉, 실제 경험한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독자는 알지 못한다. 로맹 가리뿐 아니라 진 세버그, 마틴 루터 킹, 제시 잭슨, 랠프 에버내시, 바비 케네디, 말론 브란도, 존 프랑켄하이머 등 여러 유명 인사들의 실명과 실제 사건이 분명 소설을 지탱하는데도 비현실적인 기운이 감도는 건 그만큼 시대의 초상이 일그러졌다는 방증이다. 그 초상에서 가장 일그러진 시기가 바로 이 책의 배경인 1968년부터 1969년이다.
1968년, 소설 속 로맹 가리는 미국에서 벌어지는 광기를 직접 겪는다. 우연히 입양한 ‘흰 개’가 흑인을 물도록 훈련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치유’하기 위해 보낸 사이 개의 원래 주인이 방문한다. 두 손주를 이끌고 찾아온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온화한 모습을 한, 그러나 정신만은 일그러진 인종주의자였다.

“당신의 깜둥이 친구가 개를 아프리카로 데려갔습니까?” (…) 그는 일어섰다. 크고 투박한 두 손은 보호하는 몸짓으로 다시 두 개의 작은 금발 머리 위에 놓였다. 이 개자식은 훌륭한 할아버지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끔찍한 건 이자가 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선량한 인간이었다. --- pp. 61~62쪽에서

로맹 가리는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을 한,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차별과 경멸에 분노하지만, 이것이 그를 흑인 진영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흑인의 경우도 백인에 대한 맹목적 증오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이용해 장사를 하는 흑인이 있었고, 거기에 선의를 베풀어 선민의식이나 드러내는 백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흑인과 백인 어느 진영에서도 화해의 답안을 찾지 못한 로맹 가리는 프랑스로 눈을 돌린다. 그곳에서는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서 촉발해 권위주의와 보수주의, 반전과 평등을 부르짖는 집단적 움직임이 68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었다. 드골주의자인 로맹 가리에게 반드골 성향의 이 움직임이 살가울 리만은 없었다. 아니, 그 전에 그는 지독히도 오지랖 넓은 프랑스의 혁명에 소수자의 오한을 먼저 느꼈다. 이곳에도 집단의 논리가 들어서 인간 낱낱을 위한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사랑을 위해 이념에서 도피한 흑인 친구 발라드의 이름을 빌려 이 심경을 토로한다.

“추상적인 얘기라면 지긋지긋해요. 생미셸 대로에서 흑인문제에 대해 얘기하는 소리를 들어보세요. 저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 삶은 성공한 것 같아요. 계급투쟁, 흑인문제, 자본주의……. 저들은 자기들이 떠들어대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 p.236쪽에서

그리고 자신의 말을 전한다.

나는 다수라면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다수는 언제나 위협적이다. 그러니 내가 희망을 잔뜩 품고 샹젤리제로 갔을 때 지나칠 만큼 만장일치로 움직여 소름 끼치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쇄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얼마나 당혹감을 느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오합지졸 몇백 명과 함께 조롱을 받으며 로렌의 십자가가 그려진 삼색기를 흔들 생각으로 온 나는 속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 좌파건 우파건 나는 쇄도하는 인파라면 모두 추악하게 느껴졌다. 나는 태생이 소수자다. -- 262쪽에서

사랑과 화해의 모범

로맹 가리는 인간의 대지에서는 정작 인간을 위한 자리를 찾기 힘들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대양을 두 번이나 힘주어 언급했는지 모른다. 대양에는 인간이 뿌리내릴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잉태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백인과 흑인, 미국과 프랑스 모두에서 회의를 느껴 대지 바깥에 눈을 돌린 로맹 가리의 태도를 누구는 양비론이라 부를 테지만, 답안이 오류라면 답안지 바깥에서 답을 찾아볼밖에. 로맹 가리에게 답안은 대양에 있었다.

그러나 로맹 가리가 인간에게 느꼈던 건 증오가 아닌 애증이었다. 그는 부당함과 부조리에 여전히 분노할 줄 아는 ‘청년’을 마음속에 품었기 때문이다.

기억과 교감에서 비롯한 일말의 인간애를 놓을 수 없는 그는 결국 다시 인류에 눈을 돌려 그 안에서 해답을 찾고야 만다. 사랑을 위해 미군에서 탈영하고 또 흑인 투사인 아버지의 기대마저 저버린 발라드, 그리고 그의 하얀 피부의 연인 마들렌. 이념과 국경과 인종을 넘어선 두 사람의 사랑은 진정 인간 화해의 모범이라고 로맹 가리는 말한다.

발라드가 일어나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 검은 뺨에 닿은 저 하얀 살결은 내가 부러운 눈길로 염탐하는 이 커플에게 절대적 완벽성을 부여했다. 서로 대조된 자들이 부족함을 보완하려고 자연스레 서로를 찾을 때의 완벽성. 이것은 세상의 위대한 법칙 가운데 하나였다. (…) 나는 눈앞에 해결책을 보고 있었다. 임신한 이 백인 여인의 배 속에 든 해결책. 유일하게 가능한 미래는 이런 대조의 조화다. 그것은 언제나 이 땅에서 가장 뿌리 깊은 법칙이었다.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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