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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태영호, 이영환
머리말 1장 시련 정치보위부 지하 감방 회령시 안전부 감방으로 이 잡이와 꽃제비 참상 2장 탈출 보위사령부 백산초소 머나먼 길주로의 호송 살인 소굴 재탈출 3장 만장 중국 장백에서 만장까지 인정 깊은 파출소 소장 감방에서 사귄 친구 4장 량강도 정취보위부 재수감 안전부 집결소의 하루 뽐뿌와 직승기 처벌 5장 광명 함경남도 안전부 호송 친인척 상봉과 결별 다시 중국 연길로 재탈출 맺는말 일본어판 후기: 이산하 자녀 후기: 한봉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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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결소의 하루하루는 강제 로동으로 시작되며 심문과 고문, 노예적 굴욕과 인권 유린, 인권 침해, 강제 로동으로 끝난다. 이른 아침부터 정복 입은 승인된 도적놈들의 채찍 밑에 들볶이며 일터로 떠나는 죄수들의 몰골은 참으로 측은해 보인다. 살 빠진 어깨 우에 푹 움츠러든 가느다란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안전원 선생님들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는 그들은 모두가 생기 잃은 얼굴로 삶을 귀찮아한다.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사는 비참한 노예의 운명을 지닌 인간들의 집단이다.
- 감방 안에서 죄수들 호상끼리 허물없이 하는 말이었다. 비좁은 감방 안 조용한 곳에서 죄수 동료끼리만 할 수 있는 공통된 말이다. 이 좁은 살창 안이 아닌 그 밖의 어느 공간에서든지 할 수 없는 이야기다. 자기 생각을 자기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세상, 자유로운 남의 말을 자기의 귀로 자유롭게 들을 수 없는 세상, 남의 좋은 것을 자기의 밝은 눈으로 자유롭게 볼 수 없는 세상, 이것이 오늘의 북조선이다. 아 세상이여, 자유의 공간은 이다지도 좁단 말인가! - “야, 이 새끼야, 너 왜 중국에 갔댔어?” “야, 이 새끼 솔직히 말해라. 다 알고 묻는데 왜 거짓말을 해?” 그렇게 말하며 나의 아랫도리를 발로 마구 차며 행패를 부린다. 나는 처음으로 구타당했다. 내가 신음을 내자 또 주먹으로 두 뺨을 엇바꿔 가면서 강타를 들이댄다. 내가 두 팔꿈치로 얼굴을 가리면서 그자의 주먹 강타를 피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금방 가지고 들어온 몽둥이로 몸의 아무 부위나 관계하지 않고 마구 두들겨 패는 것이다. 나는 불의에 가해지는 예상치 않았던 매질 앞에서 어쩔 바를 모르고 이리저리 몸을 돌리면서 피하려고 했으나, 수쇠 찬 몸이다 보니 두들겨 주는 대로 맞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 탈북 후 1년 만에 다시 돌아오는 조선의 지리와 마을, 사람과 자연, 숨 막히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그 속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이 삼삼히 떠올랐다. 길가에서는 1년 전 내가 조선을 떠날 때와 다름없는 백성들의 참상이 펼쳐졌다. 기름때 반들거리는 꽃제비 아이들의 정기 잃은 눈동자, 휘청거리며 방랑하는 거지 옷차림의 중년 사나이들과 로인들, 무거운 짐을 두 어깨에 걸머진 배낭꾼 행인들, 허약에 걸린 젊은 병사의 무질서한 움직임. 그런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 그 누가 맨 처음 신선한 꽃과 제비의 이름을 따내 ‘꽃제비’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아마 처음에는 불쌍한 어린이를 동정해서 꽃 같은 제비로 칭했으리라. 옛날에는 말조차 없었던 꽃제비라는 단어가 생겨나고 그 이름의 주인공들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전국 도처에 나다니고 있다. 이제 갓 말을 배우는 젖먹이 어린애들도 꽃제비의 참뜻을 알고 있으니 이 얼마나 큰 민족의 수치인가! 허 씨의 눈물겨운 인생학 강의를 들으며 지금은 비록 목숨 붙어 살아가고 있으나 얼마 있지 않으면 또 새로운 꽃제비로 태어날 수많은 조선의 꽃제비 세상을 그려 보면서 또 하루 감방 속에서의 밤을 지새웠다. - “하늘에 계시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이시여. 이 땅의 교형리들에게 끌려가 죽음의 시각에 박두한 불쌍한 이 자식은 오직 하느님의 신비한 힘의 구원을 받아 살아나기를 바라오며 다시 사랑하는 처자와 만나 귀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나는 달리는 차의 적재함 감방에 홀로 앉아 하느님께 자꾸자꾸 또 자꾸 빌고 또 빌면서 구원을 청했다. 죽음을 경각에 둔 이 순간 나는 그 어디에 하느님이 계시어서 옛 이야기 속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환상 같은 현실이 나를 구원해 주기만을 바랐다. - 이 순간 나는 심장이 높이 뛰고 숨소리가 커지는 감을 느낀다. 이 순간이 결정적 탈출의 시각이라고 락착지었다. 바로 이 순간이 자비스러운 하느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여 주신 귀중한 전환의 최후 순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집결소 정문으로 다가가서 빗장을 밀어버리고 출입문을 연 다음 캄캄한 마을 속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단층집 마을의 복잡한 골목길을 요리조리 에돌면서 집결소에서부터 멀리멀리 사라졌다. 집결소 마을을 끝까지 다 지나가고 동쪽에 나타난 낮은 야산 과수원 고개를 하나 넘어 멀리 다른 동네까지 갔다. 자유의 몸이 되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탈출의 순간이었는가! 성공한 탈출의 기쁨으로 하여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앞을 볼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할 수 없는 살벌한 총부리 앞에서 나를 구원한 것은 오직 고마우신 하느님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때 나는 반룡산 중턱에 안치된 할아버지 묘지 방향의 높은 하늘을 향해 고마우신 하느님께 세 번 허리 굽혀 인사하였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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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둠의 세계, 북조선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 북녘 주민 모두가 자유를 찾고, 노예에서 해방되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내가 대한민국에 못 가더라도 이 글만은 반드시 출판되어 북조선 사람들이 김일성 부자의 잔인한 독재체제에서 얼마나 많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고, 신음하며 살고 있으며, 자유를 갈망하고 있는지 알려야 한다.” - 저자가 3번째 체포돼 북으로 강제 송환되기 직전 차녀에게 남긴 말
북조선 인텔리의 자유?인권?민주주의 향한 목숨 건 여정! 세 번 탈북, 세 번 체포…中 연길 감옥, 北 보위부?안전부 감옥 수기 희망 잃은 조선 땅을 떠나며 피로 쓴 원고…폭정 종식 앞당기는 무기되길 북한 체제에 충실하게 살던 인텔리 한원채는 1998년 7월 30일 아내와 자녀 3명(2녀1남)과 함께 정든 고향 집을 떠나 8월 1일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했다. 숱한 백성이 굶어 죽어도 관심도 대안도 없는 체제와 6?25 월남민 가족이라는 출신 성분의 멍에를 벗어날 수 없는 연좌제의 굴레, 봉건 세습과 선군정치로 표방된 군국주의 김일성 일가 독재에 불복하겠다는 반발심이 탈북을 결심하게 했다. 노력과 능력만으로는 출세에 한계가 있는 자기 자신의 처지와 대학을 졸업한 두 딸, 고등중학교(고등반)에 재학 중인 외아들의 희망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도 강력한 탈북 동기로 작용했다. 조선인민군 후방총국 직속 길주팔프련합기업소에서 설계원이자 설계실 당세포 부서기(정치보위부 비밀공작원)로 30년 이상 근무한 한원채는 “옹근 반세기 동안 공화국 공민으로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창조하며 참답게 살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평범한 인텔리 가장이다. 아내는 철도국병원 내과의사였다. 그는 “내가 타고 앉아 사는 지구촌이건만 이 지구촌의 이모저모에 대하여 다 알 길 없는 나로서는 오직 내가 살고 있는 조선이야말로 세계 제일의 보금자리인 양 싶었고, 조선 경외에 사는 모든 인간은 최악의 생활 조건에서 조선이라는 리상촌을 부럽게 바라보며 건국해 살아가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토로한다. 이어 “조선의 당과 조선의 모든 국가 관저, 행정기관은 백성들에게 그렇게만 선전하였고 그렇게만 교육하였으니 달리 생각할 리 만무하다”고 고백한다. 속으며 살아온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죽어라 일을 해도 부가 없는 세상, 부를 창조한 사람이 그 부를 소유하지 못하고 부를 가로채는 자가 부의 향유자가 되는 사회, 사회악의 쓰레기통에서 사회 악취를 숨 쉬며 사느니 차라리 그 속을 탈출하는 거기에 바로 나의 인생철학이 있었다. 하여 나는 정든 고향 땅과 고향 집, 손때 묻은 가장집물을 그대로 남겨두고 이국의 하늘 아래로 서슴없이 달려온 것이다.” “사람들은 못살고 권세 없고 자유 없고, 인간다운 생활이 마비된 그 근본이 누구의 탓인지와 전 세계 사회주의 대진영이 송두리째 무너진 원인도 다 사회주의 체제 자체의 모순성과 열악성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나, 수많은 조선의 인민들은 체제와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너무나도 아름차고 힘겨우니 어쩔 수 없이 탈북하는 것으로써 당국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6·25동란이 끝난 지도 어언 반세기가 다 되었건만, 인민들에게 이밥에 고깃국에 비단옷 입고 기와집에서 살게 하겠다고 염불처럼 외우던 말버릇이, 지금은 그 말조차 사라지고 계급투쟁이라는 창끝같이 예리한 말만이 온몸을 오싹오싹 자극하는 랭혹한 사회주의 조선에서, 억눌리고 짓밟혀 살기보다 자유롭게 열린 환한 세상에서 잠시라도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는 것이 나의 장기라고 생각되었다.” “오늘의 조선 사회는 이밥에 고깃국에 비단옷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림과 고역에 시달려 만백성이 아우성치며 살아가고, 또 죽어가고 있으니 평백성이나 간부나 할 것 없이 빈민을 구제하지 못하고 강 건너 불 보듯 하니, 조선 안에 사는 백성의 아픈 랭가슴 어디서 풀 수 있으랴! 당국자들은 입만 열면 전쟁 준비를 잘해서 무자비한 전쟁으로 전 남녘땅을 타고 앉아 불로 다스리며 잘 살아가자는 야망만 설교하니, 이제는 듣기도 거북하여 귀에서조차 신물이 날 지경이다.” “나는 사회주의 조선의 비현실적 존재를 깊이 인식했고, 오늘의 조선과 래일의 조선에 대한 전도를 어렵지 않게 판단했었다. 오늘의 조선은 존재하나 래일의 조선은 희미해지다가 점점 어두컴컴해지고 나중에는 영영 사라지는 모습이다. 사회악의 범람과 무능 무례한 당국의 처사, 실천과 현실을 외면한 허망한 주체사상은 나로 하여금 탈북의 길을 재촉했다. 사회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나도 힘이 약하고, 대항하다 쓰러지면 모든 것이 허사이고 끝장이며 무모한 죽음뿐이다. 하기에 그 사회 안에서가 아니라 그 사회를 등지고 탈북하는 것으로써 당국과 맞서는 것이 추세로 된 것이다.” 중국에서 1년 간 체류하며 한국행을 추진하던 한원채는 1999년 8월 아들과 함께 누군가의 신고로 중국 장백향파출소 공안에 체포돼 10월까지 3개월 동안 중국과 북한에서 지옥을 연상하는 지독한 감옥 생활을 하였다. 처음엔 중국 연길 감옥에서 룡정변방대 감옥으로, 거기에서 다시 조선 회령시 정치보위부 감옥과 회령시 안전부 감옥을 거쳐 회령 백산초소 감방 맛을 보았다. 다시 호송되어 함경북도 길주 보위부에 감금되었다. 그곳에서 탈출하여 중국 장백현을 거쳐 만장까지 갔다가, 만장변방대에 다시 체포되어 구류장 생활을 하다가, 북조선의 량강도 보위부 감방과 도안전부 집결소 감옥을 거쳐 함경남도 안전부에까지 호송되었다. 중국과 조선 감방 생활 3개월 동안 한원채는 강제 로동에 시달리며 온갖 악형과 고문, 심문을 받았다. 특히 장작과 고무몽둥이, 칼고리줄을 이용한 폭행을 비롯해 목 뒤에 두 손가락을 끼고 수백 번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는 뽐뿌 처벌, 오토바이 탄 자세로 오래 서 있게 하는 오토바이 처벌, 사지를 잡고 위로 던졌다 놓는 직승기(헬리콥터) 처벌, 전기봉 고문 등 듣도 보도 못한 온갖 고문과, 밥도 제대로 보장 안 하며 매질과 함께 새벽까지 이어지는 강제 로동, 죄수 상호간 비판과 폭력을 조장하는 감방 내 사상투쟁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인권 유린을 직접 당하거나 목격했다. 3달 새 체중이 20kg(75→55kg)이나 빠졌다. 중국에 어떤 정보를 빼돌렸느냐, 남한 안기부나 교회와 접촉하지 않았느냐를 집중 추궁받았다. 태영호 전 공사는 추천사에서 “90년대 중반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수많은 사람이 떼죽음 나던 시기, 그들의 소망은 중국으로 건너가 식량을 얻어 생명을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굶어 죽게 된 인간이 배를 채우기 위해 먹을 것을 찾아가는 것은 일종의 본능이다. 그러나 북한 체제는 굶주림을 피해 살아남으려는 평범한 인간의 본능조차 허용되지 않았다”며 “북한은 중국으로 건너간 탈북민을 발견할 경우 그들에게 모진 고문을 가했다. 중국으로 식량을 구하러 갔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먹을 것을 찾아 철창 밖으로 나가는 일조차 금하는 것이 바로 북한 체제이다. 이런 반인륜적인 체제는 아직 역사가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태 전 공사는 이어 “4·27 판문점 선언 이후 이 땅에는 북한의 수천만 노예들의 운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김 씨 일가라는 노예주들과 사이좋게 지내려는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며 북한 주민의 인권문제를 외면하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간접 비판했다. 북한인권 단체인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의 이영환 대표도 추천사에서 “한원채 님의 수기를 읽는 내내 감정의 격랑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감수성 풍부한 독자라면 읽는 내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있을 것이다. 행간마다 강렬하게 배어있는 저자의 거친 숨결이 바로 그것이다. 끝까지 정독하려면 의식적으로라도 저자와 호흡을 맞추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자가 겪은 질식할 것 같은 고통과 당장 닥칠 것만 같은 죽음의 공포를 고스란히 느끼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영환 대표는 이어 “이 수기는 분노와 무력감, 슬픔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끝없는 폭력과 잔혹한 고문, 강제노동과 거듭된 이송, 숨소리 내기조차 두려운 탈출길. 그 속에서도 저자는 북한 주민들과 아이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잔인한 체제를 통렬히 비판하고 세상에 알리려는 필사적인 기록 작업 중에도 고통받는 처지에 놓인 다른 이들의 삶까지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저자의 인간애가 느껴진다”며 “이 참혹하고 귀중한 기록은 세계의 인권운동가들과 자유를 받드는 언론인, 출판인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19년 전 저자가 든 ‘자유의 필봉’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여하한 행동으로 이어져 폭정의 종식을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응원했다. 미국 국무부는 2019년 6월 20일(현지시간) 발표한 ‘2019 인신매매 보고서’에서 북한과 중국 등 21개국을 최하위인 3등급(Tier3) 국가로 지정했다. 3등급은 한 국가의 인신매매 감시와 단속수준을 평가하는 1∼3단계 가운데 가장 낮은 최악의 단계다. 이는 정부가 인신매매 방지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최소한의 기준과 규정도 미흡한 것으로 판정 받았다는 의미다. 북한은 2003년부터 17년째 ‘최악의 인신매매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국무부 보고서는 “북한 정부는 인신매매를 다루기 위한 어떤 노력도 보여주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성인과 아동의 집단 동원을 통한 강제 노역·수용소 훈련·외국 기업으로의 강제 노역 수출 등을 통해 국가가 후원하는 인신매매를 지속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국무부는 또 북한은 잠재적 인신매매 피해자가 중국 등 타국서 송환됐을 때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며, 북한과 중국을 묶어 거론했다. 이는 중국으로 건너간 탈북민들이 현지 공안 당국에 적발될 경우 대부분 강제 북송되고 있는 현 상황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원채의 세 자녀는 2001년 8월 대한민국으로 무사히 입국했다. 큰딸은 결혼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고, 둘째 딸은 한의대를 나와 한의원을 개원해 어머니의 뒤를 이어 의료인의 길을 걷고 있다. 직장에 다니는 막내인 외아들은 지난해 결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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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에는 수천만 북한 노예들의 운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예주와 사이좋게 지내려는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평범한 인텔리 한원채 씨가 남긴 이 글을 통해 북녘 주민들의 절규에 대한민국이 과연 어떻게 응해야 할지 그 해답을 찾길 바란다. -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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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식할 것 같은 고통과 당장 닥칠 것만 같은 죽음의 공포가 배인 저자의 거친 숨결이 행간마다 강렬하게 녹아있다. 목숨과 바꾼, 중국과 북한의 감방에서 절규하며 피로 쓴 이 수기가 노예공화국 북한의 폭정 종식을 앞당기는 강력한 무기가 되길 소원한다. - 이영환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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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애써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 복지의 혜택을 북녘으로 확산하는 것이 통일운동이다. 과거 군사정부가 그러하듯 북조선은 해체·해방의 대상이다. 독재자와 평화를 논하는 것은 평화에 대한 모독이고, 민족문제를 논하는 것은 민족에 대한 반역이다. - 조정진 (세계일보 논설위원/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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