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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솔제니친―『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Ⅱ 솔제니친의 장편소설들 부록: ‘객체들의 총체성’과 ‘운동의 총체성’ 옮긴이의 말: 루카치의 마지막 실제 비평 『솔제니친』 |
Gyorgy Lukacs,게오르그 루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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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 책의 역자입니다.
2019-09-06
잘못을 바로 잡습니다. 13쪽 각주 4) 8번째 줄 “노벨러들의”는 “노벨레들의”의 오식입니다. 혹시 다른 오역이나 오식(誤植)이 있으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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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소련문학에서도 진보의 힘들은―서정시를 별도로 친다면―노벨레 주위로 집중되고 있다.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만이 유일하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아는 한 그가 스탈린적인 전통의 이데올로기 장벽을 부수고 진정한 돌파구를 만드는 데 성공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그에게는―그리고 같은 지향을 가진 작가들에게는―앞서 거론한 중요한 부르주아 작가들의 경우와는 달리 한 시기의 종결이 문제가 아니라 시작이 문제이며, 새로운 현실의 최초의 탐색이 문제이다. 이를 밝히는 것이 이어지는 설명의 과제이다.
--- p.15 오늘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중심 문제는 스탈린 시대를 비판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전체의 주요 과제이다. 여기에서 나는 문학의 영역에 한해서 논할 것이다. 스탈린 시기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마저 왕왕 경멸적인 욕설로 되어버린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1920년대에 획득했던 수준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현재의 인간을 리얼하게 형상화하는 길을 되찾아야만 한다. --- p.16 그런데 문제는 결코 단순히 일회적인 사건 및 이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그것들의 연쇄이다. 항상 이전의 반응은 그 후에 행하는 반응의 중요한 계기이다. 따라서 과거를 들춰내지 않은 채 현재를 발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사회주의적인 당대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문학적 자기 재발견을 위한 의미심장한 서곡이다 --- p.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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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의 르네상스”를 위한 문학비평적 실천
책은 솔제니친에 관한 두 편의 평론과 『역사소설』(Der historische Roman)의 한 부분을 담고 있다. 책에 실린 첫 번째 에세이 「솔제니친―『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Solschenizyn: Ein Tag im Leben des Iwan Denissowitsch”)는 1964년에 처음 발표된 글이다. 이 글에서 루카치는 1962년에 세상에 나온 솔제니친의 노벨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중심으로 그의 몇몇 노벨레를 고찰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글에서 거대한 역사적 시야와 문학사적 안목, 그리고 미학 및 문학이론과 작품 자체에 대한 섬세한 고찰이 한 편의 문학비평 속에서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루카치가 1969년에 집필한 두 번째 에세이 「솔제니친의 장편소설들」(“Solschenizyns Romane”)은 솔제니친의 두 편의 장편소설, 즉 『제일권(第一圈)』과 『암병동』을 다루고 있다. 특히 이 글은 루카치 자신이 구축한 마르크스주의 존재론에 입각한 문학이론과 문학비평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데, 그의 존재론이 마르크스주의의 스탈린주의적 왜곡을 극복한 “마르크스주의의 르네상스”를 위한 작업이듯이, 루카치의 솔제니친 읽기는 스탈린주의 및 스탈린식 ‘사회주의 리얼리즘’과의 총체적 단절을 통과하고서야 이룩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재생을 위한 작업이다. 루카치는 솔제니친의 작품들을 그러한 방향의 흐름 한가운데에 있는 것으로 읽는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부록]으로 수록된 「‘객체들의 총체성’과 ‘운동의 총체성’」은 1936~37년에 집필된 『역사소설』의 일부를 옮긴 것이다. 루카치의 ‘중기 문학론·소설론’에 해당하는 이 글을 통해 우리는 그의 ‘후기 문학론·소설론’에 속하는 『솔제니친』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솔제니친』에서 계속 거론되는 노벨레와 장편소설, 그리고 극문학에 대한 미학적 이해를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재생을 알리는 문학적 성취로 읽다 세간에 ‘반공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진 솔제니친의 작품들을, 루카치는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재생을 알리는 문학적 성취로 읽는다. 루카치의 두 편의 에세이는 그의 그러한 해석과 평가가 그리 역설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실상에 부합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솔제니친의 문학적 업적에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는 이 책에서도 루카치는 솔제니친의 문제적 지점들을 잊지 않고 있는데, 책 말미에서 루카치는 솔제니친의 장편소설이 노정하는 “평민주의” 경향과 이를 문학적으로 넘어서게 하는 “리얼리즘의 승리”의 부재 등을 이데올로기적·미학적인 한계로 지적하고 있다. 루카치의 이러한 지적은 루카치 사후에 솔제니친이 나아갔던 행보에 대한 우려 섞인 예측이자 사태에 선행한 만류로 읽힌다. 루카치의 솔제니친 읽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내용적·이데올로기적인 비평뿐만 아니라 이와 떼려야 뗄 수 없게 결부된 마르크스주의적 “장르 비평”을 만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 장르 개념이 갖는 전략적 가치”가 “개별 텍스트에 대한 내재적이고 형식적인 분석을 형식의 역사 및 사회적 삶의 전개 양자에 관한 통시적 전망과 통합시켜주는 그 매개 기능에 있다”면,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가 바로 『솔제니친』이다. 사유의 유연함, 부단한 자기갱신의 성과로 읽을 수도 있는『솔제니친』 『솔제니친』에서는 1930년대 초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루카치가 제시한 마르크스주의적 문학론·소설론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확인할 수도 있다. 루카치는 1960년대를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가 동시에 위기에 봉착한 역사적 국면으로 읽는다. 루카치는 인류가 위기를 극복하고 인간해방의 길로 나아갈 수 길을, 본래의 마르크스에 입각해서 마르크스주의를 총체적으로 재구축하는 데에서 찾는다. 그리하여 루카치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유물론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론으로 재구성하는 새로운 이론적 작업을 시도했는데, 『솔제니친』은 그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문학비평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로 1930년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그의 기존의 문학비평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데, 이를 두고 이론적 파탄으로 평가하는 입장도 없지 않다. 하지만 새로운 사회역사적 상황, 새로운 인간문제에 반응하는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의 결과가 자신의 이론 일부를 허무는 것까지 용인하는 사유의 유연함, 사유의 부단한 자기갱신이 거둔 성과로 ··솔제니친―·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