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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 황건적의 봉기 1. 시대적 배경 2. 태평도 3. 봉기와 실패 2. 동탁의 난 1. 환관과 외척의 마지막 투쟁 2. 동탁의 등장과 ‘동방’ 지역 군대의 봉기 3. 동탁의 피살과 관중의 파괴 3. 조조와 원소의 승부 1. 조조와 원소의 출신 배경 2.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다 3. 조조의 둔전 4. 원소의 실기 4. 관도대전 1. 당시 사람들의 승패 예측 2. 관도대전의 서막 3. 관도대전 4. 조조의 하북 평정 5. 적벽대전: 천하삼분의 출현 1. 전쟁 전의 형세 2. 손권과 유비의 연합 3. 적벽대전과 형주의 분할 6. 조조의 관중 획득 7. 유비의 익주 획득 1. 유장의 인자함과 유약함 2. 유비의 촉 입성 3. 유비의 익주 탈취 8. 조조와 유비의 한중 쟁탈전 1. 장로의 정교합일 통치 2. 조조의 한중 점령 3. 유비의 한중 탈취 9. 손권과 조조의 회남 쟁탈전 10. 손권과 유비의 형주 쟁탈전 1. 반드시 쟁취해야 할 땅 2. 여몽의 형주 습격 작전 3. 이릉 전투 11. 삼국의 정립 12. 위의 사회와 정치 1. 자연경제 2. 둔전, 둔전객, 사가 3. 호족과 의부민 4. 관대한 정치와 가혹한 정치 13. 오의 사회와 정치 1. 강남의 개발 2. 병권의 세습화 3. 호족과 유력 가문 4. 정치적 비극 14. 제갈량의 촉한 통치와 남정북벌 1. 제갈량의 촉한 통치 2. 남중 정벌 3. 북벌 4. 촉한의 유학 15. 건안문학 1. 시대와 전통 2. 「위초중경처작」과 채문희의 「비분시」 3. 조조 부자 4. 건안칠자 16. 사마의의 정권 탈취 1. 사마의의 출신과 출세 2. 정변과 권력의 탈취 3. 사마씨 정권 탄생의 사회적 기초 17. 조씨와 사마씨의 유혈투쟁 1. 이풍·하후현의 피살과 조방의 폐위 2. 관구검의 회남 거병 3. 제갈탄의 회남 거병 4. 고귀향공의 피살 18. 현학의 흥기 1. 유학에서 현학으로 2. 하안과 왕필 3. 혜강과 완적 19. 촉한의 멸망 1. 촉한의 후반기 2. 종회·등애의 촉한 섬멸 20. 손오의 멸망 1. 잔인하고 포악한 손호 2. 오의 멸망과 서진의 삼국의 통일 맺음말 주 부록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펴낸이의 말 찾아보기 |
何玆全
崔高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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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점과 분석은 매우 많다.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인용하여 주석으로 밝힌 것을 제외하면, 이 책의 내용은 대체로 모두 나의 독창적인 주장이다. …… 내가 삼국의 역사를 연구하며 얻은 깨달음과 이해, 인식은 이 책에 거의 모두 들어가 있다. 나는 되도록 생생하고 알기 쉬운 문장을 추구했고, 문장의 가독성과 흡인력에 신경을 썼다. 그래서 독자들이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였다. --- 「머리말」중에서
『삼국지』의 결점은 너무 간략한 내용에 있다. 그래서 남조(南朝) 유송대(劉宋代)의 배송지(裴松之)는 송 문제(文帝)의 명을 받들어 『삼국지』에 주석을 달았다. 동진(東晉) 이후로 삼국시대사와 관련된 사료가 점점 증가했으므로, 배송지는 그런 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했다. 그의 『삼국지』 ‘주석’은 실제로는 『삼국지』의 ‘보완’(補完)이었다. 배송지는 『삼국지』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삼국지』를 읽을 때는 반드시 배송지의 주석을 함께 읽어야 한다. --- 「머리말」중에서 통일제국이었던 동한의 와해와 분열 국면의 출현을 논의하려면, 황건적의 폭동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삼국연의』는 황건적의 폭동부터 이야기를 시작함으로써 나름대로 안목과 식견을 보여준다. --- 「1장」중에서 동한 말년에는 인물을 품평하는 풍조가 매우 성행했다. 이것은 당시의 정치 부패가 불러일으킨 풍조였다. 사대부 계급은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으면서도 당시의 여러 사건에 관한 관심을 거둘 수 없었고, 결국은 격분하여 정치와 인물을 품평했다. 그리고 정치를 평론할 수 없게 되자, 인물에 대한 품평만 남게 되었다. --- 「3장」중에서 형주차용설은 다분히 강동에서 처음 유포한 것으로, 그다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형주는 원래 유표의 땅이었다. 유표가 죽었을 때 아들 유기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래서 유비가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추천한 것이다. 이것은 명분에 맞고 이치에도 합당한 사실로서, 손권이라 한들 반박할 근거가 없었다. --- 「5장」중에서 적벽대전에서 주유가 이끈 강동의 병력은 3만 명이었고, 유기의 병력을 더한 유비의 병력도 2만여 명이었다. 적벽대전의 승리는 손권과 유비 두 세력이 공동으로 거둔 성과였다. --- 「5장」중에서 관우의 출병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감행한 군사적 모험이었다. 설령 모험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관우의 최대 성공은 양양을 점령하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따져보면, 양양을 점령할 가능성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 이른바 조조가 허도를 나와 다른 곳으로 천도하여 관우의 공격을 피하려 했다는 기록은 사후에 덧붙여진 소설 같은 이야기로, 역사에 재미를 가하려는 설정일 뿐이다. 실제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 「10장」중에서 손권의 재위기에는 장강 이북의 대규모 인구가 각종 원인으로 강남으로 이주하거나 이주당하는 일이 항상 있었다. 동오도 북방과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약탈을 감행하여 사람을 빼앗아왔다. 노동력이 있어야 토지를 개간하고 실력을 증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13장」중에서 주유와 노숙의 가문은 강동에서 그리 단단한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주유의 두 아들 중 장남은 일찍 죽었고, 차남 주윤은 품행이 바르지 않아 관직에 기용되지 못한 채 죽었다. 주유의 조카 주준은 일찍이 주유의 공적 덕분에 편장군에 임명되어, 관리와 병사 1000명을 거느렸다. 주준이 죽자, 그의 아들 주호 또한 “성품과 행실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기용되지 않았다. 이후 주유의 가문은 오에서 사라져 종적이 묘연했다. --- 「13장」중에서 유비가 생존했을 때, 제갈량은 정치 방면의 주요 참모였고, 군사 방면은 전적으로 유비가 결정을 내렸다. 제갈량은 군사적 결정에 거의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군사적 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경우 역시 거의 없었다. 제갈량은 유비의 사후에야 비로소 촉한의 정치와 군사에 대한 전권을 맡았다. --- 「14장」중에서 명제의 재위 시절에 벌어진 사치풍조와 반사치풍조의 싸움은, 사실 똑똑하고 재능이 있으며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던 일군의 사람들과 예법을 엄격히 고수하며 명교(名敎)에 얽매였던 일파 사이의 투쟁이었다. --- 「16장」중에서 이 책의 장점은 이루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지은이는 국내의 애호가들이 궁금해 하거나 이들 사이에서 논쟁 중인 여러 문제에 대해 사료적 근거와 합리적인 추론을 바탕으로 적합한 답안을 제시했고, 국내 애호가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알 수 없었던 숨은 역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삼국 시대에 벌어진 여러 사건에 대한 중국 역대 학자들의 평가와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도 알차게 소개하고 있다. 지은이가 「머리말」에서 “논점과 분석의 측면에서는 내가 사마광보다 더 뛰어날 것”이라고 호언(豪言)한 것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옮긴이의 말」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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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학계의 원로이자 위진남북조사의 대가가 쓴 필생의 역작!
사마천의 문장과 사마광의 사관으로 써내려간 박력의 역사서!! 이중톈 등 현대의 모든 삼국시대 연구자가 인용하는 삼국시대사의 바이블!!! 삼국시대를 전공한 역사학자가 서술한 위·촉·오 삼국의 역사 소설 『삼국지』의 영향으로 꽤 많은 한국의 독자들은 『삼국지』에 관한 나름의 지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독자들의 수요에 맞춰 그간 국내의 여러 아마추어 『삼국지』 애호가들이 나름대로 『삼국지』를 해석한 저작을 꽤 많이 출간했고, 일본과 중국 학자의 저술도 상당히 번역·소개되었다. 그러나 이런 국내 저술 대부분은 아마추어의 설익은 도전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국내에 소개된 중국·일본 학자들의 저술 역시 삼국시대를 전문적으로 전공하지 않은 학자들이 쓴 일반적인 개설서이거나 중문학 전공자들이 소설 『삼국지』의 지식을 바탕으로 서술한 통속용 대중서인 경우가 많았다. 이 책은 위진남북조사의 권위자인 지은이가 삼국봉건론(또는 위진봉건론)이라는 나름의 시각을 바탕으로 일관되게 삼국의 역사를 저술한 삼국시대사 저작이다. 위진남북조사 전체가 아닌, 100년 남짓한 삼국시대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전문적인 모노그래프를 저술한 역사학자는 중국에서도 극히 드물다. 특히 이 책은 후한의 분열과 삼국의 정립 및 통일 과정 등 정치사·전쟁사적 측면 이외에도, 당시의 경제상황과 토지제도, 당시 지식인의 철학과 사상, 당시에 꽃피운 문학작품, 이민족 문제 등 사회사·경제사·문화사·사상사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삼국시대에 대한 전반적이고 포괄적인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삼국봉건론: 중세 봉건사회의 개막 위진남북조사의 권위자인 지은이가 삼국봉건론을 처음 주창한 것은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1950년대부터였다. 그는 도시 중심의 교환경제가 삼국시대부터 농촌의 자연경제로 후퇴하고, 자유민이 몰락하여 의부민(依附民)으로 변화했으며, 토지 겸병 위주의 전쟁이 인구 쟁탈 전쟁으로 바뀌는 등의 여러 가지 현상을 들며 삼국시대의 정립이 중세 봉건사회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였다고 주장한다. 당시 중국의 역사학계에서는 범문란(范文瀾)의 서주봉건설과 곽말약(郭沫若)의 전국봉건설이 마오쩌둥의 비호를 받아 중국은 서주시대, 늦어도 전국시대에 이미 봉건제가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처럼 기존의 통설이 봉건시대의 시작을 굉장히 이른 시기로 잡은 것에 반해, 이 책의 지은이 허쯔취안은 삼국봉건설을 처음 주창함으로써 다른 학자들보다 봉건시대의 시작을 비교적 늦은 시대로 잡고 있다. 이 일로 그는 1960년대 중반에 벌어진 문화대혁명 기간에 마오쩌둥이 지지한 학설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간첩’이자 ‘반동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하방(下放)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학설을 수정하지 않았으며, 이후 1994년에 출간된 이 책의 중국어판에서 자신의 주요 학설인 삼국봉건설을 거듭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학설은 후한 말기를 중국 중세의 시작으로 설정한 바 있는 일본 교토학파의 나이토 코난(內?湖南, 1866∼1934)이나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1901∼1995) 등의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데, 이는 어쩌면 그가 일찍이 일본과 미국에 유학하여 일본과 구미 역사학계의 주요 쟁점과 흐름을 흡수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위·촉·오 삼국의 역사를 생생한 1차 사료만으로 구성하여 서술 최근 1∼20년 사이에 ‘강의’ 형식으로 『삼국지』에 관한 해설서가 많이 번역·출간되었다. 입말로 된 구어체를 구사한 이런 유형의 역사해설서는 대중에게 당시의 역사를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작자의 주관적인 해석을 거쳐 사료의 문장을 풀어서 전달한 부분이 많아 독자들이 작자의 주관적 견해와 사료상의 문헌 내용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런 유의 해설서들은 한문으로 작성된 당시의 1차 사료를 오늘날의 현대 중국어·일본어 문장으로 재구성한 것들이고, 이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여 중역(重譯)의 느낌이 매우 강하다. 또한, 일부 해설서는 번역자나 편집자가 1차 사료의 원문을 직접 참조하지 않고 현대어를 재번역함으로써 독자들이 사료 문장의 신뢰를 의심하는 일도 벌어지고, 이 과정에서 오역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 허쯔취안은 생생하고 알기 쉬운 문장을 추구하고, 문장의 가독성과 흡인력에 신경을 쓰면서도 철저하게 1차 사료에 입각해 “1차 사료의 역사기록을 그대로 인용했다. 그는 그 이유를 고대인이 쓴 역사도 매우 생동감 넘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독자들은 1차 사료를 직접 번역한 이 책을 통해 위·촉·오 시대 당시의 모습을 더욱 핍진(逼眞)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연구자나 애호가들을 위해 사료의 출처와 원문을 모두 수록하고 있다. 철저한 고증과 분석, 풍부한 전투 지도, 사료의 비판적 수용 이 책에서 지은이는 삼국시대 당시의 지명을 철저히 고증하고 있다. 단순히 당시의 어떤 지역이 현재의 어느 곳에 해당한다는 식으로 기존의 학설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곳곳에서 기존에 알려진 통설에 이의를 제기하며 지명에 대한 세밀한 고증을 제시한다. 한국어 번역본은 지은이의 지명 고증에 근거하여 주요한 전투 장면을 그린 지도를 수록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노력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은이는 철저하게 1차 사료만으로 이 책을 서술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당시 사료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10만 대군과 맞서 싸운 조조군의 병력이 1만 명 정도였다는 여러 사료의 기술을 부인하고 있고, 동오의 손권이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다는 ‘형주차용설’에 대해 다분히 동오 측이 유포하여 그들의 입장이 반영된 견해라고 일축하고 있으며, 조조가 마초와 격돌 과정에서 위수를 건넌 일을 묘사한 사료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시하는 등 책의 곳곳에서 당시의 사료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