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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 옮긴이 서문
옮긴이 서문 서문 도전 응답의 시도 계속되는 응답 정치적인 것의 개념(1932년 판) 제1장 국가와 정치 제2장 정치적인 것의 규준으로서의 동지와 적의 구별 제3장 적대관계의 현상형태로서의 전쟁 제4장 정치적 통일체로서의 국가와 다원론 제5장 전쟁과 적에 대한 결단 제6장 정치적 다원체로서의 국가 제7장 정치이론과 인간론 제8장 윤리와 경제의 양극화에 따른 탈정치화 중립화와 탈정치화의 시대 변화하는 중심영역의 단계 중립화와 탈정치화의 단계들 1932년 판의 후기 계론 1. 국가의 국내정치적 중립성 개념의 다양한 의미와 기능에 대한 개관(1931년) 2. 전쟁 개념과 적 개념의 관계에 대하여(1938년) 3. 국제법이 국가와 무관할 가능성과 국제법의 요소에 대한 개관 해제 카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대한 주해 _레오 스트라우스 카를 슈미트 연보 해설: 카를 슈미트의 생애와 정치적인 것의 개념 주석 참고문헌 카를 슈미트의 저작 인명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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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오늘날의 용어법에 따르면 국가는 어떤 지역적 경계 안에 있는 조직된 인민(Volk)의 정치적 상태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국가를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며, 결코 국가에 대한 개념 규정은 아니다. 여기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문제 삼는 경우에는 그러한 개념 규정은 필요하지 않다. 국가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기계인가 유기체인가, 인격인가 제도인가, 이익사회인가 공동사회인가, 경영체인가 꿀벌집단인가, 또는 혹 어떤 ‘기본적 절차’는 아닌가의 문제에 대해서 굳이 답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와 같은 정의나 표상들은 모두 너무나 많은 판단, 의미부여, 설명, 해석을 미리 해 버리기 때문에, 단순하고 기본적인 논술에 적합한 출발점을 마련하지는 못한다. 국가란 그 말의 의미나 역사적 발생에서 본다면 인민의 특별한 상태이며, 더구나 결정적인 경우에는 결정력을 가지는 상태이며, 따라서 생각할 수 있는 많은 다양한 개인적ㆍ집단적 상태에 대한 절대의 상태이다. 여기서는 일단 이 이상 더 말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관념의 모든 표지-상태와 인민-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추가적인 표지를 통해서 의미를 획득하며,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 오해되면 이해할 수 없게 된다.--- pp.31-32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특정한 정치적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 이 구별은 규준이라는 의미에서의 개념 규정을 제공하며, 빠짐없는 정의(定義) 내지 내용을 제시하는 개념 규정은 아니다. 다른 규준들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구별은 도덕적인 것에서는 선과 악, 미학적인 것에서는 미와 추 등 다른 대립에서 보여지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규준들에 대응한다. 여하튼 이 구별은 새로운 고유영역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앞서 말한 하나 또는 몇몇 대립들에 근거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것들에게 귀착시킬 수도 없다는 방식에서 독립적이다. 선악의 대립이 그대로 간단히 미추 또는 이해의 대립과 동일시되지 않고, 또한 곧바로 그와 같은 대립으로 환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적과 동지의 대립은 더구나 이러한 대립들과 혼동하거나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적과 동지의 구별은 결합 내지 분리, 연합 내지 분열의 가장 강도 높은 경우를 나타낸다는 의미를 가지며, 상술한 도덕적·미학적·경제적 또는 다른 모든 구별을 그것과 동시에 적용하지 않아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존립할 수 있다. 정치상의 적이 도덕적으로 악할 필요는 없으며, 미학적으로 추할 필요도 없다. 경제적인 경쟁자로서 등장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어쩌면 적과 거래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게 보일 수도 있다. 적이란 바로 타인, 이방인이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으로 족하다. 따라서 극단적인 경우에는 적과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이 충돌은 미리 규정된 일반적 규정에 의해서도, 또한 ‘국외적이고’ 따라서 ‘공정한’ 제3자의 판결에 의해서도 해결될 수 없다.--- pp.39-40 이와 같은 투쟁의 가능성이 남김없이 제거되고 소멸된 세계, 최종적으로 평화로워진 지구는 적과 동지의 구별이 없는 세계, 따라서 정치가 없는 세계일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도 아마 다양하고 매우 흥미로운 대립이나 대비, 모든 종류의 경쟁이나 술책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인간에게 생명을 희생하도록 요구할 수 있고, 피를 흘리고 다른 인간을 살해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의미 깊은 대립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도 이와 같은 정치 없는 세계를 이상적 상태로서 바라고 초래할 것인지의 여부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 규정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현상은 오직 적과 동지의 편 가르기라는 현실적 가능성과 관련을 가짐으로써만 이해되는 것이며, 거기에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어떤 종교적?도덕적?미학적?경제적 평가가 나오는지는 관계가 없다.--- pp.48-49 적과 동지의 구별이 사라지면, 정치생활도 없어진다. 정치적으로 실존하는 국민은 서약적인 선언에 의해서 이러한 숙명적인 구별을 피할 수는 없다. 국민의 일부분이 더 이상 어떠한 적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적에 가담하고 적을 돕는 일이며, 이 선언으로 적과 동지의 구별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어떤 국가의 시민들이 자신들은 개인적으로 어떤 적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문제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 왜냐하면 개인에게는 정치상의 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선언으로는 고작해야 현재 자신이 소속하고 있는 정치적인 전체집단으로부터 이탈하여 단지 개인으로서만 살고 싶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아가 개별적인 국민이 전 세계에 대해 우호선언을 하거나 또는 자발적으로 무장해제를 함으로써 적과 동지의 구별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방법으로 세계가 탈정치화하고 순수한 도덕성, 순수한 합법성이나 경제성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한 국민이 정치적 생존의 노고와 위험을 두려워한다면, 그때는 바로 다른 국민이 대신에 그 노고를 없애 주고 ‘외적에 대한 보호’와 함께 정치적 지배를 떠맡게 될 것이다. 그때는 보호와 복종이라는 영원한 관계에 따라 보호자가 적을 규정하게 된다.--- pp.68-69 그동안 경제, 자유, 기술, 윤리, 그리고 의회주의라는 매우 복잡한 복합체는, 그 적수인 절대주의 국가와 봉건귀족주의의 잔재들을 오래 전에 청산하였고, 그 결과 모든 현실적인 의미를 상실했다. 이를 대신해 이제 새로운 결속과 연합이 나타나고 있다. 경제는 더 이상 그 자체로 자유는 아니다. 기술은 쾌적함에 봉사할 뿐만 아니라 같은 정도로 위험한 무기와 도구의 생산에도 봉사한다. 그 진보는 그 자체로서 18세기에 진보라고 생각했던 인도적?도덕적 완성을 성취하지 못한다. 기술적 합리화는 경제적 합리화의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정신적 분위기는 오늘날까지 18세기의 이러한 역사해석으로 충만하며, 적어도 아주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정식과 개념들은 오래된 적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pp.101-102 슈미트의 과제는 자유주의의 좌절이라는 사실로 인해 생겨나게 된다. 자유주의의 좌절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자유주의는 정치적인 것을 부정했지만, 그로써 정치적인 것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은폐했을 뿐이다. 자유주의는 반정치적인 담론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정치적인 것을 말살해 버린 것이 아니라, 단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이해를, 정치적인 것에 대한 솔직한 태도를 말살해 버린 것이다(65 ff. [본서 87쪽 이하]). 자유주의가 가져온 현실의 은폐를 없애기 위해 정치적인 것은 그것 자체로서, 또한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제시되어야 한다. 정치적인 것은 자유주의에 의하여 초래된 그 은폐로부터 우선 명백하게 드러나야 하고, 그럼으로써 국가에 대한 질문이 명확하게 제기될 수 있다. --- p.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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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슈미트,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답하다!
카를 슈미트의 대표작 『정치적인 것의 개념』 개정판 발간 우파의 대표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 좌파 정치철학에 영감을 주다! 20세기, 세계는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냉전이 끝나면서 체제 선택의 경쟁 역시 끝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을 오롯이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라고만 손쉽게 정의할 수 있을까? 외부의 적이 사라진 이후,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자들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커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유럽철학은 무성한 정치철학의 계보를 자랑하고 있는데, 벤야민 이후 좌파적인 성향의 철학자들은 급진적인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도도한 흐름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데리다, 아감벤, 발리바르, 네그리, 무페, 랑시에르, 지젝 등의 이 화려한 이름들이 한 우파 정치철학자와 이어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 철학자가 자유민주주의의 반대편 극단인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공공연한 대변인이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그 정치철학자가 바로 카를 슈미트다. 그런데 어떻게 가장 극단적인 우파 정치철학이 20세기 좌파 정치철학에 풍부한 영감을 제공해준 원천이 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아이러니가 우리로 하여금 카를 슈미트의 문제적 저작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다시 읽게 만드는 이유다. 모든 철학은, 특히 정치철학은 시대적 계기에 의해서 탄생한다. 카를 슈미트 역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혼란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철학을 형성했다. 그에게 있어 바이마르 시대의 정치는, 치열한 갈등과 대결이 필요한 정치적 문제를 의회와 정당 제도라는 형식적인 장치 속에서 한가한 토론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본 시민들의 착각과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슈미트는 결국 이러한 안일함이 무정부주의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보고, 의회주의와 자유주의 등 근대의 정치적 이상에 대해 극단적으로 회의적이며 비판적인 입장에 서게 된다. 슈미트는 특히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자유주의란 국가와 시민 사회,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의 구별을 전제로 하며, 시민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사적인 삶이 국가의 권력으로부터 침해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최우선적인 가치로 놓아야 한다는 자유주의는 그 자체로는 근대 시민(부르주아지)의 위대한 정치적 승리가 가져온 결과이지만, 역설적으로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놓았다. 국가와의 투쟁 속에서 결국 안온한 개인의 사적인 삶을 확보함으로써 정치를 협소한 의회와 정당 제도의 틀 속에 있는 것으로 가둬놓았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별을 제시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은 미적인 것, 도덕적인 것처럼 삶의 근원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미적인 것이 미와 추, 도덕적인 것이 선과 악이라는 이항대립에 기초하고 있듯이 정치적인 것은 적과 나의 구별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대립과 구별을 외면할 때 정치는 비정치적인 것이 된다. 자유주의가 결국 민주주의와 결합될 수 없는 것은, 민주주의가 정치적인 것의 문제인데 반해 자유주의는 그 무엇보다도 비정치적인 사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슈미트는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다원주의 대신 강한 정치적 통일체로서의 국가를 복원하려고 했다. 그가 히틀러의 나치를 옹호하고 결국 쓸쓸하게 은둔의 말년을 보내야 했던 것도 그러한 정치적 과오 때문이었다. 그러나 슈미트 자신의 현실적인 결론과는 상관없이 그가 제시한 사상의 단초들은 경향과 입장을 달리하는 철학자들에게 풍부한 영감을 제공해주었다. 특히 정치적 격동과 혼란이 안정으로 복귀하며 거의 예외 없이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보수적인 회귀로 이어질 때마다, 슈미트의 이론은 다시 호출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현실에서 출발한 냉혹한 실존의 논리 자유민주주의란 본성상 안정적인 정치적 상황에서 법 규범과 의회 정치라는 제도가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슈미트가 지적했듯이 정치에 대한 무관심, 더 나아가 무정부주의로 쉽게 이어지기 마련이다. 더 나아가 통상적인 정치적 긴장을 넘어서 갈등과 혼란의 상태가 빚어졌을 때 자유민주주의는 매우 무기력해진다. 이에 대해 슈미트는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자를 일컫는다.”고 말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선 보다 근원적인 지평에서 정치와 권력의 문제를 보려고 했다. 그는 전쟁, 혁명, 내란 등 극한적인 갈등 상황에서도 무력해지지 않는 권력 이론을 내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강력한 국가에 대한 요청으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슈미트를 읽고 참조하는 이유는 어쩌면 슈미트의 이론이 가지는 악마적인 매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평화와 공존, 대화와 토론 등 ‘똘레랑스’에 대한 신뢰를 우상으로 간주하고 파괴하며, 폭력적인 상황에서부터 출발하는 그의 논의는 기존의 허구를 의심하는 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설득력과 호소력을 준다. 예를 들어, 슈미트는 전쟁의 살육에 어떤 규범적인 의미도 없고 정당화도 불가능하다고 고발하는데, 그러한 살육을 ‘합의’를 통해 결의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의 기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물론 이렇게 비상사태로부터 출발하는 그의 사유는 (독재자의) 결단이라는 귀결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이상으로부터 출발하는 공허한 논의가 아닌 냉혹한 실존의 논리는 거부하고 싶으면서도 귀를 기울이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슈미트와는 다른 시대에 살고 있고,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을 옹호하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정치적 갈등과 혼란, 정치적 무관심의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중요한 문제다. 의회와 정당으로 대변되는 현실 정치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게 되고, 그로 인해 정치적 갈등은 더더욱 풀기 어려운 것이 될 때 슈미트의 주장은 새삼스럽게 그 중요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실정법을 넘어선 정치적 결단을 옹호하는 슈미트의 이론을 지금의 현실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을까?벤야민이나 아렌트,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정치철학자들이 이른바 폭력의 문제에 관해 슈미트와 생각을 달리하면서도 그를 열심히 읽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이 책은 20년 전 법문사에서 출판한 것을 전면적으로 수정한 것이다. 또한 뒤에 해설과 참고문헌 목록을 더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