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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시작을 위한 서른아홉 개의 판타지
이제하
달봄 2012.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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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비취도
바람
곰의 나라
비 맞는 여인
경매
이웃 모래와 모래 사이


유기농의 사랑
늘 보는 그 사람
영원한 방
회오리
돌을 나르는 사람
악어

우산
금욕 마법의 의자
역에서
분서
이불
가지 자르기
사랑의 힘
제품의 효용
지혜의 문
불륜
벌레
사라의 문
어느 턱시도 사나이를 위한 발라드
담배의 해독
새벽의 사람
마그리트 풍경

환상지
뻐꾹아씨, 뻐꾹귀신
신시

저자 소개 1

1937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마산 고교를 거쳐 홍익대 조소과에서 입학했으나, 조각과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1961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3학년에 다시 편입하였다. 「현대문학」, 「신태양」, 「한국일보」 등을 통해 시와 소설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소설집 『초식』『기차, 기선, 바다, 하늘』『용』『독충』등과 장편소설 『열망』『소녀 유자』『진눈깨비 결혼』, 『능라도에서 생긴 일』, 시집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빈 들판』및 영화칼럼집, CD『이제하 노래모음』등이 있다. 이상문학상, 한국일보 문학상, 편운문학상, 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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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10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484쪽 | 492g | 128*188*30mm
ISBN13
9788996895725

책 속으로

결혼할 무렵에는 저들끼리 죽네사네 하던 사이다. 그 틈에 끼어 심심치 않게 얻어먹은 복지리니 파스타니 스테이크 따위를 곰곰 생각하고 본즉, 값보다는 그 향기가 더 짙다. 이럴 수가 없다 싶어 며칠 뒤에 나는 K에게 이메일로 일필을 초했다.
- ‘사랑에 살고 노래에 살고’라는 아리아가 있잖아. 누가 그 아리아를 부르든 그네를 타면 그것을 흔드는 것은 노래요 그것을 멈추는 것은 사랑일세.
- 낙타가 한 마리가 있다고 치세. 앞 등에 튀어나온 혹이 노래라면 뒷등에 붙은 혹은 역시 사랑일세.
- 정밀한 눈금의 자가 한 개 놓여 있네. 처음 눈금이 노래라면 끝의 눈금은 어쩔 수 없이 또 사랑일세.
더 무엇을 설명하리. 재고하소.
대충 이런 내용의 편지였는데, 한 주일이 더 지나 K에게 서 온 답장은 과연 요령부득의 것이었다. --- pp.9-10

“도대체 뭘 확인하겠다는 거야?”
드디어 화가 치밀어 올라 나는 그녀를 닦아세우기 시작했다.
“떠나고 난 뒤에도 모두들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고 상상했다면 그건 오산이야. 한 번 어긋나면 그만야 이놈의 서울이란 데는. 아니 이놈의 세상이란 데는……. 더구나 사내놈들을 그런 식으루 유장하게 봐서는 안 돼. 믿어서두 안 되구. 설령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나타나 봐. 모두 그때뿐이지. 스치고 나면 곧 잊어버린단 말야. 몇 시간을 줄창 한 여자만 생각하고 있을 수 있는 놈팽이가 있다면 내 당장 절을 올리지.”
그녀는 화가 난 듯한 단호한 눈빛으로 빤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더니 결심한 듯이 이윽고 이를 악물었다.
“그래요 우리 한 군데만 더 가요.” --- pp.153-154

응축된 사지의 긴장을 풀어 버리기 위해 오랜만에 도장엘 들렀다.
모두들 반가워해 주었다.
나보다 한 수 높은 녀석을 2단 옆차기로 보기 좋게 메다꽂았다.
"좋긴 한데…… 어쩐지 난해. 어디 나하고 한번 겨뤄 볼까?" 라고 도수님이 말했다.
그가 자세를 잡으려고 돌아서기 직전에 나는 몸을 솟구쳐 공중을 날아 벽공치기로 늙은 도수의 목을 걷어차 버렸다.
시멘트 벽에 부서져라 머리통을 들이받고 나가떨어져 뒹구는 도수님에게 달려가 나는 그 어깨를 부축했다.
도수님은 실신한 듯이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로써 이 도장도 끝장이다. 만약 다시 여길 오면 늙은 도수님의 주먹치기와 돌려차기에 내 어개와 등뼈는 남아나지 않으리라. --- p.256

저승사자는 아파트의 정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떄가 되기도 전에 찾아오는 그 반갑잖은 손님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곳은 후문 쪽이다. 옛날에는 깊고 음습한 숲속이거나 이끼 내음 풍기는 늪 변두리 같은 데가 그 현현처이자 회귀장소로도 알려져 있었으나 요즘 세상에 그런 '전설의 고향'을 믿을 사람은 아무 데도 없다. 후문 쪽은 우선 제지하는 횟수가 적어서도 편리하겠지만, 세상이 아무리 달라졌다고 한들 그렇게 은밀히 스며들어 놀래켜 줄 정도도 못 되면 명부 염라왕의 질책과 뭇 동료 악귀들의 손가락질을 면키도 어려우리라. 사신 혹은 죽음의 전령이라고도 불리오는 그 저승사자는 한순간 말끔하게 아파트 주민의 하나로 몸을 바꾸고, 철책도 표지도 시늉뿐인 그 쓸쓸한 후문입구로 들어선다.

--- p.295

출판사 리뷰

전통적 리얼리스트의 대열에서 삐어져나온 고독한 소설가
예술의 중심에서 시대의 예술사를 쓴 장인의 종합선물세트


1953년 제1회 학원문학상을 받고 1956년 《새벗》에 〈수정구슬〉이 당선되며 데뷔한 이제하는 스스로가 자신의 초기 작품들을 ‘환상적 리얼리즘’이라 일컬은 이래 계속해서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해 왔다. 또 가수 조영남이 부른 ‘모란동백’의 원곡자인 가수이자 화가, 시인, 소설가로서 등단 56년 동안 음악, 미술, 문학 등 전 방위 예술의 중심에서 활발한 예술활동을 펼쳐온 장인(匠人)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번 작품집은 독자들에게 이제하 예술의 진수를 어떻게 보다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심하였다. 이에 작가가 그간 천착해온 주제들을 중심으로 ‘이제하 문학’을 대표할 만한 작품들을 다듬어 수록했고, 거기에 화가로서 그림을 한 편씩 그려 붙였다. 더불어 초판한정으로 ‘이제하 노래모음’ CD를 붙였으니, 이제하 예술의 백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생동감 있는 문장들로 그려낸 마술적 리얼리즘의 절경
삶이라는 파도를 헤쳐 나가는 인간에 대한 찬가


평론가 김화영은 그의 평론에서 “이제하의 인물들이 불구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삶의 통속성, 문화의 진부함, 시대의 조촐성 때문이다. 본원적인 충동의 모습이나 동경의 모습은 뒤죽박죽된 무질서의 모습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화영의 말에서처럼, 이제하의 작품에서는 소설기법의 틀을 깨거나 비일상적인 소재를 택해 무질서하게 느껴지는 세계를 만나게 된다.

곰과 사람이 공존하고 구름을 입속으로 빨아들이는 기이한 마술이 펼쳐지고 개와 사람의 환영이 한데 뒤엉키며, 심지어 10년 전 죽은 아내와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야기까지 등장해 우리의 눈과 귀를 어지럽게 한다. 현재와 과거,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고 독자들의 머릿속에 정비돼 있는 일반 소설의 틀이나 법칙들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린다.

그런데 이러한 고의적 불편이 해묵은 안도감을 파괴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참다운 모습, 우리와 세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들춰낸다. 이에 독자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신기한 상황에 매혹되며 호기심에 호기심을 더하게 된다.

그의 작품세계의 절정에 서 있는 이번 소설집《코》에는 작가 특유의 에로틱한 상상력, 자연 풍광의 서정적 재현, 사투리와 신세대 언어를 한데 아우른 노장의 능란한 기예와 실험정신이 깃들어 있다. 《코》에 실린 짤막짤막한 글들에 담긴 인간 군상의 다양한 감정과 행태에 ‘진짜 삶’이 녹아 있고, 이에 삶의 위대함을 실감할 수 있게 된다.

추천평

여느 단편소설의 반에 훨씬 못 미치는 짧은 글들에 인간 군상의 아름답기도 추하기도, 슬프기도 우습기도 한 행태가 오롯이 담겨 있다. 사랑, 미움, 열망, 엉뚱함, 질투, 분노, 속물근성, 순정, 욕심, 샐쭉함, 짓궂음, 자폭, 사생결단, 소심함, 무모함, 아연실색, 엇갈림, 환상, 등등 사노라면 자신 속에서나 남을 통해 대면하게 되는 상태들을 치밀하고도 담백한 필치로 그려낸 이 책을 ‘인간백과 미니픽션’이라 부르고 싶다.
황인숙
이제하는 한국사회에서는 보기 드믄 ‘경계 없음의 미학’을 지닌 분이다. 그에게는 나이의 경계, 장르의 경계, 이념의 경계 같은 집단주의가 그어놓은 구분선이 없다. 오로지 이제하식 시각이 있을 뿐이다. 일상 속에서 간파해낸 이야기를 담은 이번 책에서도 독특한 시각에 담아낸 ‘경계 없음의 미학’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허연
이제하의 소설은 한국문학사의 큰 축복이었다. 유자의 당돌함이, 비오는 날 국립묘지를 배회하던 청춘들이, 고향으로 향하던 완행열차 안의 형사와 범인이. 모두가 소중한 자산이었고 후배 작가들에겐 큰 버팀목이었다. 그런 선생님이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다. 이제하 선생님을 영원한 청년이라고 부르는데 가히 그렇게 부를만한 이야기들의 향연이다. 소설 속에는 그 어떠한 소리도 들어 있지 않지만 읽다보면 문장 하나하나가 경쾌한 리듬을 내는 음악 같다. 짧지만 긴 여운이 남는다. 대가의 새로운 회귀다. 다시 한 번 축복 속으로.
박성원
설렁설렁 여느 콩트들처럼 가볍게 읽어 넘기려다 허를 찔리고 말았다.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웬 청년 하나가 글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엉뚱한가 하면 신랄하고 신랄한가 하면 짓궂은 이 청년은 간신히 이야기를 따라잡았다 싶으면 교묘히 우리를 따돌리고 저만치서 흰 이를 드러내고 씩 웃는다. 분발해야겠다. 아, 선생님은 늙지도 않으신다.
하성란
이 책에 실린 짧은 소설들을 읽으면서 다시금 확인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익히 알려진 작가의 문예적 촉기가 미상불 문호(文豪)의 경지에 올라 있다는 것이다. 작가에겐 말하지 못할 것, 혹은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 더 이상 남아 있는 것 같지 않다. 제한된 분량에 담긴 이야기가 자유자재(自由自在)에 주류불궁(周流不窮)이라, 막힘이 없고 능히 통하여 신비롭기까지 하다. 우둔하기 마련인 곰에게 마음을 전해 우체국에 보내기도 하고 10년 전 죽은 아내와 호텔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도 하는 작가에겐 이 세상의 노림수가 순진해서 가히 안쓰러운 수준인데, 그때 작가의 눈은 상대의 패가 다 보이는 화투판을 읽어내는 타짜의 눈과 다를 게 없다. 선과 악, 성과 속이 따로 있지 않고 한데 어울려 있는 난마의 통속. 그 속에 진정한 삶이 있고 그 삶은 훌륭하게 죽음과 맞서온 것이기에 위대하다는 걸 작가는 두 말 하면 잔소리일 정도로 너무 잘 아는 것이다.
김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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