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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바람꽃
그 집 앞 어스름녘 가을빛 귀로歸路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떠나가는 배 젖은 골짜기 우리들의 떨켜 작가의 말 |
李惠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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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망적으로 다짐한다. 은빛 캔의 유혹을 일거에 떨칠 자신도, 시어머니 앞에서 자꾸 닫히려는 마음을 활짝 열어 보일 자신도 없지만, 내 안의 흙탕물을 가만가만 가라앉힐 수는 있을 것이다. 강물이 더 혼탁해지기 전에, 흐려진 제 몸을 스스로 씻어내려 목숨들을 품어 안는 강물의 사랑으로._「그 집 앞」
죽음을 배울지니라. 그러면 그대는 삶까지도 배울 것이니라.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열어젖혔던 앞가슴을 여미듯 생을 여며야 한다는 초조함으로 (……) 칼끝 디딘 것 같은 나날을 나는 방에서 책을 읽으며 견뎠다. 비로소, 나는 나를 용서했다._「가을빛」 여자들이 남자보다 많이 우는 건, 몸 안에 빈 곳이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_「귀로」 사랑이란, 그런 거란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으면 그 사람과 같이 보고 싶고, 찻집에서 그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자주 화장을 고치고, 그 사림이 오면 이를 안 드러내고 곱게 웃는 거, 그게 사랑이란다._「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덤덤히 흘러가는 물을 오래도록 들여다볼 때, 마침내 흐르는 게 물인지 자신인지 알 수 없어질 정도로 오래 들여다본 물에서 눈을 들어 건너편 강둑의 푸른 나무며 하늘을 볼 때의 서먹한 슬픔 같은 게 형의 목소리에 어려 있었다._「떠나가는 배」 왜 산길을 걷다가 마주 오는 사람에게 길을 물으면 사람들이 그러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가면 돼요. 하지만 정작 걸어보면 그 조금이 한 시간도 되고 한 나절도 되지요. 어차피 걸어야 할 길이라면 희망을 가지고 걸으라는 마음이었겠죠. 길 바깥으로 뛰어내릴 용기도 없으면 그저, 그 길이 끝나면 무언가 다른 풍경이 나오려니 하면서 걸을 수밖에요. 그래도 끝내 다른 무엇이 없으면 그저 그랬나보다, 그러고 마는 거지요._「젖은 골짜기」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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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고 단단한 문장이 불러일으키는 여운과 마음의 밑자리,
성난 얼굴을 어루만지는 더운 손길 그리하여, 다시 한번, 다시 한번 살아내리라. 우리 안의 마음속 허기를 눈 밝게 알아보는 작가 이혜경의 첫 소설집 『그 집 앞』이 재출간되었다. 1982년 등단 후, 긴 공백기를 지나 (그 직전 첫 장편 『길 위의 집』(1995)이 출간되긴 했으나) 첫 소설집이 나온 것은 1998년. 그로부터 다시 14년이 지나 다시 만나는 『그 집 앞』. 신작 소설집 『너 없는 그 자리』와 마침 때를 맞추어 출간된 첫 소설집은 작가의 더운 마음자리와 그 깊이를 새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등단 16년 만에 첫 소설집을 내면서, 작가는 ‘가장 가까운 데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이 가능하지 않아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혔었다. 가장 가까운 것,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지붕 아래 모여 사는 사람들. 부부라는 혹은 부모자식간이라는 인연을 앞세워 서로에게 주어서는 안 될 상처를 주는 사람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그 ‘집’ 안에 똬리를 튼 폭력성과 강요된 희생에 대해 그는 낮지만 끈질긴 목소리로 조목조목 따져 보인다. 양지보다는 그늘에 앉아 제 존재를 숨기고 싶어하는 사람들. 작가는 기꺼이 그들의 어눌한 입이 되려 한다. “예전에 초상이 나면 대신 울어주는 종을 곡비(哭婢)라고 했다지요. 작가라는 게 결국은 그런 곡비가 아닐지요. 크게 울 수도 없는 사람을 대신하는……” * 그의 소설들은 함부로 입을 열지 않고, 슬픔을 과장하지 않고, 부러 상처를 헤집어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아주고 더듬어줄 뿐이다. 때문에 단정하게 정리된 그의 문장들 앞에서는, 더불어 말을 아끼게 된다. 그저 마음을 어루만지고, 천천히 숨을 고르고, 내 안의 상처와 그리고 나아가 ‘너’의 상처도 들여다보게 하는 일. 그것은 그의 소설만이 가지고 있는 힘일 것이다. 14년, 긴 시간을 지나 다시 들춰보는 그의 소설의 힘은, 그 시간의 힘으로 절로 더 단단해져 있는 듯 보인다. 혼자여서 때로 오히려 편안한 집. 그 집이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