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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함석헌과 인간존재의 선험적·보편적 프로네시스(phronesis) 해명
제1장│종교와 종교적 삶의 의미 제2장│함석헌과 종교의 행복 제3장│아우구스티누스, 스피노자, 러셀의 행복론 제4장│미학적 인식론과 종교, 그리고 정치 제5장│함석헌의 정치·종교사유 제6장│함석헌을 유혹한 인문학적 사회, 그 이상(理想)의 트라우마 제7장│마르크스와 함석헌의 의식변혁과 행동철학 제8장│함석헌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종교적 인간의 이해 제2부 함석헌과의 융합적 진리의 모색과 여러 주체들의 거리·차이의 진리 지평 제1장│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와 종교문화 제2장│정진홍과 존힉의 종교현상학 제3장│종교와 음식문화 제4장│그리스도교(예수)의 청빈사상 제5장│유학의 인(仁)사상과 격물치지(格物致知) 이해 제6장│논어의 중심사상과 유학의 종교관 제7장│양명학에 대한 생태철학적 해석 제8장│이슬람 이해 제9장│칼바르트 신학에 대한 종교·생태신학적 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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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늘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환경을 초월하라고 가르친다. 초월을 지향하는 종교는 이 세계의 가시적이고 가변적인 것에 몰두하면 불행해지고 초조해지며 낙심과 좌절을 겪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보다 현실을 넘어서 신에게로, 혹은 초월적인 세계를 향해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성서나 불경 어느 곳에서도 신을 열심히 믿으면 너희가 원하는 가없는 복을 주시겠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신에게로 와라, 신을 의지하라, 의탁하라, 자아를 초월하라는 것이 먼저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종교는 넘어-섬이라는 것이다. ---p. 28
새로움은 자기 존재 속에서 낳음이다. 초월자 속에서 낳아야 새로울 수가 있다. 초월자가 아니라면 낳을 수가 없는 것이다. 초월자만이 자기 자신을 낮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서의 아들을 낳을 수가 있다. 여기에 자기 부정이 있다. 초월의 자기 부정을 통하여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가져오는 사건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도 초월을 지향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도 초월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통해서 새로운 탄생, 새로운 아들을 낳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무한자와 유한자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다. 낳음의 절대적 주체로서의 초월자는 동시에 무한자이지만, 인간의 낳음은 초월자에 대한 인식과 경험을 통하여 낳음으로써 유한자인 것이다. 따라서 낳음의 연속성은 곧 인류가 새로워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p. 72 우리는 사상의 결핍 속에 살고 있다. 사유와 사고를 계도하고 계몽하는 생각의 지표, 생각의 좌표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려지지도 않고 있다. 함석헌이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 그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 그 시대가 필요로 하고 동시에 그 시대에 걸맞은 시대적 사상이 있어야 한다. 올바르면서도 깊이가 있는 시대적 사상이야말로 사람들의 삶을 이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대의 사상이 경제적 가치일 수 없고, 시대의 사상이 정치적 이념일 수 없고, 시대의 사상이 인종의 정신일 수 없고, 시대의 사상이 남녀의 인식론일 수 없다. 시대의 사상은“보편적 세계 사상”이어야 한다. ---p. 124 종교는 인간의 삶 속에서 무한 존재의 마음이나 생각, 그리고 초월적 삶의 가치를 드러내 줄 수 있어야 한다. 종교의 생명은 단지 종교의 교리를 수호하고, 제도나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삶의 내용을 서비스하는가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불교인의 경우 부처님의 자녀로서, 이슬람의 경우 알라의 자녀로서의 행위를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p. 148 왕수인에게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인(仁)이다. 그것은 만물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자각하는 감수성이다.136 나와 우주와의 만남은 인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주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죽음은 곧 나의 상처와 아픔과 죽음이다. 그것을 통해 만남은 단순히 우연적인 만남이 아니라 필연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왕수인은 양지를 영명(靈明)이라고도 말한다. ---p. 227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좁은 시야로 바라보고 경험해서인지 그 세계가 전부 인양 착각하고 사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종교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종교를 바라보는 입장이나 관점들이 각기 다르다. 그것을‘종교관’이라고 하던가. 이 종교관은 사람의 생래적 상황이나 선험 또는 경험에 의해 전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한 토대에서 생긴 관점은 자신이 볼 때 다 옳은 듯이 보이지만 정작 똑같은 종교라 하더라도 그 속을 들여다보는 견해 차이가 여럿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신 체험의 다양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사이버 세상에서는 이 다양성을 더 요구할 것이다. 초국가적 정보가 순식간에 오고가는 세상에서 내 것만이 전부라는 발상 혹은 내 것만이 옳다라는 이미 세상에서 도태한 것이나 다름없다. ---p. 2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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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낡았다!
지금 우리나라의 종교는 낡았다. 오늘 우리 종교계의 대종을 차지하는 기독교는 한때 이 땅에 신문명과 신사상과 새로운 신앙을 가져다주는 ‘새로움’의 상징이었다. 또한 그 무렵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비전 혹은 새 세상이 온다는 희망적 전망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새롭게 태어난 자생적 ‘신종교’까지도, 지금은 낡아 버렸다. 종교가 스스로 새로우면서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세속과 물질에 찌든 사람들에게 초월의 세계와 정신(영혼)의 영역이라는 무궁한 신세계를 열어 보여줌으로써이다. 지금 여기의 종교가 낡았다 함은 바로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지금 종교는 ‘세속화되고 물질의 노예가 된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의 본질은 저항이다! 종교가 종교적일 때, 다시 말해서 종교가 스스로도 새로우며, 세상을 새롭게 하는 빛이요 소금일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저항적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운명적으로 ‘낡아 가는’ 세상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움을 제공하는 종교의 행태 자체가 이미 ‘저항적’이며, 그것이 전면성을 띨 때 종교는 혁명이기도 하다. 반대로, ‘비종교적’인 관심에서 출발한 어떠한 혁명도 종교 내지 종교성을 담아내지 못할 때 그 혁명은 실패하고 만다. 혁명이 혁명다우려면 종교적인 영역(영혼과 초월)에서부터 혁명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종교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종교가 혁명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세속화되고 사람들이 이기적이 되어서 종교가 외면당한다고 하지만, 그 반대다. 종교가 외면당하면서부터 세상의 세속화와 물질주의 팽배는 제어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함석헌은 종교적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종교적이다. 김대식은 『함석헌과 종교문화』를 통해서 함석헌은 바로 그런 점에서 순수하고 또 혁명적인 종교인이라고 말한다. 함석헌의 사상의 기저에 있는 흐름이 바로 저항 정신이라는 의미에서이다. 무엇에 대한 저항인가. 이미 패배하고 힘을 잃은 세력에게 저항하는 것은 비겁한 일일 뿐 저항이 아닐 것이다. 함석헌의 저항 정신은 물질문화에의 저항이요, 그것을 떠받치는 자본의 문화, 죽음의 문화, 비인간적인 문화에의 저항이다. 그 저항은 깃발과 총을 앞세운 투쟁이 아니라 순수한 정신과 초월의 삶을 살아냄으로써, 혹은 성서러움의 자리를 생생히 말해줌으로써 이루어진다. 함석헌은 새로움을 낳는 모태이다! 우리의 종교계/종교인은 아직은 화려한 규모와 말의 성찬에 배부른 듯하지만, 그 껍질을 벗겨보면 벌써 영혼의 샘과 성장의 동력이 메말라 허덕이는 모습이 애처롭다. 사람들은 살아 있는 이상, 본능적으로 퇴물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모색한다. 새로운 것은 창조되고 낳아져야 한다. 창조와 탄생을 위해서는 모태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함석헌은 오늘의 기독교(종교)계에 새로움을 가져다줄 신선한 모태가 되기에 충분하다. 함석헌은 종교가 새로워질 수 있는 길은 바로 종교 안에서 신의 아들을 낳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하라고 말한다. 함석헌은 종교는 새로운 신의 탄생, 새로운 하느님의 아들을 낳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아가 그렇다면 어떻게 새로운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실행한다. 하느님이 아니라 그 아들인 것도 ‘새로움’을 상징하기 위한 종교적 장치이다. 하느님은 ‘아들’로 거듭나고 변신하고 달라짐으로써 종교를 낳았다. 이를 달리 말하면 종교는 다름의 현존이다. 종교는 다름을 사는 것이다. 온갖 인간의 망상과 허상을 깨부수고 부처의 눈으로 보면 부처로 보이고 예수의 눈으로 보면 예수로 보이고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으로 보이고 알라의 눈으로 보면 알라로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인의 참된 삶의 모습이요 태도이다. 지금의 종교계에 그래서, 문제는 혹은 답은 다시 함석헌이다. 이 책에 대한 추천사를 써 준 황보윤식 소장(함석헌사상연구소)에 따르면 이 책의 궁극적 지향은 사실 함석헌을 조명하고 성역화하는 데 있지 아니하다. 함석헌을 통해서 저자가 말하는 바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고, 이 책의 모든 ‘함석헌’은 또한 저자 김대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끊임없이 함석헌을 김대식 속에서 살려냄으로써 화석화된 함석헌이 아닌 살아 있는 함석헌을 지금 여기의 사람들이 만날 수 있게 하였다는 데에 이 책의 미덕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