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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6
제 1 장 데비가 물었다 · 13 1. 데비 우바차 2. 최고의 대화 - 기도 혹은 독백 3. 이런 책을 읽으려면 제 2 장 아눗타라 · 57 1. 지고(至高) 혹은 “더 없는 것” 2. [궁극의 실재] - 모든 문답이 쉬는 곳 제 3 장 [케차리와의 동일성] · 123 1. 케차리 사마타 2. 시종(始終)인 에너지 제 4 장 가슴 · 181 1. 이것은 내 가슴에 있나니 2. 가슴이라는 공간 제 5 장 인칭과 호칭 · 239 제 6 장 절대(絶對)의 현현 · 259 1. 음소의 방사 2. 니르비칼파 삼빗 - 말과 생각의 밑바탕 3. 탓트와의 전개 4. 사르밤 사르바트마캄 5. 말리니와 마트리카 제 7 장 현현의 수준 · 405 1. 카울리카 스리슈티 2. 그 거울에 비친 비밀들 제 8 장 가슴의 씨앗 · 499 1. 흐리다야 비자 - “소(Sau?)” 제 9 장 의례(儀禮)를 넘어 · 571 1. 정말이지 [아는 것]이…… 2. 그래서 얻는 것은 나가며 · 6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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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 트리쉬카』는 카시미르 쉐이비즘 경전 중에서도 최상급의 이해(理解)를 요(要)한다는 것은, 이 책을 읽어보면 느낄 수 있으리라.
특히 우리에게는 생소한 산스크리트 알파벳까지 등장하니 더욱 그럴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이”들은 극소수(極少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필자는 아무런 부담(?) 없이 마음껏 이 책을 가다듬는다. (1,000 쪽쯤이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출판하려는 책의 부피를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필자의 다른 책들도 그랬듯이, [또 다른 독자(읽는 자)인 “나 자신”을 위해서]라고 하자. 『파라 트리쉬카』는 『비갸나 바이라바』와 더불어 저 『루드라-야말라 탄트라』의 한 부분(部分)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또 우리는 저 『말리니-비자야 탄트라』라는 이름도 잊을 수 없다!) 『비갸나 바이라바』에서 데비는 묻는다. 아! 쉬바여. 당신의 실재(實在)는 무엇입니까? 경이(驚異)로 가득 찬 이 우주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실재는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입니까? 아니면 내재적인가요? 아니면 초월적인가요? 내재적이라면, 초월적인 것과는 모순(矛盾)입니다. 누가 예배(禮拜)를 받으며, 누가 그 예배에 의해 만족하게 됩니까? 누가 기도(祈禱)를 받으며, 기도가 무엇인지 말해 주소서. 위대한 주(主)여! 아직도 저의 의심(疑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시를 빼기 위한 가시 『비갸나 바이라바』에서 우리가 데비의 질문은 제쳐두고, 쉬바의 대답인 [112 방편]을 다루는 일에 우선적으로 매달렸다면, 이제 이 『파라 트리쉬카』에서는 데비의 질문에 그 초점을 맞춘다. [필자는 비갸나 바이라바의 163 절 전문(全文)을 (책의 부피 등으로) 다 실을 수 없었다.] 진실로, 질문(質問) 속에 답(答)이 있지만…… 우리는 [그 답]을 비갸나 바이라바의 112 방편으로 이미 확보하고 있다. [물론 [그 답]이 정말로 내 것이냐는 우리 각자(各自)의 몫이고……] 비갸나 바이라바에서는 데비가 나중에 - 쉬바의 [긴 대답[방편(方便) 소개]]을 듣고 만족(滿足)하여 - 쉬바와 더불어 [합일(合一, 라야, 용해)의 기쁨]으로 젖어든다. 그러나 파라 트리쉬카에서는 그런 [극적(劇的)인 결론]을 취하지는 않는다. 36 절이 전부인 이 작은 경전을, 아비나바굽타는 주석을 했다. 아니 해석을 했다. [주석]과 [해석]의 차이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차이를 [뚜렷이]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목적은 그 차이를 느끼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비나바굽타의 해석을 따라가며 나의 [존재 혹은 현존의 순간]을 - 카시미르 쉐이비즘 용어로, “나-의식”을 - 알아채게 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神)이다. 기독교 용어로는 [(내) “속에서 말하게 하는” 그 무엇](마10:20)을 알아채고 느끼자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말을 한다.” 심지어 농아(聾啞)도 나름의 언어로 - 수화(手話)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들도 생각하는 존재이므로.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讀者)여! 혹 [이런 것]을 생각해보거나 관찰해본 적이 있는가? 즉 “내가 말을 할 때, 내 속에서 어떤 과정(현상)이 일어나기에, 내가 말을 하게 되는지를……” 내가 [말 혹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도대체 [내 속에서 “그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가? 잠시 책을 덮고…… 그것을 느껴보라. 이 책은 [그런 것]에 대한 경험자(經驗者)들의 경험과 지혜를 자세히 전해 주는 책이다. 현대의 어떤 언어학자(스티븐 핑커)는 [우리가 “말을 한다”는 사실]을 “언어 본능(the Language Instinct)”이라고 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음식을 먹고는 “맛있다!”거나 “맛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맛없는] 음식은 없다!”고 한다. 필자가 아는 한, [맛없는] 음식은 거의 불가능하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만드는 음식 중에 맛이 없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이런 것을 카시미르 쉐이비즘의 말로 풀이하면, [마이야 말]과 [아-마이야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세상(마야)에 속하는(마이야) 상식적인 말]과 [그렇지 않은 말] 말이다. 각설하고, 이 삼위일체경(三位一體經) 『파라 트리쉬카』를 꾸미며 참고한 것들을 소개한다. 1. 『Para-trisika-Vivarana』 Jaideva Singh, 1998 (아래의 Bettina Baumer 그녀가 편집했다.) 2. 『Abhinavagupta’s Hermeneutics of the Absolute』 - Anuttaraprakriya - Bettina Baumer, 2011 3. 『Vac』 - The concept of the Word in selected Hindu Tantras - Andre Padoux, 1992 원래 『파라 트리쉬카 비바라나』 앞부분에 있는 [서시(序詩) 형태의 몇 절]과 뒤에 있는 [자서전적 절]은 여기서는 책의 부피를 고려하여 생략한다. [서시]와 또 [의례, 의식(儀式)] 부분은 탄트라 사라의 해당하는 곳에서 (보다 자세히(?)) 다룬다. 바우치 서재(書齋)에서 ---「들어가며」중에서 [ 3 ] 이런 책을 읽으려면 [어떤 책을 읽고 있을 때, “내가 아주 간절하고, 진지하여 그 속에 푹 빠져들어 있을 때” - 그 책의 문장이 묘사하는 내용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 마치 그 활자가 “살아 있는” 것 같은, 아니 [그 활자(로서 나는 소리)가 바로 내 속에서 (마치 그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 같은 것을 느끼는)] 순간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그 순간 우리는 화들짝 놀란다. 이런 상황은 [경전과 독자(“읽는 자”)의 관계]가 그 옛날 인도(印度)에서 강조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삼반다)]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영성가의 경험에서 [내면의 소리], [신(神)의 말씀] 등으로 부르는 그 무엇……] 이것은 [지식의 힘]이 특징인 파쉬얀티와 마드야마 단계에서 [의지의 힘(파라 바크)]이 특징인 [지고의 의식]의 경험이다. 이것은 모든 경전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목표다. 그러므로 [인식(認識)의 힘(갸나 샥티)]에서는 [신성의 나-의식의 가장 높은 만트라 에너지]의 실제적인 경험이 있다. 그것만이 사다-쉬바의 특성인데, 하나는 데비의 질문의 모습으로 하나는 바이라바의 대답의 모습으로, 그 안에 “D, e, v, i, u, v, a, ca” 와 “Bh, ai, r, a, va, u, v, a, ca”의 문자의 수단으로 “데비 우바차(데비가 물었다)”와 “바이라바 우바차(바이라바가 답했다)”라는 언어의 형태가 있다. 스왓찬다 탄트라는 말한다. 사다-쉬바 자신이 스승과 제자의 위치를 떠맡고 [질문]과 [대답]으로 탄트라를 드러내도다. 그러므로 신성의 [은혜의 힘]은 항상(恒常)이고, 모든 경험자에서 방해받지 않는다. 그러니 [트리카 경전의 생명과 영혼]인 그녀([은혜의 힘]) 홀로, [경험자]와 [신성의 의식] 사이에 지고의 관계를 구성한다. [아눗타라의 일]에서는 - 아눗타라(지고(至高), 더 없는 것)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 [모든 종류의 관계]는 그 가르침과 일치하고, 오직 지고(至高)를 목표로 한다. 똑같은 것을 트리카-흐리다야도 말한다. “지고의 주는 그의 샥티를 통해 항상 창조성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은혜의 비]를 내리고, (오직 은혜를 위해) 어떤 금(禁)함도 없이 현현하고 철수한다.” [참고로 여섯 가지의 관계(삼반다)가 있다. 1) 파라 삼반다 : 질문자와 대답자 둘 다 쉬바로, 최고의 관계다. [신성의 의식] 속으로 용해되는 것을 말한다. 2) 마하 삼반다 : 질문자는 사다-쉬바, 대답자는 쉬바다. 3) 안타랄라 삼반다 : 질문자 아난타밧타라카, 대답자 사다-쉬바. 4) 디뱌 삼반다 : 질문자 난다쿠마라, 대답자 아난타밧타라카. 5) 디뱌-아디뱌 삼반다 : 질문자 사낫쿠마라, 대답자 난디. 6) 아디뱌 삼반다 : 질문자와 대답자 둘 다 [인간 존재]일 때다.] 그러니 거기에는 항상 아눗타라의 능동적 현존이 있다. 그래서 [주의 의식에서 분화되지 않은 방식으로 나타나는 질문-대답]은 [파쉬얀티 단계]에서는 (어떤 욕망을) [문자]와 [말], [문장]으로 배분하고 할당하려는 [미-확정적 형태(니르비칼파)]이고, [마드야마 단계]에서는 (그 어떤) 분리의 느낌을 가진 [확정적 형태(사비칼파)]이고, [바이카리 단계]에서는 [마이야 문자(음소)], [말], [문장]으로 구성되는 [거친(육성) 언설]인 [질문]과 [대답]의 형태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아눗타라가 어떻게……” 이것은 [현현의 느낌이 가득한] 바이라바의 저 [관찰이 불가능한 면(즉 샥티)]이다. 그것의 핵심은 능가(凌駕)할 수 없는 나-의식이고, 쉬바와 샥티의 결합으로 생긴 동요(動搖)의 기쁨으로 가득하다. (여기의 동요는 현현의 충동을 말한다.) 트리카 전통(의 철학과 실천)에 따르면, 쉬바는 [a]로 [출현의 근원]을, 또 샥티는 [?]로 [현현의 확장]을 상징한다. 그것은 [본래적이고, 감내(堪耐)하는 상태]로,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신성을 특정한 처소에 관련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쉬바는 히말라야의 카일라사 산에 산다.”는 것 등) “그”의 경우에는 어떤 제한도 없기 때문에, “그”에게 특정 장소(공간)를 지정하는 것은 완전히 어불성설이다. [질문과 대답]의 사실은, [질문]과 [그 대답]의 구분이 없는 파라 바크의 수준에서는 늘 현존하는 실재이다. 이것이 여기서 말한 의미의 전부다. 모든 존재의 자연적인 상태인 참나는 자기 조명적이고, 자신과 다르지 않은 [질문-대답]으로 즐겁다. 그 안에서는 질문자(데비)와 대답자(바이라바) 둘 모두가 그 자신인데, “나”로서 다음과 같이 비춘다. “나, 나 자신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아는 놀라운 기쁨 때문에 [질문과 대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경전(經典)은 처음에는 “데비가 물었다. 쉬바여! 아눗타라가 어떻게……”로 시작하고, 중간에는 “바이라바가 답했다. 들어라, 복(福)을 받은 자여!……”라고 하고, 그 마지막은 “이런 것이 루드라-야말라이니 - 쉬바와 샥티의 합일이니 - 이를 수행하여 [전지(全知)의 힘]을 얻노라.”로 끝난다. [다섯 근원에서 나온 모든 경전]에서부터 [세속적인 (거래) 관계]까지, 이 모든 것은 [지고의 관계(파라 삼반다)]라고 말한다. ([다섯 근원]은 27절의 설명을 참조하라.) 나 아비나바굽타는 비밀인 [질문-대답] 양상의 감춰진 부(富) 전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을 쉬바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가르침의 핵심이고, 또 항상 자신을 [바이라바의 상태]의 경험으로 이끈다. 이제 학생들(배우려는 이들)을 위해, 시(詩)로써 모든 가르침을 요약한다. 모든 거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지식의 일이든, 행위의 일이든 일어나는 모든 것은 [네 번째 상태] 분화(分化)하지 않은 파라 바크에서라네 연속의 순서로 처음인 파쉬얀티에서는 단지 [다양성(多樣性)의 싹]만 있고, 마드야마에서는 지식과 행위가 내적이라 명확한 연속(連續)은 있을 수 없노라 파라에 의존하는 마드야마와 파쉬얀티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그 상태를 과거(過去)처럼 여기노니 파라는 구별이 없는 늘 현재(現在)로다 더 없는 것의 이 상태는 이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주제]와 [제목], [관계], [목적]으로. 똑같은 것이 소마난다의 주석에도 있[는데, 나는 그 주석의 난점(難點)을 명확히 하려고 한]다. “항상 다섯 행위를 하려는 바이라바의, ‘데비가 물었다’의 형태에서, 에너지의 첫 박동 후에……”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다루었다. 이제 우리는 [주제(제목, 아비데야)]를 다루려고 한다. [[경전(經典)에서 필수 요소]는 ① 프라요자나(목표), ② 아디카라(자격), ③ 아비데야(주제), ④ 삼반다(관계)의 네 가지다.] “트리쉬카”는 [셋의 이쉬카]라는 뜻의 복합어다. 그 셋은 [잇차(의지), 갸나(지식), 크리야(행위)]를 가리키지만, 물리적인 면과 관련해서는 [스리슈티, 스티티, 삼하라]를, 영적(靈的)인 면과 관련해서는 [우됴가, 아와바사, 차르와나]를 가리키기도 한다. [[스리슈티 등]은 다섯 가지이다. 즉 [스리슈티, 스티티, 삼하라, 빌라야(티로다나, 피다나), 아누그라하]이고, 또 [우됴가 등]은 [우됴가(아바사나, 나타남), 아와바사(락티, 즐김), 차르와나(비마르샤나, 알아챔), 비자-아바스타파나(씨앗을 뿌림)과 빌라파나(용해, 발아)]이다. 이 부분의 설명은 프라탸비갸 흐리다얌(11절)을 참조하라. 이것을 셋으로 분류하면, 빌라야와 아누그라하는 삼하라(소멸)에 포함되고, 또 비자-아바스타파나와 빌라파나는 차르와나(알아챔)에 포함될 것이다.] “이쉬카”는 [이슈와리(여신)]를 말하며, 셋을 - [잇차-갸나-크리야], [스리슈티-스티티-삼하라], [우됴가-아와바사-차르와나]를 다스리고 통제하는 여신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샤나”는 [다스려지고 통제되는 것]과 동일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파라 샥티(지고의 신성의 의식)”가 - 그녀는 즉시 셋의 구분을 초월하고 또 그것과 동일하다. - 이 책의 주제다. 파라 샥티의 “파라”와 “셋(트리)의 이쉬카”가 합하여 책의 제목이 “파라 트리쉬카”이기 때문이다. [또 그런 뜻으로 “삼위일체경(三位一體經)”이란 부제를 달았다.] 트리쉬카의 다른 읽기로는 트림샤카가 있다. [세 가지 샥티(힘)를 ‘말하는’ 그것]이 트림샤카이다. [30절(節)]과 관련되는 트림쉬카는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절의 수(數)가 아니고, 트림샤카의 의미다. 어떤 경전은 말한다. “트림샤카의 뜻은 수천수만의 절(節)에서 선언되었다.” [책의 제목]과 [주제]의 관계는 지고의 관계다. 둘 다, [동일한 실재(實在)]와 관련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강조한 것이다. 이 경전의 목표(프라요자나)는 [모든 경험자들의 - 샥티의 하강으로 은혜를 받아, “더 없는 것”의 지식이 허여(許與)된 경험자들 - 살아 있는 동안의 해방]이다. 이 해방 혹은 자유는 [바이라바의 본성 안에서, 완전한 정체성의 확립]과 [나의 기쁨의 번쩍임인 나-의식과의 통합]을 포함한다. 또 그것은 자신의 본성(本性)을 실현하여 [속박이라고 상정된 존재계 전체 범주]를 그의 놀이로 여기는 사람의 성취다. 놀이는 단지 [그의 기쁨의 풍부함의 표현]이다. 보통, 해탈을 [속박이라고 여겨지는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것], [몸, 프라나, 푸랴슈타카에서 살아가는 개아들을 - 그의 활동 영역은 내적인 감각과 외적인 감각이고, 몸 등은 충동(衝動)으로 있고, 그 삶은 몹시 힘든 노력으로 구성된다. - 구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묵티(해방)는 [이 존재계의 범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이라바의 본성과의 동일성]을 말한다. 다른 말로, [나 자신의 본성인 나-의식과의 동일성]을 말한다. 그리고 충동(衝動)은 모두 우리를 불행으로 몰고 간다는 말이 아니다. 단점(短點)은 개아가 더 높은 삶으로 오르려는 자극으로 작용한다.] 만약 [마야로 인한 모든 다양성의 인상]이 사라진다면, 그런 자유의 선언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무엇과 관련한 자유인가? 스판다 카리카는 말한다. [이런 깨달음]을 가진 자는 끊임없이 신성(神性)과 연합하여 세계 전체를 [자신의 놀이]로 본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해방되고, 의심은 없다. 이것은 곧 명확해질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 “[나]와 [바이라바의 나-의식(意識)]은 똑같다!”- 이 경전의 목표를 구성하고, 또 이 목표는 [인간의 목적]의 절정이다. [목표의 목표]에 대한 질문은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관계], [주제], [목표]를 논의했다. [아비나바굽타는 이 경전의 ① 목표는 묵티 즉 자유라고 한다. 그는 [참나의 ‘탈것’에서 벗어남, 존재계 범주에서의 해탈]이라는 대중적인 생각을 일축하고, [나]와 [신성의 나-의식]과의 동일시를 견지한다. 그는 ② “아디카리”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고 암시만 한다. “[은총으로, 주께로 향한 자들] 만이 이 경전을 공부하기에 적합하다.” ③ 주제는 “나로서 항상 번쩍이고, 파라 바크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신성의 의식] 즉 [지고의 샥티]”라고 하며, ④ 관계에 대해서는 “[주제]와 [책]의 관계는 [지고의 관계]다. 둘 다 [동일한 실재]와 관련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아비나바굽타는 스왓찬다 탄트라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크세마라자는 그것을 주석한다. 사다-쉬바 자신이 스승과 제자의 위치를 떠맡고 [질문]과 [대답]으로 탄트라를 드러내도다. “[지고의 말]의 힘을 가진 주는, 사다-쉬바로서 [질문자]와 [대답자]의 수준을 떠맡는다. 스승과 제자의 위치는 ‘창조적 통찰의 영역에서’ 구절에서 설명된다.” 아비나바굽타는 탄트라 알로카에서 위 스왓찬다 탄트라 구절을 재미있는 말로 표현한다. “의식은 그렇게 스승과 제자의 위치에서 질문과 대답이 된다. 그 몸의 차이는 실질적이 아니다.” 자야라타는 그것을 또 이렇게 주석한다. “스승과 제자의 차이는 [직접적 인식의 문제]가 아닌가? 어디가 의식의 본성(과 단일성)의 곳인가? (이 반론에 대답하여) 이것은 실질적이 아니고, 실제가 아니다. 의식(意識)은 그의 [절대 자유]로, 이들 다른 몸들을 그 자체 안에 나타나게 한다.” [경전의 계시(드러남)와 하강의 과정]에서, 다른 종류의 관계가 있다. [신성]으로부터 [인간 스승과 제자의 수준]까지의 하강 말이다. 스왓찬다 탄트라에서 [사다-쉬바와 이슈와라의 관계]를 신성 수준에서의 [구루와 제자의 관계]로 다룬다. 사다-쉬바는 갸나(지식)의 면을 나타내고, 이슈와라는 크리야(행위)의 면을 나타낸다. 이것은 “위대한 관계(마하 삼반다)”에 해당한다. 여기 파라 트리쉬카에서 아비나바굽타는 데비와 바이라바의 최고의 관계(파라 삼반다)를 발견한다. 그것은 [역동적인 불이(不二)의 관계]다. (인용문 중에는 미리 인용하는 것이 더러 있다.) “바이라바는 그의 안에 우주의 확장 전체가 포함되어 영원한 응답자로서 거한다. 확장과 회귀라는 과정은 시간 너머여서, 이 [질문-대답]은 한결같은 본성의 진리이다. 이것이 아눗타라와 관련되는 파라 삼반다이다. 나의 스승 샴부나타는 그것을 트리카 경전(經典)의 골자와 핵심이라고 했다.” 그는 다시 [불이(不二)의 대화(對話)]의 맥락에서 “질문”의 궁극적 의미를 다룬다. “(신성의) 지고한 [의식의 힘]은 그녀의 본성에 따른 확장의 찰나에는 바이라바와 다르지 않은데, 잇차 샥티(의지의 힘)라고 한다. 그녀의 실제적인 확장은 갸나 샥티(지식의 힘)로 파라-아파라 혹은 파쉬얀티 형태를 떠맡고, 또 크리야 샥티(행위의 힘)로 아파라 혹은 마드야마와 바이카리 형태를 떠맡는다.” “[우주 형태로 확장된 파라-샥티]의 본성에 대한 물음을 [질문]이라고 한다. 바로 그 샥티인 데비가 [그녀 자신(파라 샥티, 파라 바크)]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는 자다. 이 [확장의 성격에 대한 심사숙고(深思熟考)]가 [가장 우수한 언설 기관(파라 박트라, 좋은 입)]이 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질문과 대답]으로 구성된다.” 데비가 물었다. [불이의 문제]에서 일어난 “데비가 물었다.”에 관련된 것을 아비나바굽타는 여러 가지 수준에서 해결하였다. - 문법적으로,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왜냐하면 데비의 질문에 따른 탄트라 전체는 오직 한 가지 목적이기 때문이다. 지반 묵티 즉 [살아 (숨 쉬고) 있는 동안의 자유] 말이다. 그것은 데비와 바이라바의 [최고 관계]의 접점이자 역동성이고, 최고 수준에서의 [질문-대답]의 역동성이다. 또 그것은 [우리 인간 제자]가 자신의 정체성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일인칭의 데비가 질문한 것으로 확립되면, “그러므로 [인식(認識)의 힘(갸나 샥티)]에서는 [신성의 나-의식의 가장 높은 만트라 에너지]의 실제적인 경험이 있다.” 전체적 의미는, 비록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나의 (신성의) 주체만이 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관계(關係)”를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은혜(恩惠)의 힘(아누그라하 샥티)]과 [창조성(創造性)의 힘(비사르가 샥티, 곧 쉬바의 편에서)] 사이의 최고의 관계이다. “이것은 [현현의 느낌이 가득한] 바이라바의 저 [관찰이 불가능한 면(즉 샥티)]이다. 그것의 핵심은 능가(凌駕)할 수 없는 나-의식이고, 쉬바와 샥티의 결합으로 생긴 동요(動搖)의 기쁨으로 가득하다. 트리카 전통(의 철학과 실천)에 따르면, 쉬바는 [a]로 [출현의 근원]을, 또 샥티는 [?]로 [현현의 확장]을 상징한다. 그것은 [본래적이고, 감내(堪耐)하는 상태]로,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신성을 특정한 처소(處所)에 관련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그’의 경우에는 어떤 제한도 없기 때문에, ‘그’에게 특정 장소(공간)를 지정하는 것은 완전히 어불성설이다.” 이 책의 [제 2 부(5절부터 끝까지)]라고 할 수 있는 5절로 들어가기 전에 아비나바굽타는 질문에 대한 요약을 주고 그것을 “트리카(삼위(三位))”와 관련시킨다. [아눗타람 카탐(아눗타라가 어떻게)]으로 시작하는 1절의 데비의 질문은 삼위 중 “쉬바”와 관련되고, [흐리다야-스타(가슴에 있는)]로 시작하는 2절의 질문은 삼위 중 “샥티”와 관련된다. 그다음 [제 2 부]는 삼위 중 “나라”와 관련되고, 그것은 웃타라 즉 [(거울 속의) 영상]에 해당하며, “나라”의 모든 면을 아우른다. 그러나 대안적인 것은 야말라와 관련된 두 가지 질문이다. “[쉬바와 샥티의 결합]이 (곧) 야말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각각에 대한 분리된 질문은 정당화될 수 있다.”라는 것……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 4 장] 가슴에서 다룰 것이다. --- p.41~56 참고로, 이 책은 냐야 샤스트라에 따른 완전한 논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라탸비갸 흐리다얌에서 다루었다. 복습(復習)하자면 “1) 프라티갸(주장) : 산에 불이 났다. 2) 헤투(이유) : 연기가 난다. 3) 우다하라나(예) : 아궁이에 불을 땔 때 4) 우파나야(적용) : 산에 연기가 난다. 5) 니가마나(결론) : 산에 불이 났다.” 라는 것 말이다. [아눗타람 카탐 데바 …… 브라젯(쉬바여! 아눗타라가 어떻게 …… 얻습니까?)]은 프라티갸 즉 [주제의 총론]이고, 중간의 절들은 헤투(논리적인 논거), 우다하라나(예)와 우파나야(적용)를 이루고, 35절과 36절(이 책 삼위일체경 『파라 트리쉬카』에서는 36절과 37절)은 니가마나(결론)이다. 산스크리트의 쿨라(전체성, 全體性, Totality)는 곧 “일체성(一體性, Unity)”을 말한다. 기독교의 저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 = tri + unity)”의 그 일체 말이다. 그래서 [“파라(일체, 전체) + 트리쉬카(세 여신, 세 가지 힘)”]를 [삼위일체경(三位一體經)]이라고 풀었다. 잘 아는 대로,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성부(聖父), 성령(聖靈), 성자(聖子)가 “한 몸”인 것]을 말한다. 편견이나 엉뚱한 고집을 갖지 않고, [잘 살피면] 그것은 곧 “파라 트리쉬카”에 속(屬)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오래 전, 아내와 대구의 [두류 공원(頭流公園)]을 산책하던 때의 일이다. [두류는 [머리가 (떨어져) 흐른다]는 뜻이다. 친나마스타……?!] 여름 저녁이었던 듯, 갑자기 소나기가 시작됐고, 아내는 비를 맞지 않으려고 걸음을 서두르며 나를 재촉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나]를 보고, 아내는 짜증을 냈다. ‘옷이 젖고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까 하는…….’ 그걸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를 맞지 않으려고 하니] 이 마음이 급해지고 몸을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그러나 [비를 (그냥) 맞으려고 한다면], 마음이 움직일 일도, 걸음(몸)을 서두를 일도 없다. 비와 바람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비유다. “아날로기아 엔티스”다.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몇 줄기 소나기든, 모진 풍상(風霜)이든…… 가리지 않고 또 회피(回避)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서두를 일은 없다. 갑작스런 [죽음의 비]일지라도 [정면으로(face to face, 삼-무캬)] 맞으려고 든다면 -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면…… 우리는 내 몸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고, 그리고 또 언제라도 내 마음(생각, 말)이 죽어가는 것도 지켜보며 이번 생(삶)을 유희(遊戱, 逍遙遊, 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나가며」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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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어떤 음식을 먹고는 “맛있다!”거나 “맛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맛없는] 음식은 없다!”고 한다. 필자가 아는 한, [맛없는] 음식은 거의 불가능하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만드는 음식 중에 맛이 없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이런 것을 카시미르 쉐이비즘의 말로, [마이야 말]과 [아-마이야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세상에 속하는(마이야) 상식적인 말]과 [그렇지 않은 말] 말이다. 우리는 모두 “말을 한다.” 심지어 농아(聾啞)도 나름의 언어로 - 수화(手話)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들도 생각하는 존재이므로.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讀者)여! 혹 [이런 것]을 생각해보거나 관찰해본 적이 있는가? 즉 “내가 말을 할 때, 내 속에서 어떤 과정(현상)이 일어나기에, 내가 말을 하게 되는지를……” 내가 [말 혹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도대체 [내 속에서 “그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가? 잠시, 읽는 것을 중단하고…… 그것을 느껴보라. 이 책은 [그런 것]에 대한 경험자(經驗者)들의 경험과 지혜를 자세히 전해 주는 책이다. 『파라 트리쉬카』는 『비갸나 바이라바』와 더불어 저 『루드라-야말라 탄트라』의 한 부분(部分)이다. 우리는 또 『말리니-비자야 탄트라』라는 이름도 잊을 수 없다! 36 절이 전부인 이 작은 경전을, 아비나바굽타는 주석을 했다. 아니 해석을 했다. 그것이 파라 트리쉬카 비바라나이다. 그것을 다시 자이데바 싱이 영역(英譯)하고 자신의 주석을 첨가했다. 자이데바 싱은, 잘 아는 대로, 우리에게 비갸나 바이라바, 쉬바 수트라, 스판다 카리카, 프라탸비갸 흐리다얌 등을 영어로 소개한 바 있다. 그는 말년에 이 책 파라 트리쉬카 비바라나를 번역하고 주석을 달기 시작했고, 이 책의 출판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자이데바 싱은 그의 남은 작업을 계속해주길 바라며, 이 책의 편집을 맡았던 베티나 보이머 여사에게 유언처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카시미르 쉐이비즘은 [인도의 사상(철학)과 영성]의 정점(頂點)이야.” 『파라 트리쉬카』는 카시미르 쉐이비즘 경전 중에서도 최상급의 이해를 요한다는 것은, 이 책을 읽어보면 느낄 수 있으리라. 특히 생소한 산스크리트 알파벳까지 등장하니 더욱 그럴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이”들은 극소수(極少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아비나바굽타의 그 고백이 가슴에 남아 있다. “누가 신성의 의식을 두고, ‘이것이 전부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신성은 내게 이 정도만 은혜를 주었다. 그 은혜로 나는 이만큼 ‘드러내는’ 특권을 누렸다.” 아비나바굽타는 이 책 파라 트리쉬카 비바라나(긴 주석)에 앞서 짧은 주석 파라 트리쉬카 라구브릿티를 썼다. 이전에 그는 대작(大作) 탄트라 알로카를 썼다고 하며, 다시 그 축약판(縮約版)으로 탄트라 사라를 썼다. 이 책 파라 트리쉬카가 그만큼 깊다는 것과 [영성(靈性)의 길]은 - 그것을 표현하는(드러내는) 일은 - 그 끝이 없다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