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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트라 사라
탄트라 알로카의 정수(精髓) 양장
김은재
지혜의나무 202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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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들어가며 · 6
축원문(祝願文) · 11
제 1 장 서론 · 21
제 2 장 아누파야 · 27
제 3 장 샴바보파야 · 31
제 4 장 샥토파야 · 53
제 5 장 아나보파야 총론 · 79
제 6 장 외적인 수행 · 121
제 7 장 공간의 길 · 151
제 8 장 탓트와의 길 · 171
제 9 장 탓트와 수행 · 205
제 10 장 칼라의 길 · 237
제 11 장 샥티 파타 곧 〈성령 받음〉 · 247
제 12 장 〈입문의 시작〉 세례(목욕) · 263
제 13 장 경배의 장소와 〈규율(規律) 입문〉 · 269
제 14 장 〈후계(後繼) 입문〉 · 299
제 15 장 〈임종(臨終) 입문〉 · 311
제 16 장 〈부재(不在) 입문〉 · 317
제 17 장 링가의 교화(敎化) · 333
제 18 장 〈기름 부음(아비쉐카)〉 · 339
제 19 장 〈사후(死後) 입문〉 · 345
제 20 장 입문 뒤 할 일 · 355
제 21 장 경전의 신뢰성 · 379
제 22 장 쿨라-야가 혹은 〈전체성의 예배〉 · 389
나가며 · 406

저자 소개 1

현직 의료인으로, 구도자로 살아가고 있다. 저서로 〈가시를 빼기 위한 가시 -『비갸나 바이라바』〉, 〈수행경 -『쉬바 수트라』〉, 〈스판다와 재인식의 -『소와 참나 이야기』〉, 〈아는 자를 아는 일 -『프라탸비갸 흐리다얌』〉, 〈참 나를 느끼는 -『스판다 카리카』〉, 〈삼위일체경 -『파라 트리쉬카』〉, 〈전체성 -『뱀과 얼나 이야기』〉, 〈탄트라 알로카의 정수 -『탄트라 사라』〉, 〈아비나바 바라타의 -『숭고미의 미학(味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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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2월 22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409쪽 | 536g | 140*199*25mm
ISBN13
9791185062396

책 속으로

수행자가, 앞에서 설명한 〈이 우주 전체가 자신 안에서 빛나는, 자기 현현의 쉬바 탓트와〉 속으로 들어갈 수 없을 때, 그는 어떤 방편도 없이 〈절대 자유의 힘(스와탄트리야 샥티)〉의 우월을 떠올리며 - 자신은 도무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경험하면서 - 바이라바에 속하는 〈니르-비칼파(미-확정적인 생각 혹은 생각이 없는) 상태〉를 경험한다. 다음은 〈이런 흡수(사마베샤)〉로 이끄는 설명이다.

〈절대 자유의 힘〉은 잇차 샥티로, 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주의 핵심은 빛(프라카샤)으로, 그 자유 의지는 창조와 용해로 현현한다. 우주 전체는 〈나 자신의 의식의 거울(스크린)〉 위에 빛난다. 절대(絶對)는 모든 존재들이 들어가 불타버리는 의식(意識)의 불덩어리로 빛난다. 요기는 즐거움, 고통, 의심, 생각(비칼파)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경험하고, 마지막에는 〈생각이 없는(니르-비칼파) 상태〉 속에 흡수된다.
--- p.31

사람이 ‘자신’을 〈모든 가능한 반영적인 인식들이 유일하게 쉬는 곳(피난처, 도피처)〉으로 여기게 될 때 - 그 안에 탓트와, 존재들, 영역들 전체가 반영 될 때 - 그는 〈샴부로 생기는 흡수를 통해〉 살아 있는 동안에 해방을 얻는다. 샴부는 〈한정된 지식〉 으로부터 자유롭다. 이런 유형의 흡수를 얻을 때, 아누파야의 경우와 같이, 〈만트라의 사용〉 등의 수고스런 수행 과정은 필요가 없다.

〈쉬바 속으로 순수하게 흡수되는 일(샴바바 사마베샤)〉은 순수한 의식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요기가 그것을 얻으면, 그는 여섯 길(샷-아드와)이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들은 그 자신의 의식에 반영되고, 그의 참나에서 일어나고, 그 안에서 쉼을 얻는다. 〈통합된 단일성의 의식〉 안에서, 창조, 유지, 용해는 그 자신의 본성과 분리 되지 않은 채로 빛난다.

만약 사람이 샴바바 우파야를 통해 그의 의식을 절대적 의식의 순수한 빛 속으로 녹일 수 있다면, 그때는 성실히 행해야 하는 일, 즉 〈목욕(세례)〉, 〈종교적 일의 준수(브라타)〉, 〈몸의 정화〉, 〈명상〉, 〈성스런 음절의 반복(만트라. 기도)〉, 〈희생(犧牲)〉, 〈불 속으로의 봉헌〉은 필요하지 않다.
--- p.49

향유와 해방을 바라는 이에게는, 은혜의 하강은 향유로 올 때는 의식(儀式)에 의존하고, 해방으로 올 때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존적이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 (사-아펙샤-니르-아펙샤). 그러므로 〈은혜의 하강이 왜 특정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다. 이것은 간단한데, 한 영혼의 형태로 나타나는 그 누구라도 주 자신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해서, 〈그에 대해 이런 질문을 올리는 그대〉가 바로 〈은혜 때문에, 그에게서 분리된(?) 그 한 영혼〉이 아닌가?

이제 아비나바굽타는 〈그런 생각〉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반론의 의문으로 지금 곤혹스러워 하는 자〉, 바로 그대가 곧 그(神)가 아닌가? 은혜의 하강은 아홉 종류다. 〈강한 것〉, 〈보통의 것〉, 〈느린 것〉과 다시 그것의 세 가지 변형으로 〈지극히 강한 것〉, 〈보통 강한 것〉, 〈약하게 강한 것〉 등이다.

① 〈지극히 강한 은혜의 하강〉이 일어나면 즉시 몸이 죽고, 〈파라메슈와라의 상태〉가 된다.

② 〈보통 강한 은혜의 하강〉으로, 그 수령자는 자신을 실재의 본성으로 강하게 확신하여 경전이나 스승에게 어떤 도움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직관적인 지식이 자동적으로 열려, 외적인 형태의 정화 의식(儀式)이 없이도 그는 다른 이에게 향유와 해방을 주는 자가 된다.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은 〈프라티바(직관, 통찰) 유형의 스승〉이라고 부른다. 이런 사람은 이 사회적인 관습의 준수가 요구되지 않는다.

〈프라티바 유형〉에서도 비교하여 더 구분할 수 있다. 이것은 주의 의지의 다양한 본성 때문이다. 본성에 의해 직관적이 되었더라도, 경전을 의지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진리의 확인을 위해서일 때뿐 이다. 그래서 〈프라티바 유형에 속한 이〉는 경전에 의지하지 않을 수도 있고, 경전의 지식에 해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둘 다 직관(프라티바, 통찰)이 최고로 작동한다. 〈프라티바 유형의 스승〉이 있는 곳에서는, 다른 유형의 스승들은 어떤 귄위도 없다. 마치 이원론 체계(샤이바 싯단타)에서 해방을 얻은 쉬바들은, 〈시작이 없는 쉬바〉의 현존에서는 창조, 파괴 등의 기능이 (그냥) 무능한 것과 같다.

〈초월의 신(神)만으로 자유를 얻은 이들〉은 〈초월하고 내재(內在)하는 신으로 자유를 얻은 이〉, 곧 〈그 자신이 신(神)인 이〉에게는……

③ 〈약하게 강한 은혜의 하강〉에서는 바른 스승 에게로 가려는 욕망은 생겨나지만, 〈그렇지 못한 스승〉에 대한 기대는 사라진다. 그것이 곧 〈무능한 스승에게서 바른 스승에게로 가는 은혜〉이기 때문 이다. 참 스승은 경전에 담긴 진리 전체에 완전히 밝으며, 그는 주 바이라바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요기조차도 수행으로 얻은 지식을 통해서만 다른 이들에게 해방을 주는 자다. 이와 관련해서, 그의 스승으로서의 권능은 쉬바와의 동일성에서 오며, 반면 그의 연민과 매력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능한 스승도 쉬바와의 연합 외에는 모든 특질(매력 등)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스승에게로 가려는 사람은 지식이 특징인 입문을 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그는 즉시 〈살아 있는 동안의 해방(지반 묵티)〉을 얻는다. 이 입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 〈단지 일별(一瞥, 아발로카나)로〉, 〈실재에 대한 몇 마디 말로〉, 〈경전에 대한 설명으로〉, 〈수련을 잘 관찰 하는 것으로〉, 〈봉헌(奉獻, 희생)으로〉. 명상 등을 잘 수행한 사람은 생명 에너지(프라나)의 결합을 끊는 시각에 입문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입문은 죽음의 시각에만 주어야 한다. 이 특별한 유형의 입문은 다음에 설명될 것이다. 그래서 〈강한 은혜의 하강〉은 세 가지다.

④ 〈강한 보통의 은혜의 하강〉으로 입문을 받는 이는 쉬바와의 동일성에 대한 깊은 확신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점차로 익음에 따라, 그는 몸을 버린 뒤 쉬바가 된다.

⑤ 〈보통인 보통의 은혜의 하강〉에서는 쉬바성을 얻기를 열망하더라도 즐거움을 위한 욕망에 압도당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은 입문을 통해 그에게 주어지는 순수한 지식을 받는 자다. 그는 현재의 몸에서 요가의 수행을 통해 얻는 즐거움을 경험하고, 그의 몸을 벗어나는 시간에 쉬바가 된다.

⑥ 〈약한 보통의 은혜의 하강〉에서는 지금 몸을 떨어뜨린 뒤 다른 몸에서 즐거움을 경험한 뒤에만 쉬바성을 얻는다. 그래서 〈보통의 은혜의 하강〉 또한 세 가지다. 즐거움을 향유하려는 열망이 지배적일 때, 그때 은혜의 성격을 〈느리다〉고 한다.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만트라의 반복과 같은 요가의 방법을 통해 주와의 동일성을 얻는 것을 바라게 된다. 만트라와 요가의 수행은 마지막이 해방으로 끝나고, 은혜의 성격에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느린(약한) 은혜의 하강〉도 비교하여 구분하면 세 가지다. 이것들은 은혜의 하강에 중요한 원리다. 바이슈나바와 또 다른 전통에서는, 은혜의 하강이 마치 왕의 은혜와 같아서 해방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유형은 여기서는 논의되지 않는다. 샥티는 쉬바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느린 은혜의 하강〉의 경우에는 좋은 것(제슈타)이 아닌, 부정적이고(고라) 무서운 것(고라타리)이다.

샥티가 모든 곳에 현존하더라도 다른 효과와 또 다른 형태를 가진다. 제슈타 샥티로서 그것은 사람을 궁극의 목표로 이끌지만, 고라와 고라타리 샥티, 즉 부정적이고 무서운 것은 사람을 세속적 존재계로 이끈다.
--- p.252~257

모든 탄트라의 핵심(核心)과 정수(精髓)는 아마도 이 탄트라 사라일 것이다. 사라라는 말이 곧 핵심, 정수, 요체(要諦)를 말한다. 인도 특히, 카시미르 쉐이비즘 수준에서는 〈책의 제목〉이 곧 그 주제와 목표와 내용을 포함한다. [이것은 파라 트리쉬카에서 경전의 필수 요소로 다루었고, 탄트라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비갸나 바이라바에서(부터) 다룬 것이다.]

한편 “사라”라는 말은 히브리 성경에서는 〈여자 가장(家長), 공주〉 즉 어머니를 뜻한다. 아브라함 (“족장, 아버지”)의 〈아내 겸 누이〉 말이다. 히브리 성경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히브리(“가로지르다”) 사람〉의 부모(한몸)라는 것을 개명 등의 말장난을 하면서까지…… (읽는 자는……) 어쨌든 그 후 유대교(기독교)는 서양으로 건너가 〈서양의 종교〉가 되었고, 힌두교(불교)는 동양에 남아서 〈동양의 종교〉가 되었다. (그리고 서양은 남성적이고 동양은 여성적이다. 서양은 〈좌뇌적인 면〉이 강하고 동양은 〈우뇌적인 면〉이 강하다. 또 서양은 명사(名詞)가 힘을 쓰는 곳이고, 동양은 동사(動詞)가 압도적인 곳이다. 그리고 〈우리가 늘 쓰는 말〉이 〈우리의 생각〉과 우리를 장악하고 있다……)

---「나가며」중에서

출판사 리뷰

탄트라 사라 들어가는 글

아비나바굽타의 저작인 『탄트라 사라』는 그의 역작(力作) 『탄트라 알로카』의 축약판(縮約版)이다. 탄트라 알로카...... 모든 사람이 그 책을 그의 〈대표작, 걸작(傑作), 대작(大作) 즉 “Magnum Opus”〉라고 한다. 마치 저 모든 탄트라의 백과사전(百科事典)과 같은...... 그것을 아비나바굽타는 다시 “어린” 우리를 위해 요약했다. 현대의 탄트라 사라와 탄트라 알로카의 번역으로는 다음이 있다.

1. 『Tantras?ra of Abhinavagupta』 H. N. Chakravarty, 2012
2. 『Tantras?ra』 Gautam Chatterjee, 2015
3. 『Essenza dei Tantra』, 1960
『Luce dei Tantra - Tantr?loka』, 1999 R. Gnoli(라니에로 뇰리, 이탈리아어판)

〈평등(?) 사회〉를 위한 〈정치와 경제의 복지〉는 우리 시대에서는 큰 화두의 하나였다. 그러나 불행 하게도...... 그런 복지와 평등이란 개념은 〈영적인 영역〉에서는 없다! 이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예수는 단호하게 그리고 잔인하게(?) 말한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의식(儀式)을 다루며, 한마디...... 의식(意識)은 쉽고, 의식(儀式)은 어렵다! 의식(儀式), 의례(儀禮)는 어렵다. 아마도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고, 아니면 선진 들이 일부러 비밀로 감싸둔 것이어서...... 아니면 필자의 큰 관심사(關心事)가 아니어서...... 의식(意識)은 쉽고?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의식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고, 의식(의례)은 어쩌면 쉬울지도 모른다!

비갸나 바이라바에서 시작된 〈어떤 숙제(?)〉는 이 탄트라 사라로 끝을 맺으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행운이 기다리고 있다면 기꺼이 가리라.) 출판일도 〈2022년 2월 22일〉로 아예 정했다. 탄트라 사라가 우선 22장으로 되어 있고...... 해부학 〈골학(骨學)〉에서 가장 골치 아픈 우리의 두개골(頭蓋骨) 개수가 22개이고, 유럽어의 기원이 되는 히브리어의 알파벳도 22개이고...... 저 난해한 (성경의 마지막) 요한계시록(啓示錄)도 22장으로 되어 있다. (숫자 “2”는 필자와는 인연이 많은 숫자다.)

비갸나 바이라바...... 그 책은, 필자가 편집하고 또 출판하면서 백 회 이상을 읽었으며, 앞으로도 읽으리라. 교회 다니던 시절, 필자는 구약은 30회, 신약은 100회를 〈자세히〉 읽는 것을 목표로 세운 적이 있다. 무릇 경전은 읽고 또 읽어야 한다! 음미하고 또 음미해야 그 무언가가 조금씩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은 〈필자가 보기에〉 책을 읽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책이야 오죽하겠는가!

부제(副題)인 “〈트리카 영성 철학(哲學)〉의 요체 (要諦)”에 대해서도 한마디…… “트리카”는 〈삼위(三位)〉를 가리키며, 〈카시미르 쉐이비즘〉을 말하고, “철학(哲學)”은, 잘 아는 대로, “Philo-sophy”로 〈지혜(智慧)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영성 과학(科學, Science, Scientia, “지식”)〉도 좋다. 무릇 “과학”이란 〈Homo Sapiens(지혜로운, 맛을 아는 인간)〉가 하는 것일 터.

탄트라 알로카가 모든 탄트라의 집대성인 만큼 그 축약판인 탄트라 사라는 카시미르 쉐이비즘의 여러 경전에서 다룬 주제일 경우가 당연히 많다. 그러나 사라(핵심)인 만큼, 이미 다룬 주제들은 요약, 정리된 의미와 더불어 더 심화되고 확장된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의식(儀式) 등의 처음 다루는 주제들은 〈(그 옛날 인도의) 비의(秘儀)의 세계〉로, 또 〈(미래의 어떤) 창조적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데려갈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직관과 통찰, 공감력과 상상력으로써 과거와 미래, 의식과 무의식의 땅을 마음껏 넘나들며, 〈나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다. 일찍이 신(神)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우리가 〈두렵고 무서운〉 저 과거와 미래, 의식과 무의식의 땅을 행하여 보는 것만큼, 그것은 〈나의 것〉이 된다. 〈저 영적인 거인들이 사는 땅〉 즉 〈그 무한(無限)의 땅〉을 행하여 보는 것만큼 〈그 땅의 지혜(智慧)〉는 〈나의 영역(王國)〉이 된다. 그것이 “사라”라는 아내를 둔 〈열국(列國, 많은 왕국)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는 기별이다.

축원문(祝願文)

어머니는 비말라칼라, 빛의 형태로 〈새로운 생명(아비나바굽타)〉을 가졌고, 아버지는 심하굽타, 온전의 전형(典型)으로 자신을 〈다섯 행위〉로 나타내는구나! 내 가슴(흐리다야, 중심, 中心)은, 이 〈쉬바-샥티 쌍의 합일(야말라)〉이 지고(至高)의 넥타로 구현(具顯)되어, 창조(創造)의 형태로 마구 뛰누나! 모든 사람이 저 탄트라 알로카, 장문(長文)의 책을 읽을 수 없기에 이 탄트라 사라, 단문(短文)을 지었다. 그러니 이것을 잘 들어보라. 저 해 같은 샴부나타 앞에 엎드리노니 그는 나 아비나바굽타의 가슴에서 모든 제한과 무명(無明)을 걷어냈도다. 주(主)를 경외하도록, 이를 읽어라.

위 서시 형태의 축문은 카시미르 쉐이비즘의 전문용어를 사용하여 - 언어유희로, 말장난으로 -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이제 아비나바굽타는 “새로운” 책을 지으면서 - 창조하면서……옛날, 아버지 심하굽타와 어머니 비말라칼라의 야말라(합일)에서 새롭게 생긴 그 자신을 말한다. 아버지는 물론, 쉬바(“의식”)를 상징하고 어머니는 샥티(“에너지”)를 나타낸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알든 모르든,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창조(물) 혹은 비밀〉은 (이 책이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다. (“아비나바”는 〈(항상) 새로운〉, “굽타”는 〈숨은, 비밀〉이라는 뜻 이다.) 그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 〈새로운 책(비밀)〉(즉 아비나바굽타 자신)을, 이 〈엄청난, 뛰는 가슴〉을 읽어라!” (사정이 이러하니, 필자로서도 여간 부담이 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탄트라 알로카 전부를 다룰 재주도 없고……) 물론, 그 〈새로운 비밀〉은 이 세상(마야)을 넘어 서는 〈영적인 세계(의식)〉를 말할 것이다. (당연히, 이 세상을 버리라는 그런 뜻은 전혀 아니고.)

흐리다야의 “마구 뛰는 가슴”은 〈우주적인 기쁨 (자갓-아난다)〉을 말한다. 〈모든 것이 의식(意識)의 저 분화되지 않은 단일성(單一性, 하나임, 전체성) 속으로 합일되는 것〉 말이다. 그것의 형태는 〈항상 비추는 빛〉이다. 뜨는 것도 지는 것도 알지 못하는?? 〈(그 안에서) 쉬는 것〉, 즉 안식(安息, 쉼)이 그것의 본성이다. 아비나바굽타는 그 〈의식의 가슴(하늘)〉을 독자들이 얻을 수 있기를, 자신이 그것을 나타내기를 기원한다.

야말라는 〈최고의 평형(平衡) 상태〉, 즉 〈쉬바와 샥티의 합일(合一)〉을 나타낸다. 이 합일 안에서는, 쉬바는 쉬바도 샥티도 아니고, 또 샥티는 샥티도 쉬바도 아니다. 그것은 둘의 융합(融合)이다. 이 합일은 흔히 “성교(性交, 삼갓타)”로 알려져 있다. 〈창조의 과정〉에서, 이 합일로부터 탓트와로 알려진 모든 요소가 생겨난다. 이 과정은 창조성의 미묘한 충동의 결과이고, 또 떨면서 동요하는 어떤 고조(高潮)이고, 그 통합을 깨는 원인이다.

그러나 〈절대 평형의 비이원적인 본성〉은 - 이 〈절대적인 합일(야말라, 삼갓타)〉은 - 창조의 과정 내내, 파도 없는 대양처럼 본래의 상태로 고요하게 남는다. 창조의 과정에서 그것은 먼저 둘(쉬바와 샥티)로 자신을 보여주고, 밖으로 확장하여 셋이, 그다음은 다수가 된다. 도덕경은 말한다. “도(道)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

쿨라라는 말은 보통 “몸(Body, 전체성, 우주)”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달(月)의 〈열일곱 번째 칼라〉 즉 〈불멸의 상태(그믐, 흑암)〉를 말한다. 비사르가는 〈완전한 성적 교합〉에서 일어나는 〈물방울의 방출〉을 말한다. 그것은 쉬바와 샥티의 색으로, 정액은 희고 또 월경(난자)의 피는 붉다. 그것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몸을 창조한다. 탄트라에서 비사르가는 하-아르다 칼라 즉 〈하 음(音)의 반(半)〉이다. 어머니는 쉬바의 〈자유로운 에너지〉로, 아버지인 쉬바와 합일(合一)로 남는다. 이 샥티의 본성은 “자신을 알아채는 일(비마르샤)”이다. 또 〈이런 것〉은 - “비”사르가, “비마”르샤, 쿨 “라”, “칼라” 등 - “비말라-칼라”라는 그의 어머니 이름의 말장난(뜻풀이)이기도 하다. 그는 요기니부 라고 한다.

아버지는 판차-무카 즉 〈다섯 얼굴을 가진 쉬바〉이다. 다섯 얼굴은 이샤나(위), 탓푸루샤(동), 사됴 자타(서), 바마데바(북), 아고라(남)를 가리키고, 또 〈의식(칫), 지복(아난다), 의지(잇차), 지식(갸나), 행위(크리야)〉의 다섯 가지 샥티를 말한다. 쉬바의 〈다섯 얼굴〉은 이 〈다섯 샥티〉를 통해, 〈창조, 유지, 용해, 은폐, 은혜〉의 다섯 행위(판차- 크리탸)를 한다.

우리 전통에 따르면, 〈온전(穩全)한, 올바른 지식 (인식, 앎)〉이 〈해방(목샤)의 원인〉이다. 그것은 저 〈속박의 원인〉인 무명(無明) 혹은 무지(아-갸나)의 반대이기 때문이다. 무지(無知)는 두 가지다. 하나는 〈지식적인 혹은 경전적인(바웃다) 무지〉이고, 다른 것은 〈자신 안에 있는, 영적인(파우루샤) 무지〉이다. 〈남들이 말하는 대로만 아는, 그런 지식〉은 실은 〈궁극의 실재에 대한 무지〉이다. 〈나 자신이 아닌 것〉을 나로 여기는 못된 생각(지식)이다. 반면에 〈자신 안에 있는, 영적인(파우루샤) 무지〉는 생각의 구름(비칼파)에 관한 관심으로, 의식이라는 하늘이 가려진(제한된) 것이 특징이다. 이런 무지가 속된 존재계의 근원이다. 이것은 〈불순(不純, 말라)〉을 다루는 부분에서 논의할 것이다.

“지식은 속박이다.”는 쉬바 수트라의 유명한 그 말을 기억하는지…… 〈우리의 분별하는 짓〉,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일〉은, 사실은 〈온전한, 올바른 지식〉이 아닌, 무지 이다. 〈제한되고 손상된 지식〉이다. 이 무지는 두 가지로 즉 ① 〈파우루샤(영적인) 무지〉와 ② 〈바웃다(경전적인) 무지〉이다.
① 〈진정한 자신〉, 〈진짜의 나(“의식”)〉를 〈나〉라고 전혀 〈알지 못하는 것〉
② 〈몸, 마음, 영혼 등 진짜의 나가 아닌 것〉을 〈나〉라고 (남들이 말하는 대로) 〈아는 것〉

〈내면에 있는, 영적인 무지〉는 입문 등으로 제거 될 수 있지만, 〈불확정성이 특징인 지식적 무지〉는 입문도 효과적이지 않다. 입문이라는 것은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해야 할지, 그 확신이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뒤에 탓트와의 정화와 쉬바와의 합일이 따른다. 그러므로 지성적인 사람에서는 〈결정적인 지식의 성취〉가 꾸준히 있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이런 수행은 〈자신 안에 있는, 영적인 무지〉를 근절한다. 왜냐하면 의식이 생각의 구름의 형태로 수행될 때, 그것은 결국 〈생각의 구름이 없는 의식의 하늘〉로 끝나기 때문이다.

무지처럼 지식도 두 가지다. 〈영적인 지식〉은 〈생각의 구름이 전혀 없는 의식의 하늘〉로, 〈쉬바 와의 동일시〉가 일어날 때 온다. 생각의 구름으로 꽉 찬 〈영적인 무지〉는 그 반대이다. 이 불완전한 지식이 속된 존재계의 원인이다. 〈영적인 무지〉가 입문으로 사라질 때도, 〈과거의 행위로 인한 불순 (카르마 말라)〉은 여전히 지속된다. 이런 이유로 〈참나의 지식〉이 번쩍이지 못한다. 카르마 말라는 무의식적인 것(프라랍다)이다. 프라랍다의 완전한 소멸로 몸은 떨어져 나가고, 〈영적인 지식〉이 나타 나게 된다.

그 순서는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다. ①입문, ②〈영적인 무지〉의 파괴, ③경전 공부, ④ 〈경전적 지식〉이 생겨남, ⑤〈살아 있는 동안의 해방〉, ⑥카르마 말라의 완전한 소멸, ⑦ 몸이 떨어져 나감, ⑧〈영적인 지식〉의 출현, ⑨본성을 깨달음.

생각(비칼파)이 의식과는 구별되더라도 그것은 사실, 의식과 다르지 않다. 바른 교설(삿-타르카)을 통해 생각의 정화가 일어날 때, 수행자는 〈생각이 그 근원에 용해된 상태〉에 도달한다. 그것은 본질 에서 〈미(未)-확정적인 것(아-비칼파)〉이다.

생각의 정화는 제 4장 샥토파야에서 다룬다. 참나(아트마)는 “생각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운” 〈의식의 빛(프라카샤)〉이고 또 쉬바의 본성(本性) 이다. 그러므로 모든 면에서 모든 것에 관한 〈확정 적인 성격의 바른 지식〉을 얻는 일은 바람직한 것 이다. 이런 지식은 경전(經典)을 공부하는 것으로 - 〈이런 책〉을 읽는 것으로 - 된다! 우리의 경전은 권위가 있다! 그것은 지고의 주가 계시한 것이다. 다른 (전통의) 경전이 말하는 것들은 별도로 받아들여지지만 〈지식(앎, 인식, 의식)의 전체성〉과는 직접 관련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경전의 지식은 어느 정도의 해방만 준다고 말한다. 모든 종류의 속박에서가 아니다. 반면, 지고의 주에 의해 계시된 경전들은 모든 종류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준다.

지고의 주가 가르친 경전들은 다섯 흐름이 있고, 〈10, 18, 64의 경전 군(群)〉으로 나눠진다. 그것들 중에 가장 완전한 경전은 “트리카” 경전 이고, 또 그것의 핵심은 말리니비자야 탄트라다. 그 안에 담긴 주제를 모으고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실재에 관한 적절한 증험(證驗)이 없이는, 이 지식은 해방을 줄 수도 없고, 수단이지도 않다. 해방을 줄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지식(앎, 경험)은 오로지 〈흠 없는 지식〉 뿐이다.

『파라마르타-사라』에서 아비나바굽타는 목샤 즉 해방은 분리된 어떤 영역도 없고, 그것 쪽으로 진행하는 것도 없지만, 자신의 자유의 힘의 완전한 발달 때문에 무지를 없애는 것으로 실현된다고 말 한다. 해방을 지식의 결과로 여기거나, 또 지식을 해방의 원인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지식은 참나의 진정한 본성의 현현으로 여겨야 한다. 〈다섯 흐름〉은 〈쉬바의 다섯 얼굴(판차-무카)〉을 참조할 것(15쪽).

〈10, 18, 64의 경전 군(群)〉은 〈다양성(이원론)〉, 〈다양성 속의 단일성〉, 〈단일성(일원론, 불이)〉을 가르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필자에게 그것은 곧 박티(헌신, 신애)를 강조하느냐, 갸냐(지혜, 통찰)를 강조하느냐, 아니면 샥티 파타(성령 받음, 은혜)를 강조하느냐로 보인다. (잘 생각해 보라.) 말리니비자야 탄트라를 으뜸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물들의 진정한 본질이 결정되지 않으면, 사람이 해방을 얻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논의하기 때문이다. (루드라-야말라 탄트라와 함께 꼭 기억해야할 경전이다. 다행히도 말리니비자야 탄트라 전체를 다룰 행운이 필자에게 주어졌다. 참, 감사하다! 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흠 없는 지식〉은 저 “슛다 비디아”로, 즉 의식 [인식, 〈순수한 “아는 현상”〉, 전지(全知) 등]으로 읽을 수 있다. 〈가장 높은 인간〉의 끝은, 지식(앎, 경험)에서 그 뿌리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수행(修行)되어야 한다. 내가 이 책을 쓰는 것은 이런 종류의 지식(경험)을 얻기 위함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格言)은 〈이런 참 지식(앎, 경험)을 가질 때 누리는 참 자유 하는 힘(샥티, 권능)〉을 말할 것이다. 지식의 결여가 곧 속박의 원인이고 불순(不純, 말라)이라고 하느니 〈올바른 지식〉이 속박을 근절하도다 모든 얼룩이 사라질 때 의식에서 해방은 절로 오거늘 그러므로 나는 이 책으로 〈드러나야 할 것〉을 드러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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