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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 신채호 한국 학술연구서·역사서 1. 인용서(引用書)의 선택 (1) 인용서 진위(眞僞)의 변별 (2) 조선고사의 잔결(殘缺) (3) 중화사가(中華史家)의 조선에 관한 기록 (4) 조선인의 기록으로 중화 사책에 초록된 『삼국지』의 조선사실 (5) 『삼국지』 조선에 관한 기록 전부를 신용할 수 없는 조건 (6) 삼한에 대한 기록 2. 전삼한(前三韓) 삼조선(三朝鮮)의 전말(顚末) (1) 삼한(三韓)의 소자출(所自出) (2) 삼한(三韓)은 삼조선(三朝鮮) (3) 전삼한(前三韓)의 명칭의 유래 (4) 전삼한(前三韓) 창립자(창립자) 단군(壇君) (5) 전삼한(前三韓)의 강역(疆域)과 연대(年代) 3. 후삼한(後三韓) 『삼국지』에 보인 삼한[나·가·제 삼국] (1) 후삼한(後三韓) 고증에 대한 선유( 先儒)의 오류 (2) 중삼한(中三韓)의 약사(略史) (3) 후삼한 70여국의 명호.위치와 나·가·제 역사 (4) 후삼한의 상호의 관계 (5) 후삼한의 병립한 열국(列國) (6) 후삼한과 낙랑·대방(帶方)의 관계 (7) 후삼국의 북방제국의 언어 |
申采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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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민족주의 사관 논문
- 50여차례 신문 논설로 기재했으면 미완에 그쳤다. 특히 신채호가 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한 최초의 한국고대사로 평가받는 독사신론(讀史新論)을 1908년, 그의 나이 불과 29세에 발표한 것은 이런 활발한 저술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기호흥학회, 《가정잡지》, 《대한협회 월보》 등에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14년에는 윤세복의 초청으로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에 머물며 동창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는데, 이때 국사 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서간도 일대의 고구려 고적을 답사하였다. 1915년 이회영의 권고로 북경으로 옮겨 1919년까지 4년간 체류하였다. 북경에서 체류하면서 중화보와 북경일보에 글을 기고하여 생계를 꾸렸다. 그러면서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일러두기 ‘신채호’ 작가의 원작 토속어(사투리, 비속어), 한자를 그대로 담았으며 오탈자와 띄어쓰기만을 반영하였습니다. (작품 원문의 문장이 손실 또는 탈락 된 것은 ‘X’, ‘O', ‘?'로 표기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