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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흔적
사회적 감성으로서의 슬픔 _정근식 망각을 일깨우는 낮은 목소리 _류시현 분단과 전쟁의 상흔 _김창규 지울 수 없는, 학교 _한순미 이주의 유령 _문재원 제2부 울음 설움을 넘어 슬픔으로 _송효섭 눈물로 그린 그림 _이선옥 죽음, 그 시공의 초월적 변주 _조태성 죽음의 세 가지 풍경 _류도향ㆍ강애경ㆍ정유미 제3부 공명 슬픔의 공동체 _박홍규 눈물의 교환가치 _최유준 자살 권하는 사회 _김경호 저항은 과연 가능한가 _정명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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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이란 무엇인가
감성은 집단적이며 역사적인 영역에 속한 것 인간이 가진 사상이나 관념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뀐다는 생각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이지만, 인간의 몸이나 감정이 사회적이고 또한 역사적이라는 주장은 이보다는 훨씬 낯선 것이다. 감정은 자연에 속하거나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라는 생각들이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왔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감정은 심리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특정 시기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감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런 현상이 심리학을 넘어서 역사학이나 문화연구의 대상이라는 생각은 프랑스 아날학파에서 발전하였다. 블로끄와 함께 아날학파를 만들어간 페브르는 역사심리학의 과제로 특정 시대의 인간들이 가졌던 심적 소재들을 상세히 정리하여 분류하고 물질적, 지적, 정신적 세계의 전체를 재구성해볼 것을 제안하였다. 1953년에 발간한 책 『역사를 위한 투쟁』에 실린 「감성과 역사」라는 논문에서 그는 인류사에서 지적 활동에 대비되는 정동적(감정적) 활동의 역할에 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연구할 만한 대표적인 감성으로 증오, 공포, 잔학, 사랑 등을 들었으며, 이를 연구하기 위하여 언어학이나 도상학, 문학 등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런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1968년 로베르 망두르는 ‘집단의 세계관 또는 감성, 즉 여러 집단이나 사회전체에 의해 인정된 집단적 심리의 내용을 형성하는 표상이나 이미지, 신화와 가치체계 등을 나타내는 행동, 표현, 침묵을 재구축하는’ 연구를 심성사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뒤비는 심성사연구의 세 가지 서로 다른 고찰단계로, 처음에는 기호의 총체로서의 표현양식을 연구하고, 두 번째로 문화모델, 즉 이전 세대로부터 전수되는 이미지나 신화의 교육방법을 연구하며, 세 번째로 가치체계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해보는 것을 제안하였다. 우리가 화두로 삼고 있는 감성은 충분히 정교화되고 이론적으로 확립된 개념이라고 할 수 없다. 감정이 개인적이며 인간의 본능에 속한 것이라면, 감성은 집단적이며 역사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다. 감정이 상황적이고 주관적인 일상의 사건들에 해당한다면, 이에 비해 감성은 지속적이며 객관적인 구조에 해당한다. 감성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신체화된 감정이며, 특정 방향으로 규율화된 감정의 표현방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감성은 합리적으로 선택된 이념이나 이해관계의 영역보다는 생존과 안전의 욕망에 기초하여 구성된 무의식의 영역에 자리잡고 있다. 사회적 감성은 짧은 시간적 지속으로서의 역사적 사건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그것의 형성과 해체는 장기적인 시간지속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감성을 창출하고 유지시키는 역사적 사건과 그것의 구조화된 효과, 그것을 담지하고 있는 사회적 주체, 그들의 집단적 대응을 탐구해야 한다. 사회적 감성으로서의 슬픔은 역사적 대사건, 또는 거시적인 사회구조의 산물 우리는 이런 논의를 한국의 근현대사에 적용할 수 있다. 한국인들이 근대라는 세계사적 시간들과 연속적으로 부딪치면서 축적된 역사적 감성들이 존재하였고, 이들은 또한 거시적 사회변동에 따라 해체되거나 새롭게 형성된다. 그것은 민중들의 일상생활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어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림이나 노래, 춤,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만담에 깃들어 있고, 또 영화, 드라마, 각종 문학 작품들에도 짙게 배어 있다. 만약 한국의 근대사를 꿰뚫고 있는 핵심적 감성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하나는 슬픔, 또는 비탄이 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껴안고 있는 해학이 되지 않을까 싶다. 흔히 슬픔은 기쁨과 상응하고, 그것의 표현은 울음과 웃음으로 나타나는데, 감성으로서의 슬픔에 기초하여 웃음이 표현될 때는 해학이 된다. 식민지로 전락한 시대, 그리고 짧은 해방의 환희 뒤에 찾아온 전쟁과 빈곤, 그리고 분단과 독재로 점철된 시대를 살아왔던 20세기의 한국인들의 감성의 중심에 인간적 존재로서는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suffering과 여기에서 우러나오는 슬픔, 또는 서러움 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한국인들은 그런 슬픔을 곧 바로 표현하지 못했거나, 그것을 웃음과 함께 표현하면서 살아왔고, 공통의 감성구조를 발전시켰다. 슬픔은 분명히 개인적 감정의 하나일 뿐 아니라 사회적 감성의 하나이기도 하다. 사회적 감성으로서의 슬픔은 그것이 형성된 역사적 대사건, 또는 거시적인 사회구조의 산물이며, 순간순간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지속성을 가진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격정적으로 표현되는 통곡, 탄식을 동반하는 비탄(悲嘆), 그리고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 최대한 억제되는 침묵의 슬픔 등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사회적 감성으로서의 슬픔은 쏟아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삭혀지거나 삼켜지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가시적 표면에 쉽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사회 저변 또는 집합적 심성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구조화된 슬픔’이다. 이런 사회적 감성으로서의 슬픔에 관한 논의를 위해서는 그것을 만들어낸 역사적 고통 또는 고난, 그것이 자리하고 있는 시공간적 장소, 그것의 표현이나 재현의 전체상을 포착하는 것이 우선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B〉슬픔의 역사 구조적 원천들 서러운 슬픔, 감성의 문화정치 누군가가 현대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감성으로서의 슬픔이 ‘통곡이 아니라 신음’을 동반하거나 삼켜지는 방식으로 표출된 사례를 들어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그 사례들을 찾을 수 있을까? 1980년 5월, 10일간의 시민항쟁이 처절한 주검들을 남긴 채 끝나버린 그 날 새벽의 광주의 정적? 만약 이 사례가 적어도 질문에 대한 오답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슬픔의 본질이나 정체에 관한 적어도 세 가지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하나는 사회적 슬픔은 집단적인 죽음 또는 공동체적 상실과 연관되어 있고, 둘째, 그것이 집단적 열망의 좌절과 연관되어 있으며, 셋째, 마음 놓고 우는 통곡으로 표출되지 않는 공동체적 규율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나타나는 ‘정적’은 사전에 약속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참아내고 버티며 그것을 넘어서려는 집단적 무의식, 또는 규율된 감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또한 좌절에 의한 슬픔은 죽음으로부터 발생한 슬픔에서 기원한 2차적 현상이다. 죽음이나 좌절에 의한 슬픔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겪는 무력감과 섞여 있다. 이런 슬픔은 ‘서럽다’는 느낌을 동반한다. 서러운 슬픔은 자유롭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환경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째로 드러내기 어려운 정치사회적 조건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직관적 통찰로부터 우리는 서러운 슬픔에 관하여 몇 가지를 덧붙일 수 있다. 그것은 균질적인 공간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민족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지방적인 것이기도 하며, 제국이라는 범주를 끌어오면 그것은 민족국가를 넘어서는 지역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걸쳐있는 심리현상이지만 문화나 정치의 경계에 걸쳐있는 역사현상이기도 하다. 여기로부터 감성의 문화정치라는 개념이 성립한다. 나는 이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 있는 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려고 한다. 2006년에 별세한 우즈베키스탄의 유명한 고려인 화가 신 니콜라이(한국명 신순남)는 〈레퀴엠〉과 〈찬란한 결혼식〉이라는 그림을 남겼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를 당할 때 연해주의 한인들은 수많은 지도자와 가족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이들은 집단적 상실의 경험 속에서 공통의 감성을 발전시켰고, 신 니콜라이는 이런 감성을 어두운 굴 속에서 촛불을 켜고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푸른 색 톤의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가 표현한 고려인들의 감성이 항상 엄숙하고 경건한 푸른색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일찍 세상을 뜬 자신의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1949년 ‘살구꽃잎이 눈처럼 휘날리는 날, 집단농장의 고려인들의 축복을 받으며 치뤄진’ 자신의 결혼식 모습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붉은 빛깔의 꽃잎이 빛을 받아 찬란하게 부서지는 광경이었다.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나 있는 슬픔은 한국의 식민지 디아스포라 경험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감성을 표현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식민지 경험이나 민족적 이산의 경험 때문에 그의 그림에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죽음과 고통을 통한 ‘슬픔’의 사회적 재생산 이런 사회적 감성이 형성되는 역사적 기원을 한국근대사에서 상상해본다면,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을 떠올릴 수 있다. 당시에 관군이나 일본군들에게 희생된 민초들은 얼마나 많았고, 그들의 가족들은 어떻게 그 슬픔을 표현했을까? 당시에 희생된 농민들에게는 안식할 장소가 허용되지 않았고, 그들의 가족들은 크게 울 수조차 없었다. 그 사건은 ‘동학난’으로 명명되었고, 이 싸움이 끝난 후부터 일본의 식민지배가 끝나는 50년간 이런 상태가 지속되었으므로, 농민군에 대한 기억과 그 가족들의 슬픔은 거의 지워져버렸다. 그들의 고통과 슬픔의 감정은 제대로 표현될 수 없었으며, 기층사회의 민중적 감성으로만 남았다. 이런 운명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저항했던 의병들과 그들의 가족, 또는 지역공동체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역사와 기억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겪었던 좌절과 슬픔은 〈녹두꽃과 파랑새〉 같은 노래의 감성으로 남았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일제하의 민중생활을 담은 사진들을 보면, 기쁨에 겨워 환호하는 사람들을 찾기 어렵다. 슬픔에 겨워 통곡하는 사진들도 거의 찾기 어렵다. 한국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들은 말 그대로 자기재현이라기보다는 서양에서 온 여행객이나 선교사들에 의해 그리고 일본 지배당국에 의해 찍힌 것이 대부분이지만, 무엇인가 그들만의 감성을 깊숙히 내장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1919년 3.1운동은 조선총독부나 식민지배자로서의 일부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조선총독부는 지배정책의 방식을 바꾸었고,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의 실상 또는 조선인의 내면을 알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이들은 조선인들의 드러난 말이나 행동보다는 내면세계를 알고자 했고, 이를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의 내면세계는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20년부터 조선인 민간신문사에 의해 조선의 산천이나 주민들이 공공적 영역에 나타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식민지 지배를 비판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을 비관하거나 울분, 슬픔을 토로하는 각종 텍스트들은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1930년대 초반에 이르면, 표현의 영역에서의 작은 저항들조차 통제의 대상이 된다. 이런 문화적 통제와 함께, 식민지 교육의 영역에서는 교육된 정서를 뜻하는 정조(情操)가 교육의 대상이 되었다. 정조교육은 몸을 가누는 품행교육과 세트를 이루는 ‘보통교육’의 핵심이었다. 식민지 학교에서 시행된 음악, 미술교육과 함께 ‘일기쓰기’ 교육은 조선인의 감성교육이자 내면세계의 근대적 형성과정이었는데, 그것에 수반되는 ‘일기 검사’는 감성과 내면조차 권력에 의해 발가벗겨지고 해부되는 메커니즘이었다. 총력전 체제하에서 강조된 연성(練成)은 사상, 의지, 체력, 감정을 대상으로 하였다. 연성된 감정은 일종의 사회적 감성으로 전환된다. 식민지하 감성의 형성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통로는 대중적 시각매체와 소리매체들이었다. 근대적 대중매체들은 면접적 상황을 넘어서서 보다 빨리 그리고 보다 넓게 정보를 유통시키고 감성을 주조하였다. 영화, 연극, 음반은 감성을 균질화하는 통로였고,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검열을 통해 이를 통제하려고 시도하였다. 배우들의 몸짓이나 변사들의 해설, 또는 성우들의 대사는 특정한 민족적 감성을 만들어냈다. 만담에도 민족적 슬픔이 표면적 웃음 아래에 깔려 있었다. 전쟁과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과 이산 그렇다면 해방 후의 상황은 어떤가. 아마도 지난 100년 동안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환희에 젖어 목청껏 소리를 냈던 경험은 1945년 8월 16일의 해방의 기쁨을 나타내는 ‘만세’였고, 그 이후에는 2002년 월드컵 대회의 승리의 함성이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 목청껏 소리를 냈던 것은 3ㆍ1운동 때였지만, 그때의 함성은 비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8월 16일의 함성은 속박에서 벗어난 해방의 목소리였다. 감성의 측면에서 보면, 해방은 감성의 대역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였지만 분단과 전쟁, 그에 뒤따른 빈곤은 그것을 방해했고, 죽음과 고통을 통한 ‘슬픔’의 사회적 재생산이 지속되었다. 동아시아의 전후질서는 중국혁명과 한국전쟁이라는 두 개의 연결된 사건들과 이에 따른 분단국가의 형성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혁명, 분단, 전쟁과 결합되어 있는 새로운 국가형성은 1948년과 1949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 과정은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창출과 맥락을 같이 한다. 한국의 분단은 동아시아 분단의 일부이며 후자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이다. 분단은 한 민족 두 국가 상태를 만들어내고 월남과 월북, 납북 등 다양한 월경을 통해 원치 않는 새로운 이산을 낳았다. 분단과 전쟁은 경계 넘기를 수반했고, 전쟁 포로들의 체재 선택 또한 가족적 이산을 만들어 냈다. 휴전체제는 이런 가족적 이산을 항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가족 및 고향상실은 죽음과 함께 또 하나의 슬픔의 원천이 되었다. 혁명과 전쟁을 거치면서 진행된 국가형성에서 전투원 뿐 아니라 무수한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무력에 의존한 통일의지는 전쟁이라는 민족적 불행과 참화를 낳았다. 전쟁은 전투 뿐 아니라 감금, 투옥, 추방, 학살을 동반하면서 진행되었고 전쟁고아와 포로, 상이군인 또는 미망인이라는 사회집단들을 만들었다. 또한 개인적 차원에서가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의 ‘슬픔’과 이를 관리하는 메커니즘이 만들어졌다. 사회는 항상 개인들보다 거대했고, 국가는 사회보다 항상 큰 존재였다. 전쟁과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과 이산은 역사적 감성으로서의 슬픔을 재생산한 핵심적 계기였다. 전쟁을 경험한 이후 성립한 냉전적 분단체제하에서의 역사적 슬픔은 전쟁과정에서 형성된 적대적 분노, 전쟁에 대한 공포, 전쟁이 남긴 상흔에 의한 고통,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희망 등이 뒤섞여 복합적인 것이 되었다. 1960-70년대에 진행된 대규모 이농과 도시화, 산업화, 그리고 권위주의적 통제에 의해 역사적 감성은 조금씩 변화되었으나 전쟁의 상처와 고향상실에 의한 향수와 슬픔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것은 금지되었으며 독재에 대한 저항과정에서 형성된 비판적 감성도 항상 우회적으로 표현되도록 조절되었다. 한국전쟁이 한국근대사에서 집단적 감성을 규정한 역사적 사건이었다면, 1980년 광주 항쟁과 좌절은 또 하나의 역사적 감성구조를 만들어낸 대사건이었다. 여기서 형성된 감성은 슬픔에 부채감을 더한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간적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에서 사망한 사람들에 대한 상실감 뿐 아니라, 역사적 현장에 함께 있지 않았다는 의식이 그 사건이후에 많은 시민들에게 생겨났다. 광주시민은 도청에서 싸우다 희생된 사람들에게, 외지의 시민들은 광주라는 도시공동체에 부채감을 갖게 되었고, 이것은 민주화 이행기 내내 관철되었다. 이 부채감은 희생에 대한 공감 뿐 아니라 보다 나은 정치공동체를 향한 공화주의적 시민의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광주항쟁이 이런 정의와 결합된 감성만을 만들어냈다고 말하는 것은 일방적이다. 민주주의로의 이행국면에서 사건의 진실, 즉 야만적 폭력을 보여주는 사진들을 전시했을 때, 이 사진을 본 사람들이 모두 진실과 정의의 편에 설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일부는 이것이 도저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부정했으며, 일부는 당혹스러워했다. 이런 반응은 이유를 말할 수 없는 보수주의적 감성을 형성해갔다. 결국 정치적 감성을 달리하는 두 개의 국민이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는 계층적 이해보다는 지역적 분할에 기초했고, 이것은 세계관의 차이, 그리고 정치적 감성의 차이를 구조화하여 2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