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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 편
일본 3대 일간지의 하나인 [아사히신문]은 1879년 오사카에서 창간되었으며, 1888년 창간된 [도쿄아사히신문]과 각각 서일본-동일본을 아우르는 양 체제의 신문이었다. 1940년 [아사히신문]으로 제호를 통일하여 오늘에 이르며, 일본 신문사 중 가장 진보적 성향을 띤다. 이 책에는 [도쿄아사히신문] 1919년 3월 1일~12월 26일에 실린 3·1운동 및 당시 조선의 정황을 알려주는 546편의 기사와 12점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제2권 고쿠민신문(國民新聞)·도요케이자이신보(東洋經濟新報)·후조신문(婦女新聞) 1890년 2월 창간된 [고쿠민신문]은 당시 정부계 신문의 대표적인 어용신문이며, 정권에 밀착된 모습을 보였다. 창간 당시와 달리 제국주의적·국가주의의 입장을 견지했다. 여느 신문과 달리 조선에 대해서도 풍부한 정보를 토대로 조선 사정을 상세히 알려주는 보도를 했다. 1895년 11월 창간한 경제전문지 [도요케이자이신보]는 자유주의로 일관한 논조를 지녔으며, 여느 매체보다 돌출된 주장이 주목을 끌었다. 한편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언론매체인 [후조신문]은 1900년 5월부터 약 43년간 발행된 주간지로, 신문을 통해 여성의 지위 향상을 꾀하며 여성들의 자각을 촉구했다. 이 책에는 이들 세 신문에서 1919년 3~12월에 실린 3·1운동 및 당시 조선의 정황을 알려주는 312편의 기사와 14점의 사진이 실려 있다. 제3권 중앙공론(中央公論)·교육시론(·育時論)·사회급국가(社·及·家)·아등(我等)·헌정(憲政) 1887년 창간되어 현재까지도 발행되는 일본의 대표적인 종합잡지 [중앙공론]을 비롯하여 교육([교육시론]), 정치·경제·국제 문제([사회급국가], [아등]) 등을 주요 이슈로 다룬 잡지의 기사를 수록했다. 일간지가 아닌 잡지에 실린 글들이어서 편수는 적지만 분량이 대체로 길며, 현상에 대한 분석과 비평, 진단과 전망, 제언 등을 담은 글들이 많다. 3·1운동에 대해서도 일간지에서 볼 수 없는 논조를 보여 준다. 1919년 3월~1920년 2월에 실린 글 가운데 83편이 수록되어 있다. 사진은 없다. 제4권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日新聞) 1876년 창간된 [오사카일보]의 제호를 계승하여 1888년 11월 발행되기 시작한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은 1943년 [도쿄마이니치신문]과 통합하여 오늘날 [마이니치신문]에 이른다. 철저한 사실보도와 진보적 경향의 논조를 보이는데, 1919년 3월의 경우 3·1운동 관련 기사의 수와 양에서 다른 신문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점이 두드러진다. 1919년 3~12월에 실린 3·1운동 및 당시 조선의 정황을 알려주는 885편의 기사와 32점의 사진이 실려 있다. 제5권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에도 시대 신문 판매상들이 목판으로 찍은 신문을 큰 소리로 ‘읽으면서(讀) 팔았던(賣)’ 데서 제호가 유래한 요미우리신문은, 현재 일본에서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전국 단위 일간지다. 1919년 3~12월에 실린 3·1운동 및 당시 조선의 정황을 알려주는 598편의 기사와 12점의 사진이 실려 있다. 제6권 요로즈초호(萬朝報)·미야코신문(都新聞) [요로즈초호]와 [미야코신문]은 근대 초기 일본의 대표적인 상업적 대중지로 손꼽힌다. 1892년 도쿄에서 창간된 일간지 [요로즈초호]는 스캔들 기사를 판매 전략으로 삼는 한편 번역소설을 시작으로 문예란에 힘을 쏟았다. 이후 사회주의와 노동 문제에도 관심을 나타내며 사회비판성이 강한 신문으로 변신했다. 1930년 [도쿄마이유신문(東京每夕新聞)]에 합병되었다. 1884년 창간한 [금일신문]에서 1888년 이름을 바꾼 [미야코신문]은 구미 소설의 번안 소개를 비롯하여 참신한 기획물을 선보였으며, 탐정 관련 기사나 연극 연예계 기사 등 예능 방면으로 특화된 성격을 보였다. 1942년 [고쿠민신문]과 합병되어 [도쿄신문]으로 오늘에 이른다. 이 책에는 두 신문의 1919년 3~12월에 실린 3·1운동 및 당시 조선의 정황을 알려주는 612편의 기사와 25점의 사진이 실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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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계급, 계층, 종교, 지역, 성별의 장벽을 넘어 조선인이 하나가 된 100년 전의 3·1운동을 이제 통일을 향한 민족의 새 길을 여는 민족 공동의 기억 자산으로 부활시켜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서는 반세기 동안 남과 북이 각각 축적한 3·1운동에 대한 연구 성과를 상호 존중하며 3·1운동에 대한 기억을 더 풍성하게 하여 민족 공동의 기억으로 복원시켜야 한다. 여기에는 3·1운동에 대한 남과 북의 연구 성과뿐만 아니라 한민족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의 3·1운동의 실태에 대한 연구 역시 집대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3·1운동에 대한 기초 자료 전수 조사 및 정리 작업이 시급히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 「발간사」 중에서 [도쿄아사히신문]의 3·1운동에 대한 첫 보도는 3월 2일 경성특파원발 ‘불온한 격문 배포’라는 제목의 3월 3일 기사였다. 이 기사는 “국장(國葬)을 앞둔 경성은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이 많아 매우 번잡했다. 1일 아침 남대문 역 앞에서 선인(鮮人)이 조선어로 된 격문을 붙였다. 또 조선인으로서 중요한 자에게도 같은 격문이 배포되었다. 이에 경무총감부는 활동을 개시했다. 덕수궁 장례식에 참례 중이었던 고다마(兒玉) 경무총장은 오전 11시 30분, 황급히 경무총감부로 돌아와 헌병대와 경찰서장을 집합시켜 대활동을 개시했다”고 보도했다. … 운동이 장기화되자 3·1운동을 조선인들의 ‘경거망동’과 ‘부화뇌동’ 혹은 선교사들의 ‘선동’으로 보려는 논조에서 운동의 원인을 총독 정치의 폭압성에서 찾으려는 논조도 대두되었다. [도쿄아사히신문] 4월 5일자에서 ‘식민지 통치의 혁신’이라는 제목 아래 “요란(擾亂)의 유력한 원인이 우리 총독 정치의 결함에 있음은 유감스러우나 사실이다”는 기사가 게재되었던 것이다. --- 「1권 해제」 중에서 [고쿠민신문]은 도쿠토미 소호(·富蘇峰)가 1887년 잡지 『고쿠민노토모』(·民之友) 발행의 성공에 힘입어 창간한 일간지이며, 1890년 2월 1일 제1호를 발행하였다. 흔히 [고쿠민신문]과 도쿠토미의 관계를 ‘분리할 수 없는 관계’라고 평가하듯이, [고쿠민신문]은 창간자이자 경영자이며 편집 총괄책임을 맡은 도쿠토미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신문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有朋), 가쓰라 다로(桂太·), 데라우치 마사다케(寺·正毅) 등 번벌(藩閥) 세력 및 군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고쿠민신문]은 ‘어용신문’으로 불리기도 하는 등, 정부계 신문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 3·1운동이 가장 왕성하게 일어나는 4월이 되면서 대부분의 신문은 논조를 수정하여 3·1운동의 발생 원인을 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에서 찾으며, 3·1운동으로 촉발된 식민지 조선의 통치체제 전환을 촉구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이에 반해 [고쿠민신문]은 4월 조선과 관련된 총 21개 기사 중에 6개 기사가 ‘진압’ 관련 기사였다. 이는 [고쿠민신문]이 ‘증병(增兵)’을 통한 3·1운동의 ‘진압’이라는 정부 방침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있었던 반면 불안감도 컸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쿠민신문]은 3월 30일자 ‘조선통치의 요(要)’라는 사설에서 “느슨하면 기어 올라오고 꾸짖으면 쪼그라드는 것은 선인의 통유성(通有性)”이라고 하며, 혹시라도 때를 놓치게 되면 일본의 식민통치에 중대한 결함을 초래할 우려가 있으니 진압 방침을 좀더 적극적으로 신속하고 철저하게 할 것을 당국자에게 당부했다. --- 「2권 해제」 중에서 이 시기 [중앙공론]에 실린 글 가운데 요시노 사쿠조의 글이 3·1운동 관련 연구들에서 주목받은 것은, 그의 비평이 정략적 판단에 의한 정부 비판이거나 ‘더 나은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정부에 대한 고언(苦言)이 아니라, 인간의 양심이나 국제적 정의 같은 더 보편적인 가치에 입각하여 당시 일본 정부의 제국주의 전략, 식민지 정책을 비판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시노는 … 조선의 ‘자치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고, 일본 역시 ‘지배능력’을 증명하기는커녕 3·1운동으로 그 ‘지배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해 버린 꼴이라며 일본의 식민정책을 비판하는데, 이러한 논리적 비판은 보편적으로 유효했던 만큼 일본 당국에게는 날카롭게 다가왔을 것이며, 주의 깊게 일독해 볼 가치가 있는 문장들이다. --- 「3권 해제」 중에서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의 보도 태도는 3·1운동을 어리석은 조선인들의 ‘소요’로 보고 일본의 선정(善政)에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태도로 보는 점에서 [도쿄아사히신문]보다 더 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3·1운동 관련 기사의 양이 다른 어떤 신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이 신문은 3·1운동의 경과와 해외 독립운동의 사실 관계 보도 및 3·1운동이 경제 방면에 미치는 영향 등에 관해 비교적 자세히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는 크다 하겠다. --- 「4권 해제」 중에서 3·1운동에 관한 요미우리신문의 기본적인 논조는 다른 신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당시 저명한 미술평론가이자 사상가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연재 글을 통해 신문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점이나, 조선 관련 기사에서 좀처럼 찾을 수 없는 여성 관련 내용을 상당히 많은 비중으로 실은 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3·1운동 발발이라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상의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던 시기에 문화주의 신문을 표방한 요미우리신문의 정체성이 나름의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은 다른 신문과 비교해 요미우리신문만의 특징으로 평가할 만하다. --- 「5권 해제」 중에서 여기 실린 3·1운동 관련 기사들은 3·1운동에 대한 가장 평균적이고 대중적인 당시 일본인들의 시선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이 두 신문의 기사 내용은 다른 신문들이 보여 주는 가장 일반적인 기사 내용을 보여 준다. … 가령 [고쿠민신문]이 철저하게 어용적인 입장에서 3·1운동과 조선에 대한 보도를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기사를 적극적으로 발신한 것에 비하면, [미야코신문]이나 [요로즈초호]는 가장 대중적인 일본인의 시선, 즉 어디까지나 ‘지배자’로서 아직 불평만이 가득하여 저런 ‘소요’와 ‘폭동’에 의존하는 조선인을 꾸짖고 훈계하려는 시선을 드러낸다. --- 「6권 해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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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언론 매체의 중요성
기본적으로 언론 매체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각종 사건과 사실에 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물론 그에 관한 분석과 해설까지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언론 매체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사회 구성원들의 여론과 정체성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특히 근대 초기라는 시대 상황에서 언론 매체가 갖는 중요성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당시의 신문·잡지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해석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자, 한 국가의 사회적 인식을 총체적으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발간하는 『3·1운동 일본 언론 매체 사료집』은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국가 및 사회적 인식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또한 그 대응 양상은 어떠했는지를 전체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편저자들은 “100년 전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운동이었던 3·1운동에 대한 한일 양국의 입장을 생생하게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유의미한 작업”이라고 이 사료집 편찬의 의의를 말했다. 활자와 사진에 담긴 100년 전 조선과 조선의 사람들 편저자들은 2016년부터 일본 현지의 여러 소장처에서 자료 조사와 수집을 시작하여 1919년 당시 [도쿄아사히신문], [오사카마이니치신문][요미우리신문]을 비롯한 일본의 8개 주요 신문과 [중앙공론], [교육시론][헌정(憲政)] 등 5개 잡지에 실린 3,036편의 기사를 모았으며, 사진 파일에 담긴 이들 기사를 모두 한글 파일로 옮겼다. 6,000매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텍스트로 정리한 뒤 원문 대조를 통해 오탈자를 바로잡았으며, 판독되지 않은 글자들은 별도 표시해 구분했다.(인명, 지명 등에서 어쩌다 보이는 원문의 오자들은 논의 끝에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한편, 각 사료집에 실린 기사들이 거의 대부분 3월 1일자부터 소개되어 고종의 장례식을 비롯한 당시 정황이 비교적 소상히 다루어진다. ‘소요’와 ‘폭동’으로 부각된 3·1운동 이후 일본의 대응과 많은 논의는 교묘하게 식민 지배의 그물을 펴가려 했던 저들의 속내를 엿보게 한다. 사이토 총독 일행에 폭탄을 투척한 강우규 의사, 도쿄에서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여운형, 어렵사리 탈주했지만 붙잡히고 만 의친왕 이강(李堈) 공(公) 등 익히 알려진 이야기의 주인공은 물론, 그보다 훨씬 많은 생소한 인물들의 숨 가쁜 이야기들이 활자와 사진으로 당시를 증언한다. 권마다 차이는 있지만 이들 사료집에는 3·1운동 당시 현장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기사들을 비롯하여 조선총독부의 통치, 조선의 실상 등을 보여주는 여러 사건과 인물이 담겨 있다. 기사 가운데 함께 수록된 사진들은 당시 사회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귀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