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 데리다의 추모사
코스타 두지나_Costas Douzinas 2. 광기에 사로잡힌 데리다 : 생각 그 자체로 광기에 사로잡힌다 장 뤽 낭시_Jean-Luc Nancy 3. 자크 데리다에게 경의를 표하며 알랭 바디우_Alain Badiou 4. 자크 데리다에 대한 찬사에 부치는 소고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_Gayatri Chakravorty Spivak 5. 보편의 구축과 해체 : 자크 데리다의 감각적 확신 에티엔 발리바르_Etienne Balibar 6. 민주주의는 유효한가? 자크 랑시에르_Jacques Ranciere 7. 데리다 : 미래라는 선물? 드루실라 코넬_Drucilla Cornell 8. 차연으로의 복귀를 청하는 호소 : 가벼운 자기변호와 함께? 슬라보예 지젝_Slavoj Zizek 9. 고(故) 데리다 J. 힐리스 밀러_J. Hillis Miller 역자 후기 찾아 보기 |
|
슬로베니아의 한 유명한 가톨릭 지식인으로 문화부 장관 및 주 프랑스 대사를 역임한 바 있으며, 고상한 기독교 윤리의 대가인 체하지만 실상은 윤리적으로 타락한 얼간이에 불과한 자가 부끄러 움도 모른 채 데리다의 때 이른 죽음에 관하여 이렇게 쓴 바 있다.
유일한 무기는 모반과 파괴이다. 이는 다름 아닌 최근에 사망한 사도 자크 데리다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이다. 창문이 보이는 곳마다 그 안으로 벽돌을 던져라. 건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지뢰가 묻혀있을 것이다. 고층 건물이 있는 곳에는 빈 라덴bin Laden과 같은 인물이 나타날 것이다. 어떤 종류가 되었든 제도, 법, 혹은 연대가 있는 곳이라면 왜곡, 즉 길거리나 지하세계의 ‘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구절이야말로 오늘날 지식인의 삶에 출현한 신종 야만주의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현상은 비단 슬로베니아와 같은 주변 국가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제국의 본고장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예를 들면 왜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때마침 역사의 무대에 출현했는지 설명하는 이론들이 등장하고 있다. 사회경제적인 마르크스 혁명의 실패가 분명해지자 그 원인이 서구 기독교의 정신적 토대가 지닌 깊이를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 결과 전복적인 행위의 중심이 정치적ㆍ경제적 투쟁에서 ‘문화적 혁명’으로, 그리고 국가적 자긍심, 가족, 종교, 정신적 헌신 등을 폄하하는 꾸준한 지적ㆍ문화적 작업으로 이동했다. 조국을 위한 희생정신은 ‘권위주의적 인성’을 수반한다는 이유로 무시되었고, 부부간의 정절은 병리학적인 성적 억압의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문명의 모든 기록은 야만의 기록이라는 벤야민의 테제에 따라 서구 문명의 가장 위대한 업적들이 인종차별과 민족학살의 역사를 은폐한 죄목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학계에서 이러한 신종 야만주의를 옹호한 주요 인물로 케빈 맥도널드Kevin MacDonald를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비평의 문화』(The Culture of Critique)에서 20세기에 유대인들에 의해서 주도된 모종의 지적 운동들이 유럽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서구인들의 신념을 파괴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운동들이 비유대인들에게는 보편적이고 심지어는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제시되었지만, 실제로는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유대인들의 이익을 증진시키도록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켜 온 가장 일관된 방식들 중 하나는 복수성과 다양성을 장려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이를 오로지 다른 사람들에게만 요구했다. 19세기 이후 유대인들은 이교 사회의 전통적인 토대들, 예를 들어 애국심, 인종에 대한 충절, 도덕성에 대한 기독교적 기반, 사회적 동질성, 성적 억제와 같은 것들을 불신하도록 유도하는 운동들을 주도했다. 맥도널드는 여러 페이지를 할애하여 아도르노Adorno가 공동 기획한 『권위주의적 인성』(The Authoritarian Personality, 1950)을 자세하게 다룬다. 그가 보기에 이 책의 목적은 모든 집단적 결속이 마치 정신적 혼란의 징후인 것처럼 들리게 하는 것이었다. 애국심에서부터 종교, 가족, 인종에 대한 충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숭고한 감정은 위험하고도 결함을 지닌 ‘권위주의적 인성’의 징후로 배척당했다. 서로 다른 집단들을 구별하는 것은 불법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모든 집단에 대한 충성, 심지어 가까운 가족 간의 유대조차도 ‘편견’이라 낙인찍혔다. 맥도널드는 『권위주의적 인성』이 “오로지 미국인들을 집단 정신요법에 해당하는 치료 대상으로 삼아 그들을 정신병동의 수용자들로 취급해야만 편견이 근절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는 크리스토퍼 래쉬Christopher Lasch의 언급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인용한다. 그렇지만 호르크 하이머Horkheimer와 아도르노가 이방인들의 정신적 질환으로 묘사한 것이야말로 바로 유대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는 집단에 대한 충성심, 전통에 대한 존중, 차이에 대한 의식과 같은 것들이다. 맥도널드의 주장에 의하면, 이 저자들은 이견을 보이는 사람들을 처리할 때 구 소련에서 가장 선호하던 전술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그들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은 누구나 미쳤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 유대 지식인들에게는 반유대주의 또한 정신질환의 징후였다. 기독교적 자기 부정, 특히 성적 억압은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를 유발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정신분석에 열성적이었는데, 그에 따르면 “유아기의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양면성과 가학성 항문기 관계는 반유대주의자들이 지닌 고질적인 유산이다.” 애국심과 인종 정체성을 조롱하는 것 외에도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혼음과 보헤미아적 가난을 칭송한다. “상당히 성공적이었던 1960년대 대항문화 혁명의 핵심적 태도들 중 많은 부분이 확실히 『권위주의적 인성』에서 그 표현을 빌려오고 있다. 여기에는 부모에 대한 반항과 저투자low-investment 성관계를 이상화하고 상향적 사회이동 및 사회적 지위, 가족적 자긍심, 기독교 종교, 애국심을 조롱하는 태도가 포함된다.” 비록 ‘프랑스-유대계 해체주의자 자크 데리다’는 나중에 등장하지만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그도 동일한 전통에 속하게 된다. “해체의 이면에 있는 생각은 강경한 이민정책을 지닌 강력한 민족국가의 작동을 해체하고 민족주의의 수사학, 장소의 정치학, 조국과 모국어의 형이상학을 해체하는 것이다. … 이는 한마디로 … 민족국가가 이방인과 유대인, 아랍인, 이민자들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정체성이라는 … 폭탄을 해체하는 것이다.” 맥도널드에 의하면, ‘가장 추상적인 차원에서 보았을 때 근본적인 어젠다는 유럽 혈통의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인구 통계학적ㆍ문화적 쇠락을 우려하는 현상을 비합리적이자 정신병리학의 징후로 간주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성공적이었다. 백인들이 원래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누가 되었든지 어김없이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선동가로 취급되며, 백인들이 그들의 집단 이익을 방어하려 하면 심리학적으로 미숙한 존재로 낙인찍힌다. 물론 유대인들 자신은 조용히 제외된다. “자민족중심주의가 정신병리학의 한 형태라는 이데올로기는 오랜 역사에 걸쳐 전 세계 모든 문화 중에서 분명 가장 자민족중심 주의적인 것으로 인정되어 온 집단에 의해 널리 퍼졌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위대한 계몽주의 전통의 기준에 의거해 볼 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기존에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부르주아 비합리주의자들’을 지칭한 바 있는 용어로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성의 자기 파괴이다. 명심해야 할 유일한 사항은 이러한 신종 야만주의야말로 정확히 포스트모던적 현상이며, 지극히 반성(反省)적인 자기풍자적 태도의 반면(反面)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맥도널드와 같은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풍자 글을 읽는지, 아니면 ‘진지한’ 논쟁 글을 읽는지 종종 알 수 없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타깝고 놀라운 일은 최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대표하는 몇몇 학자들로서, 맥도널드에 의해 데리다와 더불어 유대인들의 음모에 연루된 자들의 이론적 후예들이 동일한 논리의 주장을 내용만 뒤집어서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목격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역시 그에 못지않은 지독한 중상모략으로 귀결된다. 이제 데리다는 유대인들의 음모의 대행자로서 징계되는 대신에 보드리야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포스트모던’의 도가니 안으로 던져진다. 이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은 대학살Holocaust 부인(否認)에 대한 지적 배경을 직접 제공하지는 않더라도, 결국 원형적 파시스트의 비합리주의로의 길을 연 인물들로 지목된다. 이처럼 고상한 도덕적인 염려의 탈을 쓴 지독한 편협성을 보여주는 가장 최근의 전형적인 인물은 리차드 월린Richard Wolin이다. 그의 『비이성의 유혹』(The Seduction of Unreason)은 1950년대 초반에 루카치Lukacs가 쓴 가장 스탈린적인 작품으로 악명 높은 『이성의 파괴』(Die Zerstoerung der Vernunft)를 계승하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월린은 터무니없게도 9ㆍ11은 미국이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고 주장한 사람들 안에 보드리야르와 함께 나를 포함시켰다. --- 「8. 차연으로의 복귀를 청하는 호소 : 가벼운 자기변호와 함께」 |
|
지젝과 랑시에르, 바디우가
데리다에게 보내는 추모의 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들이 데리다의 이름을 부르고 그에게 글을 보내면서 그에 대한 기억에 경의를 표한다. 2004년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독보적인 이론과 현란한 언어 구사는 살아생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경탄과 존경을 불러일으킨 동시에, 질서를 파괴하고 무책임한 혼란과 허무주의만을 야기한다는 의혹과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은 그의 죽음 앞에서조차 사라지지 않아서 슬픔에 잠긴 추모의 글 못지않게 다수의 비판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사태를 보여주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뉴욕 타임즈”에 실린 캔델의 부음기사로, 이는 그 부당함에 항의하는 4000여명 이상의 서명자들의 항의로 이어지게 된다. 이 책 역시 데리다에 대한 일부 지식인들의 무지와 편견에 대한 항의이자,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한 정당한 평가에 다가가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지젝, 랑시에르, 바디우를 비롯해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비평가들은 각자 자신들의 입장과 핵심어에 ‘이미 항상’ 깃들어있는 데리다의 흔적을 더듬으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 유령의 귀환을 기다리는 이들의 노래는 개인적으로는 친구이자 동료에게 사후에 부치는 편지이자, 때로는 다시 만나지 못할 애인을 그리워하는 연서로 읽힌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데리다가 평생 헌신하였던 ‘도래할 정의’에 대한 책임감을 환기시키며 데리다가 아닌 다른 이들의 화답과 연대를 촉구하는 공적 차원의 수행적 행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안에서 데리다의 죽음은 실로 우리에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책임감과 더불어 희망을 기약하게 만드는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온다. 슬라보예 지젝은 비평 이론에 대한 최근의 공격들을 염두에 두고 헤겔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등장하는 주요 주제들을 광범위한 에세이 서평들을 통해 검토한다. 그는 자신이 해체에 내재한 것으로 감지한 윤리적 전회에 대한 이의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의 차연이 자신의 개념인 시차와 동일한 ‘최소 차이’를 나타낸다고 결론짓는다.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탐구를 환영한다. 랑시에르는 탱크와 전투기로 민주주의를 전파하려는 관념론자들의 승리주의와 도에 넘친 민주주의는 잘못된 정책을 초래하고 정부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자들의 모든 신중론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만이 최적의 정치형태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의 토대는 다름 아닌 모든 토대의 부재이다. 그것의 실현은 어떠한 몫이나 가시성도 지니지 못한 사회적 몫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러한 특수성 속에서 보편의 대변자로서 투쟁한다. 알랭 바디우는 데리다의 차연을 (비)실존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그 소실점에 근접하려는 시도로 보고 이에 대해 개인적이고도 철학적인 경의를 표한다. 데리다의 죽음은 라캉, 알튀세르, 푸코, 리오타르, 들뢰즈를 포함하는 철학사의 혁명적 소용돌이 세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이름들은 혼란스러운 우리 시대를 비추는 ‘봉화이자 등불’이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헤겔의 현상학에 등장하는 감각적 확신 개념과 방브니스트의 주관성의 대화적 구성을 전형적인 데리다의 독법으로 읽어낸다. 또한 발리바르는 변증법 전통과 구조주의 언어학, 그리고 데리다 사이의 분명한 연속성을 제시한다. 해체는 보편적 범주들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억압하는 대상들(여성성, 타자)이 드러나게 만드는 내적 갈등과 긴장을 설명해 준다. 장 뤽 낭시는 친구이자 수년간 대화를 나눈 상대에게 애정이 듬뿍 담긴 지극히 감동적이고도 시적인 추모사를 바친다. 낭시는 자아, 대명사 나I의 광기, 데리다의 광기를 찬양하고 애도한다. 그것은 철학적이면서 개인적인 사랑의 증거, 이 지극히 세속적인 신자가 바치는 사랑의 기도이다. J. 힐리스 밀러는 지극히 감동적인 담화를 통해 데리다의 최근 세미나에 대해 논의한다. 데리다는 말하기, 글쓰기, 반복을 통해서 죽음을 미루는 동시에 자신의 삶 속에 통합시키고자 했다. 데리다에게 죽음은 이미 삶 속에 들어와 있을 뿐만 아니라, 탄생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고, 삶은 사후에 살아지는 것이며, 죽음은 이름 속에 남는다. 이것이 데리다가 그토록 유령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그의 망령이 텍스트와 이름들, 데리다의 이름으로 도래할 공동체 등 수없이 다른 모습으로 계속 되돌아오게 될 이유이다. 드루실라 코넬이 보기에 데리다가 우리에게 명하는 것은 책임지고 새로운 계획표를 창조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미래는 언제나 도래할 것인 동시에 항상 이미 우리 실존의 일부이다. 코넬에 의하면 우리의 정치적 책임은 도래할 정의에 대한 넬슨 만델라의 헌신에 의해 예시되는데, 그것은 이미 법 안에 내재해 있으며, 법의 부정의를 밝힌다. 코스타 두지나는 좋은 말의 삶과 좋은 에토스를 찬양한다. 데리다의 이름은 삶과 작품 모두가 축복이 되게 하며, 그 이름을 기리며 계속 도래할 정의의 공동체의 아르케이자 텔로스이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의 추모사는 데리다가 준 선물인 ‘책임과 책무’, 그리고 어머니를 애도하려는 그의 시도를 되돌아본다. 스피박은 칸트의 규정적인 ‘마치 ~처럼’과 데리다의 흔적의 관계를 탐색함으로써 페미니즘을 ‘어머니의 어린아이-흔적을 인지하는 것으로 본다. 시간화, 즉 유예하고 지연시키는 것은 어머니의 선물이며, 우리는 바로 그러한 틀 안에서 도래할 민주주의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는 신칸트주의적인 자유주의적 세계인과 대비되는 데리다의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이다. 이 책은 데리다가 사망한 지 두 달 후인 2005년 5월과 6월, 런던 대학 버벡 칼리지 강연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모은 것이다. 이 강연은 데리다가 이미 고인이 된 친구들을 위해 쓰고 읽은 많은 추모사들처럼 일종의 ‘사후의 선물’이다. 데리다를 기리는 대부분의 추모사에서 강연자 본인과 데리다의 개인적 관계 및 우정을 언급했다. 이 책에서는 연설 당시의 구어체와 강연에서 느껴지는 청각적 정서가 생생하게 재현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