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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7
0. 죽음과 걸음 11 1일. 고집스러움 15 2일. 좋은 삶 19 3일. 비효율과 비합리 23 4일. 루틴 만들기 27 5일. 봄 31 6일. 생각함과 생각됨 35 7일. 뚜벅뚜벅 죽음으로 39 8일. 순례자 43 9일. 싯다르타 47 10일. 통념 51 11일. 개선 55 12일. 자연스러움, 인간적임 59 13일. 주유(周遊) 63 14일. 깨! 67 15일. 점근선 71 16일. 걷고 쓰고 살다 75 17일. 자기혁명 79 18일. 운명애 83 19일. 감자탕 87 20일. 위기 91 21일. 자유 95 22일. 초발심 99 23일. 걷는 이 103 24일. 아버지 107 25일. 정의 111 26일. 마모 115 27일. 김욱진 119 ∞. 꿈 123 나오며 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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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모르고 걷기로 마음먹었다. 12년 전 나는 영국의 작은 도시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혹독한 영국 겨울을 나면서 정신을 못차리던 나는 2008년 3월, 부활절 방학을 맞이했다. 누가 스페인에 가면 순례길이 있다고 했다. 알베르게라는 숙소가 있어 숙박비도 하루 몇 유로면 된다고 그랬다. 정말? 솔깃했다.
그래, 4주 동안 마냥 걸어봐야겠다. 저가항공을 타고 프랑스 남부로 날아갔다. 4주 안에 800킬로를 걸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는지 마음은 비장했다. 짧은 시간에 목적지까지 가려다보니 탈도 났다. 진통제를 먹으며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어야 했다. 전투하듯 목적지에 다다랐지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았다. 어라? 산티아고를 걸었지만 내 영혼의 크기는 별로 커지지 않았다. 여전히 내게 세상은 감당하기 버거웠다. 벅찬 나날이 계속됐지만 내면의 고민을 직면할 용기도 부족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고, 결혼을 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12년이 흘러있었다. 그사이 아버지를 잃었다. 살아계실 때는 그리도 그의 그늘을 벗어나고 싶었다. 막상 아버지의 작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게 되니 매일 아침이 무겁게 다가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공허함을 느끼는 순간이 불쑥 찾아들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노력은 철저히 내 몫으로 남겨졌다. 다시 산티아고길이 걷고 싶어졌다. 직장생활을 하는 입장에서 한 달 시간을 내기는 무리였다.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점심, 회사 근처에서 즉석떡볶이를 볶다가 더 이상 순례를 미룰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용기를 냈다. 스페인에 가지 못한다면 지금, 여기를 산티아고로 만들 수도 있잖아? 항상 떠오르는 태양처럼 내가 매일 다니는 길을 산티아고로 생각하면 되잖아? 다음 날부터 편도 10킬로쯤 되는 길을 걸어서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시도를 ‘일상이 산티아고’라 이름 붙였다. 하루 3만보, 20킬로를 걷는다고 치면 40일이면 될 것 같았다. 매일 시계 대신 만보계를 차고 걸음수를 측정했다. 3만보는 비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나니 달성하지 못한 날이 더 많다. 결국 800킬로, 100만보를 걷기까지 모두 49일이 필요했다. 12년 전 순례길을 걸을 때 매일 단상을 기록했다. 오랜만에 강릉에 갔다가 먼지 쌓은 노트를 펼쳤다. 혈기 넘치는 24세 젊은이는 스스로 묻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세계는 내게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말이다. 노트를 덮고 나니 지금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궁금해졌다. 매일 아침 걸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에 나를 맡겼다.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이 내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게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회사에서 점심을 먹으며 꺼낸다면 다들 딱한 눈빛으로 쳐다볼 법한 질문이었다. 새벽에 걸으며 품은 의문은 회사로 들어오면서 접어둬야 했다. 거친 생각은 글로 토해냈다. 글로 남기고 보니 12년 전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할 수 있었다. 강산이 변할 만큼 시간이 흘렀건만 부끄럽게도 나의 내면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나의 본질이라면, 이제 나는 나를 받아들여야겠다. 따라서 ‘일상이 산티아고’는 내가 나를 감싸안으려는 몸부림의 기록이다. 꼭 스페인이 아니더라도 내가 딛고선 자리와 내가 숨쉬는 순간을 사랑하려 애쓰니 지금, 여기도 산티아고가 될 수 있었다. 일상에서 내디딘 한 걸음 한 걸음이 내가 살아있음을 깨닫는 여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