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이집트인 모세 7
II. 모세가 이집트인이었다면 III. 모세, 그의 민족, 그리고 일신론적 종교 제1부 서문 I(1938년 3월 이전) | 서문 II(1938년 6월) | A. 역사적 전제 | B. 잠복기와 전승 | C. 유비 | D. 적용 | E. 난점들 제2부 _ 요약과 반복 a. 이스라엘 민족 | b. 위대한 사람 | c. 영성의 진보 | d. 욕동의 단념 | e. 종교의 진리 내용 | f. 억압된 것의 회귀 | g. 역사적 진리 | h. 역사적 전개 옮긴이 후기 187 |
Sigmund Freud, Sigmund Schlomo Freud,지기시문트 술로모 프로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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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이집트인 구원자 “그 사람 모세”
모세 살해의 트라우마가 남긴 인류 역사의 흔적 우리는 프로이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사람 모세와 일신론적 종교』는 프로이트가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런던으로 망명을 갔을 당시 완성되었으며, 그가 82세 되던 해인 1939년에 출간되었다. 프로이트는 이 책을 마지막으로 쓰고 그해 타계하였다. 이 책은 제목부터 용이하지 않다. “그 사람 모세”란 도대체 무엇인가? 영역본에서 번역한 기존의 번역서는 “인간 모세” 혹은 그냥 “모세”라고 한 경우가 많은데, 프로이트는 독일어본에서 왜 “그 사람”이라고 했을까? 이 의문을 우리는 2010년 그린비에서 출간된 얀 아스만의 책 『이집트인 모세』에서 풀 수 있었다. 모세가 이집트인이라는 사실과 그가 역사적 인물이 아닌 “기억”의 인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아스만의 문화학적 저서를 통해 접할 수 있다. 모세가 히브리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었지만, 히브리인들은 모세의 유일신 종교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상을 만들고, 그들이 보기에 못마땅한 모세를 출애굽기 11장 3절의 표현대로, “그 사람 모세”라고 지칭하였다. 물론 이것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프로이트의 가설이다. 모세는 누구인가? 프로이트는 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그의 이름에 대한 기록을 추적한다. 그리고 모세가 추종한 아케나톤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한다. 아케나톤은 모세와는 달리 기원전 1350년경에 이집트 역사에 등장하는데, 그가 유일신교를 창시하기 전까지 이집트는 보수적이고 매우 영향력이 강한 사제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문 숭배라는 이름하에 다신을 섬기고 있었으며 사자숭배나 미라, 화려한 무덤 등에서 보듯이 사후 세계를 믿고 있었다. 아케나톤은 이 모든 것을 말살하고 아문을 섬기는 첫 일신교를 창설하였다. 이 종교는 마법과 주술을 배제하였고 성상을 부정하였으며, 사후 세계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오직 이 땅에서의 삶만을 찬양하였다. 이에 따라 그들은 유일한 신 아톤만을 섬기고 나머지 신들은 배격했다. 프로이트의 추론에 따르면 모세는 이런 아케나톤의 추종자인 사제(레위지파)였거나 아니면 이집트 귀족, 그것도 아니면 어떤 변방의 총독이었을 것이다. 히브리의 역사에 감춰진 “아버지 살해” 집단심리학에 적용된 트라우마 이론 그러면 고고학자도, 역사가도, 히브리 종교의 랍비도 아닌 그가 왜 이런 글을 썼을까? 프로이트는 개인 심리학적 차원에서 밝힌 트라우마 이론을 집단심리학에 적용하고 싶어 했다. 다시 말해 『토템과 타부』에서 주장한 그의 가설을 이집트인 모세에 적용하여 모세에 관한 “역사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소설을 쓰려던 그의 첫 의도는 빗나가고 만다. 그의 말대로라면 “진흙 위의 청동기단”이 된 셈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개인 심리학적 차원의 트라우마 이론이 집단심리학에도 적용된다는 가설뿐이었다. 그때 그는 “모세는 히브리인들에게 살해되었다”는 브레스티드, 마이어, 젤린과 같은 학자들의 가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가설을 오이디푸스 이론과 연결하여, 결국 히브리의 역사에서 아버지 살해라는 집단 심리를 추적한다. 그것은 드디어 집단 심리학에서의 잠복과 회귀라는 가설을 만들어 낸다. 프로이트가 이 글을 쓴 것은 유대 역사가 예루살미가 설명한 유대인 정체성 때문도 아니고 생물학적 라마르크주의에 대한 변호 때문도 아니다.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말하기도 했지만 유대종교의 역사나 모세에 관한 성서비판은 더더욱 아니다. 그가 관찰하고 연구한 것은 그가 여러 번 힘주어 주장하고 있듯이 개인심리학과 집단심리학의 유비(類比)에 있다. 당연하게도 그의 주장은 정신분석의 트라우마 이론에서 출발한다. 유년기의 트라우마는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다가 (계기를 만나면) 회귀한다. 어떤 교통사고도 마찬가지다. 당시에는 잊혔다가 어떤 잠복기를 거쳐 새로 부활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집단문화에도 이런 과정이 그대로 재현된다고 믿었다. 프로이트 생각에 살해된 모세는 유대인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메시아의 죽음(기독교에서는 훗날 오시는 예수를 의미한다고 본다)을 예언하는 이사야서 53장의 전승을 정당화할 수 없다. 프로이트는 이를 통해 모세에 관한 기록이 왜곡되었다는 추론을 여러 장에 걸쳐 펼친다. 그는 출애굽을 주도한 모세, 카데스에서 미디안의 사제가 되어 화산신인 야훼를 받아들이는 모세는 성경에서 말하는 인물과는 다른 사람이며, 분노하고 시기하는 야훼의 모습 또한 사실은 모세의 성격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유대의 종교는 결국 모세교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아버지 살해를 계통발생의 반복설을 주장한 라마르크주의에 의존하여 기독교의 예수 십자가 처형에도 적용한다. 결국 유대인은 두 번에 걸쳐 아버지 살해를 반복한 것이다. 확정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프로이트는 유대인이 모세를 살해하여 죄의식을 얻고, 나아가 예수까지 살해함으로써 반유대주의를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반유대주의는 반지성주의이다, 소멸의 공포가 만들어 낸 현재진행형의 텍스트 이제 우리는 이 책의 첫 문장에서 고백한 프로이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민족의 후손들에게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그 민족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기꺼이 그리고 쉽게 저지를 일이 못된다. 더구나 그것을 집필하는 사람이 그 민족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민족의 추정적 이해관계 때문에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어떤 사태를 설명함으로써 우리의 통찰에 이득을 얻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민족의 추정적 이해관계”라는 대목에서 프로이트가 모세에 관한 진실을 과감히 말하려는 학자라는 걸 알 수 있다.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모세는 프로이트가 주창한 정신분석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니까. 프로이트는 다른 성상(聖像) 종교(프로이트는 기독교를 완전한 일신교로 보지는 않는다)에 비하여 유대 일신교는 영성의 진보를 이루었다고 옹호한다. 유대 유일신교는 성상금지와 함께 주술적 의례의 거부, 그리고 계명을 통한 윤리적 요구의 강조에 기초한다. 그렇기 때문에 반유대주의에 대해 프로이트는 반지성주의, 즉 영성의 진보에 대한 반작용 형성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히틀러를 포함한 반유대주의는 욕동의 단념을 요구한 유일신교에 대한 비이성적 저항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의 파라텍스트는 텍스트와 교묘히 얽혀 있다. 그는 망명하기 전, 이미 빈에 있을 때부터 가톨릭에 의해 정신분석이 끊어질까 봐 큰 불안을 느꼈고, 나치에 의해 유대인이 말살될까 봐(그래서 자신의 업적이 폐기될까 봐) 불안해했고, 그리고 아들(칼 융)로부터 ‘아버지 살해’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 책을 하나의 목소리로 읽을 수 없다. 비록 모세에 대한 가설, 라마르크주의에 입각한 사유, 오이디푸스 가설 등이 비판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이미 100년 전에 기억 담론의 요지를 선취했다는 사실이 『그 사람 모세와 일신론적 종교』를 현재진행형의 텍스트로 만들어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