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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견뎌내는 세 가지 유형... 두 남자와 한 여자
--- 00/02/01 김선희(rosak@hanmail.net)
이 책에 대한 어느 일간 신문기자의 평을 보니, 소설을 읽으며 영화 '넘버쓰리'와 '초록물고기'가 생각났다는데, 나는 박신양이 깡패로 나오는 '약속'이 생각났다. 언젠가 한 번 만났던 여자에 대한 깡패의 삼고초려 같은 구애(?)때문이었나? 어쨌든….
한 여자와 두 남자 사이에 긴박한 사건이 터질 것 같은 상황을 만들어 놓고, 그들의 옛날을 하나하나 다시 거슬러 올라가다 다시 원점으로 가져다 놓는 수미쌍관법(?)이라는 구성을 채택하고 있다. 어둠의 자식들인 세 주인공들이 어떻게 처음 인연을 맺었는지, 그리고 각기 젊은 날을 어떻게 살다가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 그 연결되어진 고리들이 흥미롭게 전개되어 재미있게 읽힌다. 흔하지 않게 쓰이는 부사(副詞)등을 조화롭게 잘 살리고 있어 정성들여 쓴 문체라는 걸 알 수는 있지만 통속소설이 될 듯 말 듯 아주 애매한 경계에 있는 소설이다. 깡패의 질투심으로 인해 결국 한 여자를 두고 벌이는 치정극처럼 결말을 내리고 있어서 더욱 그런 느낌이다. '상처를 통해 획득되는 존재증명' 이것이 작가가 일러주는 주제이다. 어쩌나? 작가 후기에서 작가 '임영태'는 이 책이 좀 잘 팔렸으면 좋겠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는데 잘 안 팔릴 것 같아 조금 걱정이다. 추신 시인과 깡패는 직업(?)으로 표기하면서 왜 절간에서 행자 노릇하는 여주인공만 그냥 '여자'라고 표기했는지 모르겠다. 여자를 소수민족처럼 간주하는 실수를 범한게 아닌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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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남자는 선뜻 물건을 사 주지는 않았다. 의심스런 눈초리로 위아래를 훑어보면서 물건의 출처와 시인의 직업 따위를 캐물어 왔다. 핑계를 대는 데에 익숙치 않은 시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세의 반값에서 다시 가격을 내려주며 싫으면 관두라는 말 한 마디만 덧붙였다. 결국 주인의 마음이 흔들렸다. 고작 서너 마 가격에 불과한 헐값이었던 것이다.
첫 도둑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후로 시인은 어머니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적당한 간격을 두고 포목 꾸러미를 빼돌렸다. 용돈이 궁해서는 아니었다. 씀씀이가 헤프지도 않았거니와 어머니는 외아들인 시인에게 늘 충분한 용돈을 건네고 있었다. 게다가 돈을 생각하기로 하면, 시인이 넘기는 값은 아무리 장물 비슷히 팔아치우는 것이라 해도 그 가격이 지나치게 헐했다. 시인은 돈 액수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시인은 다만 그 행위가 주는 어떤 감각적 긴장에 취해 있었다. 그 행위에는 매우 에로틱한 흡인력이 있었다. 싱그러운 활기가 그 안에 있었다. 어머니 몰래 포목을 들고 나갈 때, 의심스런 눈초리의 낯선 상인에게 그것을 넘길때, 그리고 몇 장의 지폐를 받아 휭하니 돌아설 때마다 시인은 짜릿한 쾌감을 느끼고는 했다. --- p.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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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사내는 서로 어깨 겨루는 동네 왈패들과 서열을 정하기 위하여 자주 철길에 눕고는 했다. 당시 그런 식의 기싸움은 왈패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달려오는 열차를 앞에 두고 철길에 머리를 베고 누워서는 누가 더 늦게 남아 있는가로 승부를 가리는 내기였다. 사내는 그 승부에서만은 언제나 이길 수 있었다. 그는 달려오는 열차 따위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것이다. 열차가 어디쯤 왔는지, 얼마 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지, 그는 단 한번도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고 오직 옆자리에 같이 누워 있는 상대의 움직임만 냉정하게 지켜보았다. 상대가 움직이지 않는 한 그는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열차를 보지 않는다는 건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몸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을 가늠하느라 힐끗힐끗 열차쪽을 바라보며 진땀을 흘리는 상대 옆에서 그는 단 한 가지, 내기의 승부에만 마음을 집중시켰다. 상대보다 먼저 움직이면 진다, 상대보다 늦게 일어나면 이긴다. 오직 그것만을 기억했다. 죽는다는 일이 가소롭기만 하던 그 시절, 사내에게 철길의 승부는 가장 손쉬운 겨루기였다. 상대를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 아니던가. 상대가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도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열차가 덮칠 때까지 상대가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은 함께 죽게 될 것이다. 그랬다. 그 내기는 죽음을 담보로 한 내기였다. 누가 죽음에 얼마만큼 초연한가. 그것이 게임의 승패를 결정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철길의 승부는 가장 단순하고 편한 내기였다. 어떤 머리싸움도 없이, 주먹 한번 불끈 쥘 것도 없이, 애오라지 상대의 움직임만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면 되는 일이었다. --- pp.1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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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량있는 작가 임영태가 4년만에 발표한 순수소설의 진수!
'달빛이 있었다'에 비쳐진 작가의 내공은 실로 범사이 않다. 나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세 주인공(여자, 시인, 깡패) 각각의 삶이 서로 자연스럽게 드나드는 탄력적인 구성이며, 첫 장(여름날 오후, 도시)과 마지막 장(여름날 오후, 도시)이 딱 맞아떨어지는 수미쌍관적 배치, 풍부한 우리말 어휘 사용과 흑백영화를 연상케 하는 간결하고도 서정적인 문체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특별한 극적 장치 없이도 작품 전체에 걸쳐 일정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의 작가의 필려고가 감각이 놀랍기 그지없다.
그저 눈빛만으로 다 알 것 같은 염화시중의 미소,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 위로 쏟아지던 그날의 달빛, 느리고 둔탁하지만 가슴속에 끝없이 퍼져나가는 오래된 종소리... 이 소설은 바로 그런 느낌에 맞닿아 있다. 말없이 다가와 가만가만 상처를 토닥여주는, 따뜻한 한줌 달빛 같은 소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