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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발문ㅣ이수호 7
ㅣ책을 펴내며ㅣ 15 이시백 소리소설 전태일전 23 임진택 창작판소리 판소리전태일 71 ㅣ작가 후기ㅣ 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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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이 본격적으로 일자리를 찾는데, 구두통을 메고 평화시장을 오가다가 ‘시다 구함’ 광고를 보고, 헌 옷 기워 입고 목욕재계한 후 학생복 맞춤집 삼일사를 찾아간다. 청계천 6가의 평화시장이 어떤 곳이더냐, 악취 풍기는 청계천 천변에 무허가 판자촌들이 다닥다닥, 빈민들이 득실득실, 움막이건 가난뱅이건 지저분한 것들은 말끔히 덮어라! 썩든 말든 안 보이면 장땡, 호박 구덩이에 똥 묻듯이, 눈 가리고 아웅이라. 1959년에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가 1961년에 완공되어 3층 건물 평화시장이 들어섰으니, 연건평 7,400평, 피복 제조업자, 의류가게 수백 개가 닭장처럼 채워진다.
시다가 무엇이냐, 기술을 배우는 견습공이라. 말이 좋아 공원이지, 하기 힘든 궂은 일, 귀찮은 잔심부름, 도맡아서 하는 밑바닥 노동자라. 미싱사, 재단사를 모시고 실과 단추를 나르고, 하루 종일 뜨거운 다림질, 실밥 뜯고 옷감 펼치고, 어이, 시다! 출출하니 빵 사와라, 목마르다 물 떠와라, 이리 와라 저리 가라, 오라 가라, 오락가락, 다리가 넷으로도 모자라고, 손이 발이 되어 발발발발 기어 다녀도 툭하면 머리통 쥐어박히기 십상이네. 시다 첫 월급이 천오백 원, 일당으로 오십 원꼴이니, 하루 하숙비 백이십 원에도 모자라다. 아침 일찍 구두 닦고, 밤에는 껌을 팔아 시다 기술 배우자니 눈물겹고 허리 휜다. 고된 시다살이 중에도, 서울 어딘가에서 고생하실 어머니 만날 생각, 배가 고파 울고 있을 동생들 생각, 이를 물고 기술을 배우더라. 일찌감치 아버지 일을 도우며 배운 재봉 기술, 주인 눈에 쏙 들어 미싱 보조로 승진한 태일, 월급도 삼천 원에, 잔심부름 면제되니, 감개가 무량하다. ---「이시백, 소리소설 〈전태일전〉」중에서 〈아니리〉 1970년 10월 6일, 삼동친목회는 노동청장에게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 개선 진정서’를 제출한바, 이튿날 시내 각 신문사 게시판을 오가며 기다리던 태일이가 석간신문 나오자마자 살펴본즉, 그날 〈경향신문〉 사회면 톱기사로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평화시장의 참상에 관한 보도가 실렸것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두드리면 열린 것이라. 〈중중모리〉 태일이가 감격하여 바로 신문을 사서 들고 평화시장으로 달려간다. “어허. 삼동 동지들아, 어서 나와 신문 보라. 골방서 하루 열여섯 시간, 어린 소녀 2만여 명 혹사. 거의가 직업병, 노동청 뒤늦게 고발키로…… 어허, 삼동 동지들아, 어서 나와 신문 보라……” 삼동회원들 반기하여 바삐 신문을 읽어보더니만, “신문을 더 사서 사람들에게 알리자.” 전당포로 달려가서 차고 있던 탱크시계를 맡겨놓고 대출 받은 돈으로 신문을 싸그리 사온다. “평화시장 기사 특보.” “신문이요 신문, 경향신문.” “신문 한 장에 이십 원.” “특보요, 평화시장 기사 특보요.”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까지 건물 층층이 돌아다니며 목이 터져라 외쳐대니 어떤 사람 돈을 내며, “한 장 주시오. 내 신문 사서 읽어보긴 처음이요.” 또 어떤 사람은 백 원을 내며 “수고 많소. 이걸로 신문 더 갖다 팔으시오.” 신문 300부가 삽시간에 팔렸구나. ---「임진택, 창작판소리 〈판소리 전태일〉」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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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의 말
『전태일 평전』을 읽고 나서 나는 이 이야기를 ‘판소리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 후 전태일 형이 직접 남긴 일기와 수기, 편지 등을 접하면서 받은 충격적인 감동은 판소리를 단순히 ‘만드는’ 정도를 넘어 ‘판소리로 새겨 놓겠다’는 충동이 생겨나게 했다. 앞서 나는 ‘형체 복원’이라는 고고학적 용어를 등장시켰거니와, ‘새긴다’라는 공예나 판화에서나 사용하는 미술 용어로도 표현했다. 노래를 ‘부르는’ 수준을 넘어, 그림을 ‘그리는’ 정도를 넘어, 소리로 ‘새긴다’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마음속에,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刻印시킨다는 뜻이다. 나는 전태일 형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새겨서’ 세상에 더 널리 전하고 후대에 남기기 위해 판소리라는 양식을 선택한 것이다. -임진택, 「이 책을 펴내며」에서 전태일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50해를 맞아, 임진택 선생이 그간 해온 우리의 근대사 창작판소리 열두 바탕에 ‘전태일 열사’의 삶을 담으려는데, 그 이야기를 써보라 하였다. 몇 달을 끙끙거렸으나, 워낙 소리에는 재주가 모자라 짧은 소설 한 편을 짓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임진택 선생의 제대로 된 판소리 대본과 내 엉거주춤한 소설을 묶어, ‘이야기와 소리로 만나는 전태일’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게 되었다. -이시백, 「작가의 말」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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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태일이라면 항상 숙연해지고 마음이 저려옵니다. 꽃다운 스물두 살 나이에 하나밖에 없는 가장 귀한 것을 더 필요한 남을 위해 바친 그 순결하고 숭고한 마음과 실천이 한없이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왔던 우리들에겐 언제나 마음의 빚이었지요. 임진택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가 시대의 소리꾼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많은 창작판소리를 만들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어린 시다들에게 풀빵을 나누어주며 미소 짓고 있는 태일이의 얼굴이나, 자기를 태워 불꽃이 되어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던 외침을 보며 들으며 살아왔으니까요. 내가 전태일재단에서 일하게 됐다는 얘기를 했을 때도 임진택은 전태일을 꼭 판소리로 부활시키겠다고 공언을 했으니까요. 그 꿈이 전태일 50주기에 이루어지게 돼서 너무나 기쁩니다. - 이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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