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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지난밤 떨어진 꽃/프리지아/야와 여의 차이/담쟁이 넝쿨/둘 사이/첫눈 오는 소리/4월/사랑초/눈 내리는 날/낙엽/사랑초 독백/꿈 2부 고등어야 미안해/한식/군말/눈물의 깊이/우주의 등대/가버린 것들/둘리 친구/별은 빛나건만/싱크대 웜홀/대곡역 부근/개 혀/어떤 한량 3부 새봄엔/산다는 것/조각배/나의 길/그는 시 속으로/기울인다는 것/내가 나에게 묻다/불문곡직하고/은어 떼와 함께/남몰래 흐르는 눈물/일어서는 봄/꿈에 김득신이 찾아와 4부 북천 앞산/오대산 버들치/수바위/선릉에서/숲/미루나무/가을 숲/눈의 나라 방패 삽/요강 화분/개구리 울음소리/강원도 정선 느른국 5부 독섬을 노래함/어린 시민군/2020년 1월 망월동/어느 묘비명 앞에서/도보다리 위에서/봉오동의 별 홍범도洪範圖 장군/동창리에 울려 퍼진 만세소리/꽃잎의 노래/김마리아/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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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틀 녘이면 어느새 가느다란 꽃대 벌어지는
너는 아침을 몰고 오는 꽃 방림동 누님 댁에서 너를 얻어 온 날 연보랏빛 꽃봉오리 들어 올린 네가 좋아서 너의 꽃말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그 말 들려오는가 싶어 온종일 바라보곤 하였다 잎 활짝 펼친 너는 화분 가득 날아온 수많은 나비 떼 너에게 귀를 기울이다 보면 때때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고요한 어스름녘 흑자주색 향 번져오는 듯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거나 옷깃에 코 비벼대곤 했다 어쩌다 물 주는 걸 잊으면 너는 속절없이 주저앉았고 그럴 때면 으레 헝클어진 머리칼 묶어주며 그 속에 새겨진 너만의 무늬 오래오래 들여다보았다 네가 주저앉은 자리엔 가끔 회색빛 그늘 내려앉았지만 물 듬뿍 뿌려주면 너는 금세 초롱초롱해지고 다음날이면 잎사귀마다 감쳐둔 종소리 눈 맞출 때마다 쟁쟁 울리며 온종일 사랑의 숲을 이루었다 ---「사랑초」중에서 망월 묘역에 잠든 수백 기의 봉분들 대부분 한날한시에 쓰러졌거나 열흘 낮 열흘 밤 동안 웃고 울다 꽃처럼 떨어진 사람들 백주 대낮 충장로 우다방 앞에서 금남로 은행나무 옆에서 가톨릭센터 앞 인도와 도로 사이에서 월산동 임동 산수동 양동 시장에서 대인동 지산동 광천동에서 송정리에서 일일이 셀 수도 없이 많은 곳에서 슬픔과 분노로 몸을 떨다가 느닷없는 일격에 맞아 스러져간 사람들 봉분들 사이로 걷다가 문득 바라다본 글귀 “힘들고 고단한 세월을 함께 해주셔서 힘이 되었어요 아버지의 인내와 사랑 간직하고 살게요 이제 고통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세요.” 잠시 서서 고개 숙였네 버젓이 활개 치는 반란의 수괴 광주를 폭도로 몰아붙이는 악마들 불벼락 내리기를, 또한 깊이 묵상했네 ---「어느 묘비명 앞에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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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와 같은 시집의 구성과 각 부의 소개
『눈물의 깊이』는 시인의 매우 섬세한 의도 아래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로 나뉜 시편들의 내용과 형식, 성격을 살펴보면 상당히 뚜렷하다는 특징이 있다. 전체적으로 통독을 마쳤을 때는 마치 장중한 파노라마를 목도한 느낌이 들 정도다. 시인의 다채로운 시적 관심이 투영된 결과로서 이 시집은 독자들에게 박선욱이라는 시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그의 시의 뿌리와 문학적 기원, 글쓰기의 지향까지를 살필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1부는 ‘손에 잡힐 만한 거리에 있는 일상의 시학’이라고 부를 만한 시편들을 모았다. 여기에 배치된 작품에는 아내에게 선물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주문한 프리지아 꽃이 도착한 날의 작은 설렘과 경이가 참으로 담담하면서도 소소하게 묘사한 시편(「프리지아」)도 포함되어 있는데 프리지아가 가져다 준 기쁨을 “한그루의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마음이 참으로 환하다. “아내는 빈 화분에 대파 같은 줄기와 잎 가지런히 모아/조심조심 흙도 부어주고/두 손으로 꾹꾹 눌러 다진 뒤 물을 주었습니다//다음 날 일어나 보니/거실이 온통 촛불을 켜놓은 듯/샛노란 향기로 가득했습니다/늦봄에 찾아온/한 그루의 축복이었습니다” 사소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보편의 경험들을 시적 부력으로 띄워 놓을 줄 아는 시인의 맑은 촉기가 빛나는 것이다. 열두 편이 한 데 묶인 2부에서 시인은 일상에서 한 발치 나아간 곳에서 발견되는 작은 ‘풍속’들을 다룬다. 실내 미세먼지의 주범으로 정부가 난데없이 고등어구이에서 나오는 먼지를 지목하자 시인은 고등어에게 내심 미안해진 마음으로 시를 쓴다. 뿐만 아니라 달과 화성과 금성이 한 줄로 늘어선 천문현상이 벌어진 날의 감회를 통해 세계의 운명을 통찰하기도 하고, 통제와 관리의 대상에서 훌쩍 벗어나버린 아이를 ‘둘리’로 명명하면서 부모로서의 아슬한 심사를 내비치기도 한다. 또한 시인은 콩트의 한 시퀀스처럼 소설가 이문구 선생이 알려준 능청스러운 충청도 사투리에 얽힌 재밌는 일화를 털어놓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적 에피소드의 환기를 통해 시인이 의도한 것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외부의 불가해하고 음험한 의도들을 붙잡아 보고하는 것일 터이다. 그렇다면 시인 박선욱에게 시는 어쩌면 기억 저장 장치일지도 모른다. 3부의 시편들은 1부와 2부에서 보여준 구체적 물상의 관찰에서 얻어진 각성과는 사뭇 다른 관념과 의지의 세계에 대한 결연한 통찰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그는 남몰래 키운 고통과 슬픔을 내비치며 존재의 한계를 더듬기도 하고, 은어 떼가 비유적으로 보여준 태초의 순수한 이데아의 세계로 회귀하여 시인으로서의 본분을 재삼 자각하기도 한다. 시인 특유의 서정적 특질이 진정성을 깊이 드리운 성찰과 응시에 있음을 3부의 시편들은 잘 보여준다. 서늘할 정도로 맑은 시어들이 독자들의 마음 역시 살갑게 벼려줄 것이다. 4부의 시편들은 우리 고전 시가의 중요한 제재였던 자연산수를 노래하는 시편들로 구성되었다. 일상과 풍속의 관찰 및 진술을 거쳐 자신의 속을 깊이 들여본 후에서야 비로소 자연으로 눈길을 돌린 것인데, 이 역시 매우 섬세한 시인의 의도로 보인다. 여기서 시인은 주관적 언술을 극히 절제하고 삼엄한 거리를 유지한 채 마치 선승처럼 화두를 부여잡는데, 북천 앞산을 노래한 시(「북천 앞산」)에서 “무엇이냐 저것은/그믐밤 손톱만한 별/더 깊은 침묵 속으로 물러앉는 저것은/한낮의 가파른 들썩임 자취도 없이/순한 잔등만 남은 저것은/어느 고승들의 묵언이 이룬/높다란 널방이냐”고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결기로 존재론적 궁극을 묻는 것이다. 그것을 자연이 아니면 어디에 대고 물을 수 있냐는 듯. 시인에겐 오대산 버들치와 미루나무, 요강이었던 화분, 개구리 등이 모두 삼라만상의 질서와 가치를 가르쳐주는 스승이자 벗들이다. 5부에서 시인은 드디어 역사로 나아간다. 군사독재의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꿋꿋이 일어났던 광주민주항생의 주인공들을 노래하며 호명하고(「어린 시민군」 「2020년 1월 망월동」 「어느 묘비명 앞에서」), 외세의 불온한 수작에 단호한 언어로 민족적, 주체적 기개를 표현하기도 하며(「독섬을 노래함」), 일본 제국주의 폭력에 짓밟힌 위안부 소녀들을 뜨거운 언어로 위로하기도 하고(「꽃잎의 노래」) 일제의 야욕에 결연히 싸우며 목숨마저 바친 선인들의 삶을 장엄하고 웅혼하게 되살리기도 한다(「봉오동의 별 홍범도 장군」 「김마리아」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후인으로서 표상이 될 만한 선인들의 삶을 복원하는 데 있어 박선욱 시인은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한국이 낳은 통영 출신의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의 평전을 써서 평단과 독자로부터 고평과 상찬을 받은 바 있는데, 이번 시집에 홍범도, 김마리아, 남자현 등의 독립운동 유공자들의 삶이 영웅 서사시처럼 포함되어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특히 일반 독자들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남자현 열사의 삶을 물경 539행의 장시로 복원해 소개한 것은 시단 전체의 자랑이며 쾌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