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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 초원
거울 속의 거울 고독한 꽃나비 길에서 구하다 길 없는 길 꽃 물들다 별밤에 야생을 출력하다 젊은이들 하늘새 여행, 하마하마 춤춰라 행여 여행하시려거든 몽골을 가시라 초원 교집합 사막 chapter2. 초원과 교집합 사막 공간을 산책하다 _ 권태 도플갱어 너 어딨니 몽골은 왜 나를 유혹하는가 백야 어떤사람 에피소드 웃프다 유목민들 쥐코밥상 chapter3. 사막 곡선을 그리다 그만 울어버렸어 낙타의 짐을 내려놓다 미자생존美者生存 싹싸울나무 바람의 울음 문명의 뒤편 식은태 사막의 본적 타는 목마름 한바탕 씻김굿 한계 평론 발견의 오딧세이, 그 불편한 평화 … 이원희(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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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대면의 시간, 타자를 만나고 시공간을 만나는 일이다. 길든 관습에서 벗어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길트기 행위이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타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보고, 듣고, 즐기고, 사귀기 위하여 인간은 여행이란 채널을 가동하는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민낯을 보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접하면서 나를 객관화시킬 기회이다. 타지에서의 삶은 일상의 가면이 벗겨져 지극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낯익은 사람의 낯선 모습을 본다. 먼발치에서 좋게만 보였던 사람이 그것이 아님을 보았고, 선입견으로 판정한 내 생각이 편견이었음도 알았다. 타인의 행동을 보면서 짐짓 보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므로, 사람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보게 되고 그 상대에 나를 비추어 관찰한다. 그러기에 여행은 눈을 뜨는 발견의 여정이며 생각을 낳는 산파의 시간이라 해야 하겠다. 대립하는 것들을 기쁨으로 연결하려면 이원성, 다원성을 필수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도 새삼 깨닫는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듯 타인에 비친 나를 본다. 거울은 외면뿐 아니라 내면의 상태를 비추는 창이기도 하다. 거울을 단순히 사물, 그러니까 물리적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유리막 정도로 간주하면 그 사람은 거울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나 스스로는 제대로 볼 수 없지만, 타인을 거울에 비추어 그 거울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를 성찰하는 작업이다. 외출할 때 거울 앞에서 화장한다. 밖에서도 한두 번은 거울을 본다. 그 봄은 외관의 매무새 확인으로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 내면은 별로 점검하지 않았다. 타인의 거울에 나의 단면을 속속들이 비추어 보자. --- 「거울속의 거울」 중에서 여행은 박제화된 일상의 탈출이다. 내 안에 물기가 말라갈 무렵 낯선곳의 물기를 빨아들여 목을 축이고 갈증을 달래어야 내일을 또 힘차게 살 수 있다. 짐을 꾸리며 설렘을 가방 안에 하나하나 채워나간다. 손꼽아 하루하루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그 과정도 여행의 한 부분으로 행복한 시간이다. 일상의 권태를 풀기 위한 수단으로 여행만큼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여행은 마음의 잠을 재워주는 행위이다. 우리의 마음도 지칠 때는 잠이 필요하다. 마음속에 잡다한 것들을 하나로 편집하는 일이 잠자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어지럽고 복잡하고 자잘한 것들을 여과시킬 수 있는 여행, 여행 기간에는 내 몸에 침전된 과거나 미래를 끌어내 현재의 시간에 데려다 놓는다. 아무리 복잡한 것도 아무것도 아닌 듯 매듭이 풀리고 단순화되어 즐길 수 있다. --- 「여행 하마하마 춤춰라」 중에서 몽골에 들어서니 바람이 먼저 마중을 나왔다. 안녕 허둥지둥 인사를 한다. 바람은 무시로 불고 불어가면서 훠이훠이 제 자유를 누리다가 작년에 휭 다녀갔던 내가 아련했던지 격렬하게 껴안는다. 몽골의 바람과 초원과 야생마를 사랑하게 된 나를 기억하고 있었음이다. 나 또한 1년만의 재회에 두 팔 벌려 포옹을 했다. 홀로 절대를 향해 불어가는 바람도 가끔은 멈추어 서서 나 같은 사람을 알은체해주니 고맙기 이를 데 없다. 바람을 만나 바람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바람이 된다. 어느새 새 몸뚱이를 받아 내가 아닌 내가 되어 있다. 바람의 길이 나의 길인 양 바람이 살랑대는 꽃길이 전생의 어느 한 기간 내 영혼이 머문 것처럼 편안하다. 여기 몽골에서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훨훨 날고 싶은 본능이 작동한다. 지금 내게는 무인도에 갇힌 듯 나를 에워싸고 있는 초원, 사막, 꽃, 노을, 별 등등 자연만이 존재한다. 그 속에 낮과 밤도 들어있어 낮의 밝음에서 흡입하여 확장하고, 밤의 어둠 속에 그들을 여과하고 발효시킨다. --- 「몽골은 왜 나를 유혹하는가」 중에서 철도와 고속도로가 아닌 오솔길이 좋아지고, 어지간한 것은 건너뛸 수 있는 너그러움도 키워졌다. 어두운 터널이 오히려 빨리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고, 직선이 행복의 지름길만은 아니었다. 먹구름 속에 태양이 숨어있었음이다. 오래 걸어온 내 길에는 몇몇 반질반질 윤나는 나만의 길도 만들어졌다. 한데, 방치되어 발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은 곳도 있다.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면 사람의 관계가 소원해지듯 길도 머물러야만 유지되는 것이지 내버려 두면 있던 길도 메워져 버리는 것이 또한 인생길이다. 내가 살아온 삶을 하나하나 이어보니 아름다운 곡선이 그려진다. 점으로 이어진 동그라미와 하트가 사랑스럽다. 곡선의 길은 느림의 길이다. 그 길은 멀지만 나만 아는 쾌감이 있었다. 오르락내리락 좌절하며 성취하며 고통 중에도 인생을 즐기며 곡예사처럼 살아왔다. --- 「곡선을 그리는 시간」 중에서 결심한다. 인생이라는 노상에서 습관적으로 타인에게 끌려가듯 살지 말자. 시간은 내가 생산하는 것, 나에게 집중하기로 한다. 팔자를 넘어서 쉼표를 찍어 보자. 니체의 말대로라면 지금쯤은 낙타에서 완전히 벗어나 사자를 거쳐 어린아이가 되어 있어야 함에도 아직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뭔가 부단히 움직인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혹사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의무처럼 짐을 지어야 편안한 것은 이 무슨 조화 속인고? 무의식이 작용하는 일상은 마치 짐을 지고 서둘러 사막으로 가는 낙타처럼 --- 「낙타의 짐을 내려놓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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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고 다시 시작하는 몽골여행으로의 초대
『계단에서 만난 시간』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에서 만나는 대상과의 미러링을 통해 숨찬 사유를 걷어 올린 에세이다. 순우리말을 가미한 철학적, 문학적 깊이는 우리에게 여러 생각을 끌어낸다. 올 컬러로 세련되게 디자인한 책 속의 몽골 사진들은 현지를 다녀온 사람은 다시 추억을 소환하고, 가보지 않은 사람은 몽골 여행을 꿈꾸게 만든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여행의 진정한 참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 길을 떠날 것이다. 여행은 타자를 체험하고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데 있습니다. 이때 체험이나 경험은 몸의 기억이거나 정신의 기억입니다. 주체가 무엇이든 기억은 기록으로 다시 태어나지요. 경험이 언어로 몸을 바꿀 때 경험의 실다운 의미가 삶의 외곽에서 중심지대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주체의 사유가 박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또한 자신을 관찰대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글쓰기에서 작가는 사유주체이면서 사유대상의 그물망에 들어갑니다. 경험서사를 다루는 수필은 특히 그렇지요. 이런 의미에서 일상경험을 소재로 하는 수필을 언어를 매재로 한 사유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접시저울의 한쪽에 사유를, 다른 쪽에 레토릭을 올려놓고 기울기를 보면 단박에 수필의 품격을 알 수 있으니까요. 이는 수필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지요. 문학이라는 범주에 드는 모든 글쓰기, 예술로 가름할 수 있는 모든 것도 예외가 아닙니다. 유희재의 『藝槪』라는 책에서 예술의 ‘예’는 ‘도’ 혹은 ‘정신’이며, ‘술’은 테크닉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술이란 사유를 어떻게 기술적으로 드러내느냐에 따라 가치를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전통예술이 ‘정신’을 중시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오늘날은 ‘기교’가 앞섭니다. 그러나 균형은 아름답습니다. 문학의 경우, 기록된 것들은 언어의 옷을 입을 수밖에 없고요, 그 옷은 다채로운 레토릭으로 꾸며지길 바라게 되지요. 그러나 자칫 레토릭만 성하고 정작 사유가 빈곤하면 작품의 무게도 비례적으로 가볍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여행에서 만나는 대상과 미러링을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공감의식으로 대상과 동일화를 꾀해 마침내는 자기발견이라는 숨찬 사유의 여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점에서 이 책은 레토릭보다는 사유의 언어들로 채워졌다고 봅니다. 이같이 이 수필집은 여행경험을 밑감 삼아 작가의 사유를 현재화합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여행 여정은 생각의 행렬입니다. 이럴 때 성찰의 불꽃, 지적인 순발력이 발휘됩니다. 이것이 책의 존재감을 갖게 하며 독자에게는 가독성을 높여줍니다. 그런데 사유의 중심에는 항상 자기자신이 있지요. 그러니까 작가 자신이 의미의 귀착점인 셈입니다. 짧지 않은 여행 동안 작가가 많은 것들과 대면했음을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글 속에는 그런 것들은 주변부에 있습니다. 대상은 자신을 조회하는 거울 이미지를 띠며 글쓰기의 배경으로 나앉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대상에 투영된 작가가 돌올하게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이는 뽐내거나 자기현시와는 다릅니다. 자기해체와 재구성, 이를 발견의 형식이라고 한다면. 작가는 발견을 위해 여행 중에 목격한 대상을 끌어옵니다. 그래서 야생의 시간과 공간으로의 몽골 여행은 미지의 자신 혹은 숨은 자기를 찾아내는 순례의 여정 즉 ‘발견의 오딧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견은 당연히 자신을 해부해서 비루한 것들을 들춰내기에 불편하며 곤혹스럽기도 합니다. 이 책에 들어있는 수필은 바로 이런 사유행위가 구워낸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빛과 열의 존재가 되기 위해 작가는 여전히 봇짐을 꾸릴 것입니다. 이 책은 만월을 향하는 여정에서 열사흘쯤 될까요? - 이원희 (문학박사, 전 사이버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