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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들은 밤에 찾아온다
양장
문학동네 2021.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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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곤돌라 | 뇌우 | 헤인즈 | 9월 말 | 마지막 오후 | 파울라 | 파울라 Ⅱ | 가장 먼 곳 | 옮긴이의 말 | 세스 노터봄 연보

저자 소개 1

세스 노터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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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es Nooteboom,Cornelis Johannes Jacobus Maria Nooteboom

노벨문학상 후보로 꾸준히 이름이 오르내리는 네덜란드의 대표 작가다. 시인이고 소설가이자 언론인으로, 아홉 권의 소설과 여러 권의 여행서를 출간했다. 1933년 7월 3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태어났다. 가출한 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 중 헤이그 시내에 집중 투하된 폭탄에 맞아 사망한 후 독실한 가톨릭 신자와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의붓아버지에 의해 가톨릭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기숙사 학교로 보내졌으나 오래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가출을 일삼는 등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이때부터 문학적 기질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파리로 건너간 이후 이 년 동안
노벨문학상 후보로 꾸준히 이름이 오르내리는 네덜란드의 대표 작가다. 시인이고 소설가이자 언론인으로, 아홉 권의 소설과 여러 권의 여행서를 출간했다. 1933년 7월 3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태어났다. 가출한 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 중 헤이그 시내에 집중 투하된 폭탄에 맞아 사망한 후 독실한 가톨릭 신자와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의붓아버지에 의해 가톨릭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기숙사 학교로 보내졌으나 오래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가출을 일삼는 등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이때부터 문학적 기질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파리로 건너간 이후 이 년 동안 유럽 전역을 정처 없이 방랑하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필립과 다른 사람들』(1955)을 출간했다.

이 작품의 발표 직후 안네 프랑크 상을 수상하면서 세스 노터봄은 스물둘의 젊은 나이에 일약 문단의 스타가 되었다. 이십대부터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다른 삶의 방식도 존중해야 함을 깊이 인식하였고, 여행을 통해 얻은 사색과 영감은 그의 시와 소설, 에세이와 여행기 등 작품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부루아에서의 어느 오후』(1963), 『베를린 수기』(1990), 『산티아고로 가는 길』(1992), 『유목민 호텔Nootebooms Hotel』(2002) 등 여러 편의 여행기를 출간했다.

시와 소설, 에세이와 여행기, 희곡과 시사평론, 샹송의 작사와 번역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르의 글을 두루 써 온 노터봄은 유럽 문학상(1993), 독일의 괴테 상(1992), 네덜란드의 페이 세이 호프트 상(2004) 등을 수상했으며, 프랑스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1991), 문학예술훈장(2003) 등을 수여받았다. 소설 『필립과 다른 사람들Philip en de anderen』(1954)로 안네 프랑크 상을, 소설 『의식Rituelen』(1980)으로 페가수스 상을 수상했고, 스페인의 역사와 예술 속을 거닐며 쓴 『산티아고 가는 길De omweg naar Santiago』(1992)은 여행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또한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 미국 현대 어문협회의 회원으로 임명되었는가 하면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스페인 메노르카 섬을 오가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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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3월 15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216쪽 | 356g | 136*195*17mm
ISBN13
9788954677578

책 속으로

그는 사진을 쳐다보았고 언제나처럼 사진의 배반성에 놀랐다. 사진은 죽은 사람을 불러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유효하지 않은 자신의 이형(異形)을 대면시켜주기도 한다. 이제는 알아볼 수 없는 긴 머리의 낯선 남자, 수많은 시간 속에 완벽히 순응한 외모, 사진은 영원히 지나가버린 시간의 퀴퀴한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다.
--- p.13

우리는 시간의 틈새를 몰래 빠져나올 뿐이라고, 삶의 무대장치를 남겨두고 떠날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p.13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동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슬픔을 동반한다. 그 슬픔이 너무 커서 나락으로 빠지거나 수수께끼 같은 완벽한 현실에 굴복하기도 한다.
--- p.14

그때 가면 사진 속 사람들은 모두 죽음의 왕국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혹은 유령 같은 노인들의 처지로 내몰렸거나. 그 시점에 사진을 보는 건 빠르고 덧없이 지나가버린 시간들을 위한 우울한 행사가 될 것이다.
--- p.51

좋은 이야기에서 시간적 측면은 생략되기도 하고 명백히 드러나기도 한다. 사진에서는 누가 없는지, 부재의 요소가 늘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알 것인가? 즉, 사진 속 사람들을 모른다면 사진에 없는 사람들도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 p.52

그녀는 요정이었고 빛을 발하는 존재였다. 헤인즈가 말한 건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위 위에 떨어져 죽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요정 같은 사람은 죽지 않으니까.
--- p.87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그의 비밀을 해독하기 위한, 그의 생각을 풀어내기 위한, 가면 뒤의 모습을 보기 위한 방법들로는 무엇이 있을까? 허접한 영화나 지저분한 소설로부터 얻은 결핍, 잡지에서 사용하는 심리학 용어들, 결코 눕고 싶지 않은 상상 속 긴 의자, 거짓이 진실보다 강해서 어떤 진실도 볼 수 없는 거울들.
--- p.88

사십 년 뒤 당신의 무덤에 꽃을 갖다놓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겠는가? “삶이 무너질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지켜보라.”
--- p.92

꽃잎들은 떨어지기 전에 이미 수의(壽衣)로 몸을 감싼 듯 저절로 동글게 말려 있었다. 꽃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이런 일상의 의식에 익숙해져야 했지만 거북이가 꽃을 향해 갑옷 머리를 내미는 모습은 그녀에게 알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이제 그 꽃은 선혈처럼 빨갛지 않았다. 오히려 말라버린 피 색깔을 띤 오그라든 나비 같았다.
--- p.134

나이가 들수록 점점 인생이란 게 상상의 산물 같아 보이기 시작하는 건 어찌된 일인가? 늙음과 죽음 둘 중 어느 것이 더 나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당신은 나이들지 않았고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 p.155

감독이 두 시간짜리 영화로 만들 수 있거나, 작가가 이틀 만에 읽어낼 책으로 만들 수 있는 삶은 거의 가치가 없어요.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고, 그건 한없이 길어질 수 있다고요.
--- p.156

당신은 뱅커에 베팅하고 카드에 손을 얹고 있었다. 여러분, 마지막입니다. 이런 일로 사람들은 암에 걸리고, 자동차 사고를 내고, 이혼하고, 비참한 지경에 빠지고, 위대한 사랑을 하고, 힐턴만큼 큰 다이아몬드를 가진다.
--- p.168

지금 나는 후회하는가? 심연을 들여다보고 용기를 잃었는가? 너무 겁이 많고 심약한가? 나는 살아 있을 때 어느 것에도 절대로 후회하지 말자고 결심했었다. 이제는 모르겠다. 너무 늦었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늦어버렸다는 걸 새삼 느낀다.
--- p.183

내가 찾는 건 기억이지만, 얻는 건 기억의 목록들이다. 목록이 내 목적은 아니다. 아직도 걸치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계속 걷어내고 벗겨내야 한다.
--- p.183

당신은 매일 밤 살고 싶지 않은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고 대답했다. 당신은 반어적으로 말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밤이면 그런 순간이 찾아오는 걸 알았기에 당신은 늘 두려워했다. 당신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을 들었다.
--- p.186

당신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운명에 도전한다는 것. 그 도전은 현실세계 아니면 적어도 도박장에서 이뤄졌다. 패배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영원한 확신, 그건 진리다. 그리고 그 진리는 늘 은폐된다. 가끔 한번씩 당신들이 승리자가 되기도 하니까.
--- p.189

당신이 나를 어떻게 파괴하려 했는지 보기 위해 내가 당신의 지하세계로 들어가야 했나? 아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있었다. 당신은 하루에 한 번씩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제 나는 하루종일 죽어 있고 당신은 살아 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살 수 없었다. 내 잘못인가? 당신은 내 삶의 도전이었나?

--- p.191

출판사 리뷰

당신은 하루에 한 번씩 죽고 싶어했고
매일 밤 어둠을 두려워했다.
여우들은 밤에 찾아온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사고로 목숨을 잃은 건 나였다.
나의 빛은 꺼져가고 있지만
아직 진짜 이별이 온 건 아니다.
죽음은 세 가지 순간으로 나뉘니까.
우리가 헤어질 때, 육체가 죽었을 때,
그리고 마침내 산 자가 죽은 자를
혹은 죽은 자가 산 자를 잊기 위해 마음먹은 때.



★ 2010 벨기에 황금부엉이상 수상
이 소설집은 마음을 다친 이들을 위한 정교한 장난감이다. 인디펜던트
요란하게 마케팅된 그 어느 걸작들보다 훨씬 큰 진실을 품고 있다. 리터러리 리뷰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모든 단어와 관찰적 묘사는 계산된 동시에 여운을 남긴다. 아이리시 타임스


시간과 존재를 붙들어두는 사진을 매개로 산 자와 죽은 자는 교감한다
「곤돌라」 「헤인즈」 「파울라」


세스 노터봄이 천착해온 대표 주제는 ‘죽음’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 이별의 의미, 산 자와 죽은 자의 마음에 대해 묻고 사유하며 자신의 문장으로 그 미지의 세계를 다뤄왔다. 노터봄은 『여우들은 밤에 찾아온다』에서 시간을 잡아두고 속이는 ‘사진’을 통해 죽은 자를 기억하는 인물들을 그린다. 「곤돌라」의 주인공은 사십 년 전 베네치아 여행에서 애인과 찍었던 사진 한 장을 들고 다시 그 장소를 찾는다. 사진 속 여인은 세상을 떠나고 없다. 그는 죽은 자를 생생히 떠올리게 하고, 더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를 대면시켜주는 사진의 위력에 새삼 놀라움을 느낀다. 더불어 사십 년 전 머물렀던 공간을 다시 거닐며 죽은 애인의 부재(不在)를 느끼는 여행을 통해 아직 어딘가 열려 있는 그녀와의 관계를 나름의 방식으로 끝맺고자 한다. 그는 그 이별 의식이 살아 있는 자신과 죽어버린 그녀를 위해 꼭 필요한 일임을 안다.

실제로 누군가가 자신의 인생에서 그저 사라져버린다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다. 필요한 건 백 가지 평행한 삶들이다. (18p, 「곤돌라」)

과거의 일에서 무언가 놓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가령 검증해보는 일이나 이별의 형식 같은. 필요하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라도 끝맺음이 있어야 한다. (25p, 「곤돌라」)

「헤인즈」에서 ‘나’는 과거에 자주 어울린 무리와 찍었던 단체 사진을 본다. 그중 헤인즈는 이탈리아 해안지역 리구리아에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 술로 급격하게 망가져간 인물이다. 나는 남모르는 비애를 품은 동시에 경박함과 유쾌함을 지닌 헤인즈에게 정의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고 함께 어울리지만, 결국 그가 망가진 몸으로 죽음에 다다른 순간에는 먼 곳에 떨어져 있게 된다. 훗날 나는 사진 속 헤인즈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려고 시도하며 그의 삶에 대해 새롭게 알아낼 단서들이 있을지 탐색한다. 「파울라」의 화자 역시 수십 년 전 함께 어울리던 무리 중 유일하게 자신이 깊은 감정을 품었으나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여인 파울라를 기억한다. 최소한의 물건만 남기고 텅 빈 집에서 수도자처럼 살고 있는 화자는 여전히 과거의 기억만을 잔뜩 끌어안은 채 그녀의 사진을 바라보며, 이것이 완전히 이별하지 못한 자신이 그녀와 교감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세 가지 이별의 순간으로 나뉜다
「마지막 오후」 「파울라 Ⅱ」


노터봄은 육신의 죽음 이후 인간의 정신이 진정한 소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하는데, 이는 죽은 자의 정신뿐 아니라 남겨진 이의 마음이 치유되는 일과도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 오후」에서 ‘나’는 급작스럽게 죽은 남편과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지낸다. 그러다 어느 늦은 오후, 여느 때처럼 정원에 드리운 사이프러스 그림자가 담장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돌연 깨닫는다. 이제야 자신의 남편이 죽었음을, 빛의 움직임에 민감하고 밤을 두려워했던 그 남자를 진정으로 떠나보낼 순간이 왔음을. 그러면서 그녀는 죽음이 세 가지 순간으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헤어질 때, 육체가 죽었을 때, 그리고 산 자가 죽은 자를 혹은 죽은 자가 산 자를 잊기로 마음먹은 때.

그가 죽었을 때 그녀에게 그건 진짜 죽음을 뜻하지 않았다. 지금에야 그는 죽었다. 그녀에게 그의 진짜 죽음은 사이프러스 그림자가 담장 높이 드리웠던 비밀스러운 순간에 일어났다. 어찌 그토록 확신할 수 있을까? 그녀는 세 가지 순간을 생각했다. 이별의 순간, 그의 죽음의 순간, 그리고 그를 잊기 위해 오래 끌어온 지금의 순간. 이제 그는 하나의 그림자가 되었고, 그 그림자는 진짜 죽음이었다. (135p, 「마지막 오후」)

내 존재는 내 기억들이다. 그건 확실하다. 그러나 그 기억들을 얼마나 간직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 기억들을 잃은 뒤에야 내 진짜 죽음이 오는 것이다. 내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하는 건 그런 의미에서다. 죽었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아직 내가 무언가 끝맺음할 일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178p, 「파울라 Ⅱ」)

「파울라」에서 회상의 대상이었던 죽은 파울라가 「파울라 Ⅱ」에서는 화자로 등장한다. 그녀는 죽음 이후 존재도 시간도 없는 상태에 놓이지만 자신의 기억만은 생생히 간직하고 있다. 그 모든 기억들을 벗어내고 진짜 죽음에 이르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뒤늦게 깨닫는 후회라는 감정 안에 좀더 머물며 자기 삶에서 해소하지 못했던 물음들을 던진다.


자연 속에서 분투하는 생과 죽음의 몸짓
「뇌우」 「9월 말」 「가장 먼 곳」


오랜 세월 세계를 여행하고 세상을 탐구해온 노터봄의 소설에서는 흥미로운 여행기 혹은 자연을 노래하는 섬세한 서정시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여우들은 밤에 찾아온다』는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의 지중해 연안 도시를 배경으로, 죽어야 하는 운명과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지닌 인간이 자연 속에서 교감하고 굴복하고 몸부림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수지의 몸무게는 48킬로그램이다. 따라서 바람이 세게 불지 않아도 바다로 나가는 넓은 도로에서는 충분히 날아갈 수 있다. 위성류나무, 소나무, 무화과나무, 나뭇잎이 흔들리고 바람이 운다. 끝까지 버티는 거야, 그녀는 가냘픈 왼쪽 어깨로 바다에서 육지를 향해 휘몰아치는 광풍을 맞으며 중얼거린다. 끝까지 버티는 거야. (115p, 「9월 말」)

백 마리의 갈매기떼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질러댄다. 그곳에 빠져 죽은 자들에게 소리를 지른다. 남자와 여자 모두 돌아오라고 소리친다. 나는 안다. 그 깊은 곳으로 사라져버리고 싶음을, 흔들리며 춤을 추는 물결 속으로 없어져버리고 싶음을.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춤이 끝났다는 것도, 다시 먼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안다. (200p, 「가장 먼 곳」)

「9월 말」에서 ‘수지’는 스페인에 사는 영국인이고,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 해안가 집에서 홀로 살고 있다. 그녀와 잠자리를 하는 동네 술집의 종업원은 빨리 찾아온 추위 탓에 관광객이 줄자 도시를 떠날 생각을 하지만, 그녀는 영국식으로 추위에 대비하고 그곳 자연에 순응하며 “끝까지 버티는 거야”라는 말을 주문처럼 읊조린다. 「가장 먼 곳」의 ‘나’는 흐린 날이면 섬 가장 멀리 있는 등대에 간다. 분노와 환호가 교차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드넓은 바다 앞에서 춤을 춘다. 굽이치는 물결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먼저 빠져 죽은 자들을 생각하며 소리만 지를 뿐이다. 결단하지 못하고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자신에게 굴욕감을 느끼며 다시 강풍이 불고 바다가 광포하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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